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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70화 (170/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77)

    전쟁 준비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심력을 소모한다.

    나는 한 명의 지휘관이자 한 명의 병사로서, 조금이라도 변수가 될 수 있을 만한 모든 것을 검토해야 했기 때문에 밥 먹듯이 날밤을 깠다.

    “야, 커피.”

    “어, 감사.”

    여동생이 가져다준 설탕 가득 믹스 커피를 홀짝이면서 다시 서류를 검토했다. 지저 도시에 복귀하고 나서 이 짓을 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됐다. 계절로만 따지면 벌써 초봄이 올 시기였다.

    내 계획하에 주도된 지상 진출 작업은 북부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합심해야 할 정도로 스케일이 거대했는데, 일단 정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상을 연기하는 파와 지상으로 물건을 나르는 파가 나뉘었다.

    지저 도시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기껏 안전지대에 들어선 지 이제 반년 가까이 되어 가는 마당에, 다시 지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난처해했다.

    물론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들의 최대 고객이자 최대 물자 공급처인 밀수 조직들이 이미 지상 진출을 결정한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서북부 지구는 지속적으로 서부 지구의 물류 유통과 거래를 담당하면서 슈퍼 곡식 종자를 최대한 빼돌렸고, 그렇게 빼돌린 것을 우리는 지상으로 올려 보냈다.

    지상에선 다시 장갑차와 화물 운송 차량으로 구성된 호송대를 이용해 물자를 안전지대까지 실어 날랐고, 그것이 쌓일수록 지상의 안전지대는 지저 도시 못지않게 안정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지저 도시에서 사람과 물자를 옮기는 한편, 지상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지하철 일부 노선 복구 작업 및 생활 환경 확장 작업이었다.

    미래그룹의 지원하에 로봇견 도지를 포함한 각종 군수물자와 장비, 장구류 등이 대거 공급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장정들을 무장시켰다.

    이미 자체적인 기술을 보유한 몇몇 조직들은 산업용 엑소스켈레톤을 전투용으로 개조하거나, 나처럼 일부 외골격 파츠만 사용할 수 있게끔 장비를 제작했다.

    전쟁 준비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일을 끝마친 사람들은 정부의 눈을 속이기 위해 평소처럼 북부 지구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장막 삼아 지상으로 진출한 밀수 조직들은 정예 군대로 거듭났다.

    최진석의 전언에 따르면 순수 보병으로만 사단급 전력, 기갑차량은 최소 3개 대대는 준비했다는 모양이다.

    거기에 KTX를 이용해서 주기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경상도에서도 희소식이 들어왔다. 조선소와 공장을 빡세게 돌린 결과 군함 개조 작업이 거의 완료되었으며, 군인들에게 필요한 탄약과 포탄도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한다.

    또 경상도에도 우리가 보내 준 슈퍼 곡식 종자들을 수경 재배로 키우기 시작해서 식량 공급의 전망이 밝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반란의 조짐은 없으며, 여전히 나에 대한 지지도는 높다고 한다.

    “그래서, 진짜 높으신 분이 되어 본 소감은 어때?”

    “나이를 뒷구멍으로 처먹은 놈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진지하게 나 대신 누가 일해 줬으면 좋겠다.”

    막말로 내가 발로 계획을 짜고 지휘를 해도 무능한 윗대가리들보다 낫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반박할 수 없는 쌉팩트였다는 게 이번 전쟁 준비로 밝혀졌다.

    유능한 참모진들을 대거 거느리고 있는 똥별들도 못 하는 걸 내가 해냈으니, 어쩌면 난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원수(5스타) 계급장을 달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너무 유능한 게 문제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윗대가리들이 너무 무능했던 게 문제일까.”

    “둘 다.”

    심플하게 대답한 여동생은 차도식파의 자산 관리 담당답게 다시 업무에 들어갔다.

    내가 전체적인 계획의 틀을 잡고 하나씩 조율하고 있다면, 여동생은 물자의 관리와 흐름을 담당하고 있었다.

