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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85화 (185/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92)

    23시 59분 59초

    대통령은 왕이나 독재자와는 다르다.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평등한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어 일국을 대표하는 국민들의 대변인이자 지도자이다. 대통령이 왕이나 독재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지도를 할 수 있지만 지배는 할 수 없고, 권고는 할 수 있지만 강요는 할 수 없다. 제대로 일을 추진하려면 국민들과 정치인들의 지지가 필요하며, 그마저도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과 계획 구상도 그리고 예산 편성과 씨름해야 한다.

    먼 옛날 조선시대의 왕들은 일이 너무 많아서 단명했다고들 하지만, 그건 현대의 대통령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5년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에 큼지막한 문제들과 해결해도 줄어들지 않는 자잘한 문제들을 쉬지 않고 삽으로 퍼내야 한다.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임기 내내 욕먹다가 초라하게 퇴장한다.

    그게 바로 현대 사회의 대통령이라는 존재다. 권력은 초라하지만 상징성은 대단하고, 업무는 많지만 자유는 한없이 적은 존재.

    멀쩡했던 시절의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제는 지저 도시 임시 정부의 대통령직을 이어 나가고 있는 김창호는 나날이 늘어 가는 한숨과 주름에 압사해 버릴 것 같았다.

    지상에 있을 때도 충분히 많은 문제들과 씨름을 했지만, 지저 도시에 내려온 이후부터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치열한 문제들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마치 여행하는 나그네들 앞에 당당히 나타나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너는 잡아먹힐 것이라고 말하는 스핑크스처럼.

    “비서실장.”

    “예.”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우리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이해해, 자네도 답답하겠지.”

    김창호는 전 정권들의 사생아이자 함부로 상속을 포기할 수 없는 유산, 아픈 손가락이나 다름없는 중장갑수색대와 중장갑타격대를 떠올렸다.

    지저 도시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정보와 관련자들을 최대한 처리했다고 생각했건만, 가장 요주의 인물이자 핵심 그 자체였던 박한성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건 제법 큰 문제였다.

    현장 경험이 그리 풍부하지 않은 국내 파트 국정원 요원들만으로는 그를 처리하기는커녕 제압할 수도 없었고, 지금은 정부가 나서서 대대적인 척살에 나서는 것조차 버거웠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북한의 땅굴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전 정권들 때부터 꾸준히 중장갑수색대를 일선에 투입시켰고,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미국으로부터 비밀리에 넘겨받은 MK 울트라 프로젝트의 완성판이었던 기억소거제였다. 명목상으로는 그들의 트라우마와 전의 상실감을 지우기 위해서였다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목격하고 기억한 것을 전부 잊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전 정권 대통령과 함께 김창호 본인도 직접 지시했던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억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기억소거제를 맞았던 박한성이 기억을 되찾았다면, 그가 정부를 포함한 상층부에 반감을 품고 독자적인 세력을 조직해서 뒷주머니를 차는 것도 당연했다.

    실제로 그는 누구도 모르게, 남들보다 훨씬 빨리 자신만의 조직을 구축했고 다양한 세력들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다.

    그가 밀수 조직뿐만이 아닌 북부 지구 주민, 남부 지구 고위층, 중장갑보병 부대 그리고 미래그룹까지 깊은 관계를 맺었음을 파악했을 때는 너무 늦어 버렸다.

    조사와 첩보에 따르면 그는 지상에서도 결코 지저 도시에 뒤처지지 않는 세력들과 손을 잡았으며, 자신의 영향력을 나날이 넓혀 가고 있다고 한다.

    매번 그에 대한 보고를 접할 때마다, 어째서 그를 확실하게 사살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국을 위해 희생했던 군인을 그런 식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들끓었다.

    “지저 도시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서부 곡창지대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금세 해결했고, 식량과 공산품 생산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지. 전력과 수도 공급도 문제가 없어. 그런데도 여전히 주변에선 문제투성이라고 아우성을 치더군.”

    “외람된 말씀이지만 지상에서도 제 몸에 똥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던 썩어 빠진 정치인들을 지저 도시에 그대로 데려온 것이 패착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그들과 뭐가 다르겠나. 똥도 묻고, 피도 묻고, 수많은 인간들의 원망이 깊게 밴 이 몸뚱어리에선 악취가 빠지질 않는데.”

    “운이 없으셨을 뿐입니다.”

    “운도 능력이야, 이 사람아. 북한의 상황과 그곳 지하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들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해결했어야 했어. 북한이 그렇게 되는 꼴을 확인했으면서, 정작 국내에서 그런 일이 터질 거라곤 조금도 예상치 못했잖나.”

    특급 기밀로 보관되어 있는 그 데이터들 속에 존재하는 ‘괴물’들은…… 북한 땅에만 있는 줄 알았다.

    북한이 스스로 자멸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설령 저들이 육지로 진격해 온다고 한들, 지뢰투성이인 DMZ를 넘어 대한민국의 튼튼한 최전선을 뚫어 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놈의 지지율이 뭐라고, 그놈의 비밀 유지가 뭐라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흑야 사태 속에서도 최대한 챙길 것은 챙겨 보자는 식으로 움직였건만, 그 결과가 이거다.

    실질적으로 김창호 본인이 해결한 것은 지저 도시의 안정화가 끝이다.

    식량, 생필품, 전력, 수도, 원자재 공급 등이야 아랫것들을 적당히 부려 먹기만 하면 금세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실제로 해결하기까지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잖은가.

    그런데 그것 외에 달리 내세울 게 없다.

    정치인들은 뒷돈을 얼마나 받아 처먹었는지 무거운 엉덩이를 뗄 생각도 안 하고, 기업들은 정부의 말을 잘 따라 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장 믿고 있었던 디그러쉬는 하룻밤 만에 통째로 증발해 버리면서 대혼란을 겪게 했다.