    깐깐하기로는 시어머니 못지않은 성격이라, 오죽하면 장부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어긋날 경우 반드시 문제를 찾아내서 담당자의 멘털을 박살 내는 광기를 보일 정도였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완벽주의와 우월주의가 만연하는 디그러쉬에서 일했던 탓에 약간의 성격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 작전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수방사 병력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네.”

    “그것만큼은 나도 어쩔 수가 없겠더라. 일단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맞지만 표면적으로는 지저 도시의 치안과 각 구역의 보안을 담당하는 중장갑보병 부대니까. 우리에게 협조하는 것과 지저 도시 바깥으로 직접 나가서 싸워 주는 건 아예 다른 문제잖아.”

    지저 도시를 지키고 있어야 할 병력들이 갑자기 우르르 빠져 버리면 당연히 정부에서도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디그러쉬의 감시 드론은 군 보안 구역을 촬영하지 못했지만, 정부는 언제든지 사람을 보내서 부대 현황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부대 측에서 직접 감찰이나 높으신 분들의 행사 방문 일정을 사전에 알려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러니 수방사 병력들은 그대로 지저 도시에 남아 줘야 한다.

    ‘무엇보다 수방사 병력은 지저 도시의 마지막 안전장치이자 유일한 보험이야. 그걸 내 마음대로 갖다 쓸 수는 없지.’

    쓰려고 하면 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때는 지저 도시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지저 도시에 복귀할 수 있는 자격까지도.

    내 계획의 마지막 열쇠가 되어 줄 사람들이니, 이들은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아 줘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눈치 보여서 물어보지 못한 게 있었는데, 나도 지상으로 나가야 돼?”

    “아니. 넌 여기 남아 있어. 너까지 나가면 어머니는 누가 지켜 드릴 건데?”

    “그래,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어.”

    “그것뿐만이 아니야.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네가 내 것을 물려받아야지.”

    “……진심이야?”

    “어차피 너 아니면 내가 벌여 놓은 판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내가 왜 굳이 널 데리고 다니면서 사회 공부를 시킨 것 같냐? 왜 중요한 조직의 업무를 맡긴 것 같아? 누구도 모르는 내 계획을 왜 너한테만 알려 줬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잖아.”

    여동생은 나만큼이나 일찍 철이 들어야만 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매일같이 학교 성적과 씨름해야 했고, 장래희망은 사실상 디그러쉬 입사로 정해져 있기까지 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개화하고, 자신의 능력을 남들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여동생 또한 나만큼이나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였다.

    “지금 널 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네 손으로 직접 하고 있잖아. 벌써 남부럽지 않은 커리어 우―먼이 됐다고.”

    “차라리 오피스 레이디라고 해. 촌스럽게 커리어 우먼이 뭐야?”

    “오피스 레이디도 요즘엔 낡은 말인 거 알지?”

    시답잖은 농을 주고받으면서도 우리의 손과 눈은 쉬지 않고 서류를 정리해 나갔다. 중간중간 스마트패드로 전송받은 암호화 데이터를 열어서 서류의 내용과 맞는지 확인한 다음 최종 결재본을 다시 상대방에게 전송했다.

    정말로 기밀 유지가 필요한 특급 정보는 아예 스마트글라스에 암호화 데이터를 새겨 넣은 다음 양피지 형태로 돌돌 말아서 사람을 이용해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최첨단 기술을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건 의외로 효율이 괜찮았다.

    어떤 미친놈이 한 장에 수십만 원이 넘는 스마트글라스를 고작 정보 전달용 ‘비밀 편지’로 쓸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마침내 마지막 업무를 끝마친 나는 오랫동안 캐비닛에 처박아 두었던 자신의 장비를 챙겨 들었다.

    내가 지상으로 나가고 나면 여동생은 이제 후방 지원 총책임자 겸, 지저 도시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어머니를 지키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 줄 것이다.

    “눈이라도 좀 붙이고 가는 게 어때?”

    “지상에 나가서 쉬면 돼.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하는 것도 있고.”

    평범한 사무원에서 군인으로 탈바꿈한 나를 여동생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엄마한테 네가 뭘 하러 나가는지는 말하지 않을게. 엄마가 아무리 우리를 이해해 주신다고 해도 아들이 전쟁하러 나간다는 것까지 용납하진 않으실 것 같으니까.”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네. 집안의 못난 남자는 아버지 한 명이면 충분했을 텐데, 하나뿐이라는 아들놈마저도 못난 짓을 하고 있으니.”

    “잘난 자식으로 남아서 평생 효도하고 싶으면 살아서 돌아와. 가능하면 사지 멀쩡하게.”

    “내가 언제 어디 다쳐서 집에 돌아온 적 있었냐?”

    어릴 때부터 남다른 반골 기질을 가진 탓에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절대 도망치지 않고 압도적으로 이겼다.

    그 지옥 같았던 군 생활에서도 숱한 죽음 속에서 내 목숨 하나만은 필사적으로 지켜 냈다.

    나 박한성이야말로 살아 있는 언터처블이자 전설 아닌 레전드.

    ‘이건 좀 오글거리네.’

    그냥 살아 있는 레전드로만 하자.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채비를 갖춘 나는 스마트폰으로 어머니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뒤,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북부 지구 궤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오늘 내가 지상으로 나간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은 차도식파와 다른 밀수 조직이 엘리베이터에 우르르 탑승했다.

    북부 지구를 담당하고 있는 중장갑보병대의 대대장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표면적인 겉치레를 한 뒤, 지상으로 올라가는 우리들을 향해 경례를 해 보였다.

    우리가 경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지 아닌지는 제쳐 두고, 지상의 안전과 모두의 미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러 나간다는 사실만큼은 진실이었으니 경의를 표한 것이리라.

    나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바로 옆자리의 김명호에게서 현재 지상의 상황과 전쟁 준비의 진척도에 대한 보고를 약식으로 전해 들었다.

    “지난 한 달간 검은 비가 주기적으로 내린 탓에 서울 곳곳이 검은 늪지대처럼 변했습니다. 로봇견을 파견해서 알아보니 지면을 통째로 부식시키면서 거대한 구멍을 뚫고 있다더군요. 구멍의 깊이가 이미 1km를 돌파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덕분에 완전히 사용할 수 없는 지하철 노선도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어. 지저 도시에 놈들이 원하는 게 있는데, 정작 지저 도시로 되돌아갈 루트가 없으니 직접 길을 뚫고 있는 거겠지.”

    확인된 구멍만 1km가 넘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확인되지 않은 구멍 중에서 훨씬 더 깊고 거대한 구멍이 존재할 것이다. 놈들이 인간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땅 밑으로만 집요하게 파고든 결과였다.

    지상의 추위와 어둠 그리고 괴물들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인류는 지저 도시로 피난했지만, 지저 도시가 인류의 보금자리로 존재할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12km 아래의 지저 공동 세계가 놈들에게 완전히 먹히고 나면 그다음에는? 지상에 남아 있는 괴물들과 미친 사이비 놈들에 의해 최후의 인류는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멸망의 수순을 밟을 터.

    지구는 더 이상 생명을 가득 품은 푸른 별이 아니라, 피비린내와 죽음이 사방천지에 진동하는 검붉은 별로 전락할 것이다.

    “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류애가 넘쳤다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무심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모든 것은 결국…….

    “잠시 후 지상에 도착합니다.”

    “종교 박해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만, 종교 박해를 주도한 놈들은 하나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죄 없는 종교인들을 탄압했겠지. 그럼 우린 죄 있는 놈들을 탄압하는 거니까 더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자고.”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알라님이나 흑연교 박해와 마녀사냥은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철컥!

    “사이비 모가지를 가장 많이 딴 놈은 내가 특별히 높은 자리에 낙하산으로 꽂아 준다.”

    지상에 도착한 궤도 엘리베이터 내부에선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전쟁을 부르는 천둥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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