    주변에 온통 무능한 인간들뿐이라 조사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계획들은 먼지가 잔뜩 쌓여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

    한 청년은 개인의 힘으로 정부와 맞먹을 정도의 힘과 세력을 키웠건만, 그 대단하다는 정부는 고작 개인의 꽁무니나 쫓아야 하는 신세라니.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전 대통령이 똑똑했어. 처음부터 이 모든 걸 눈치채고 나한테 미련 없이 대통령직을 떠넘겼던 거지. 선거 유세 당시에도 이렇다 할 만한 상대 후보들이 나오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김창호는 결단력이 있으며, 또한 야욕이 상당한 정치인이었다.

    디그러쉬가 주도하는 범지구적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보고서 차세대 산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자마자 디그러쉬와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또한 앞으로 열릴 신세계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했다. 중장갑수색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결과를 까 보니 자신의 완벽한 패배.

    믿었던 디그러쉬도, 제거했다고 생각했던 중장갑수색대의 망령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부터 지저 도시의 천장에서 꾸준한 지진이 감지된다는 불안한 보고들까지. 악재에 악재가 겹치면서 김창호의 정신력은 나날이 깎여 나갔다.

    만약 한국이 총기 소지 자유 국가이고, 대통령에게도 멋들어진 권총이 한 정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는 충동적인 결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군.”

    때가 되면 그는 희망과 꿈으로 가득했던 지저 도시에 강제로 묶어 두었던 수십만 시민들의 손을 놔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가죽 부대에, 신세계에는 그에 걸맞은 신세대가.

    자신들이 낡고 헤진 가죽 부대이며, 격동하는 시대에 뒤처진 구닥다리 세대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후회스러울 따름이었다.

    *    *    *

    집안을 돌아다니던 마지막 바퀴벌레까지 확실히 잡아서 약을 뿌리고, 최후에는 불로 태워서 변기에 내려 버렸을 때의 쾌감을 아는가?

    아니면 매일 밤 사각사각 기어 다니던 지네나 앵앵대던 모기를 잡았을 때의 쾌감은?

    어느 쪽이든 우리는 그것을 해방감이라고 부른다.

    불안함, 불쾌감이라는 억압 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극한의 쾌감.

    나는 마지막 사이비이자 끝내 검은 하늘이 되지 못한 흑천을 내 손으로 확실히 짓이기고, 그의 잔해를 화염방사기로 불태웠을 때 그런 기분을 느꼈다.

    비록 체력은 바닥나고, 과하게 분비된 아드레날린 덕분에 잠시 채무이행을 미뤄 두고 있는 전신 근육통이 벌써부터 겁나지만, 어쨌든 가장 커다란 문제 2개 중 1개를 해결했다.

    나는 환호성을 내지르는 군인들에게서 행가래도 몇 번 받은 후에야 지휘 차량에 지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의무관이 내 몸에 난 상처들을 직접 소독하고 약을 바르면서 부산을 떨 때마다, 나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른 부상자들이나 보러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사람들, 나보다 더 깊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트럭을 몇 대나 동원해도 차고 넘칠 만큼 많을 텐데, 고작 나 한 명을 위해서 전문 인력이 낭비되고 있는 꼴이 영 달갑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 추하네.’

    나는 괜찮으니 다른 부상자들을 먼저 봐 달라. 그렇게 말하면 자신 때문에 흐른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가득한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네가 전쟁을 일으킨 거야.

    그래, 내가 일으켰다.

    내가 사람들을 돕는 척하면서 그들이 잃어버린 투지와 삶의 의지를 다시 불피웠고, 그들이 영영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희망의 불빛을 보여 주면서 선동했다.

    그들을 선동하기 위해 내 목숨을 걸어서 연기를 했고, 그들이 합리적인 이유로 무장할 수 있게끔 적을 만들어 냈다.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을 터인 알량한 애국심을 자극하고, 어른들이 솔선수범해서 미래를 열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어린아이들을 볼모로 잡았다.

    그 아이들을 위해 전장에 나선 어른들 중 적지 않은 자가 차가운 땅으로 되돌아갔으며, 또 누군가는 영구적인 장애를 입었다.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치료 환경이 열악해서 오늘내일하다가 죽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

    나는 따뜻한 지휘 차량에서 편안한 들것에 실린 채로 후방으로 이송되면서, 몇 번이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기적이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이 짊어진 업을 덜어 내고 싶었다.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평범한 평화를 갈구하던 소시민 중 하나였을 뿐인데.

    “진통제와 신경안정제를 투여했으니 조금 졸리실 겁니다. 많이 지치셨을 테니 후방으로 이송될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약 기운에 취해서 눈을 감으면 ‘그때’처럼 모든 것을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내 손에 묻힌 다른 누군가의 피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기꺼이 내 몸에 몇 번이고 주삿바늘을 찔러 넣으련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어서 그냥 눈을 감았다.

    첫 번째 전쟁을 이겼고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어쨌든 이번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훌륭하게 작전 목표를 달성했으며 전술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완벽하게 승리했다. 당장 내일부터 인간들의 활동 반경과 지역 장악 능력이 대폭 향상되겠지.

    거기에 또…… 이번 승리를 이용해서 프로파간다를 하면 사상자들의 빈 자리를 새로운 군인들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많은 보급품과 거주 구역이 필요하겠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일들을 대비해야 한다.

    나는 정신이 아득한 저편으로 가라앉기 전에 잊지 않도록 중요한 키워드들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무한 동력 기관, 수송기, 주일미해군 7함대, 다네가시마우주센터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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