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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68화 (168/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75)

    마녀사냥

    “이건…… 굉장히, 믿기 힘들군.”

    “이해합니다. 세상 어떤 미친놈이 지상의 온갖 괴물들을 뚫고 생존자 집단을 규합해서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겠으며, 그것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제가 총수님 입장이었다고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겁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어째서 이런 걸 보여 준 건가?”

    “왜냐하면 저는 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말하는 것인데 남이 믿어 주고 안 믿어 주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게 만들면 그만이거든요.”

    물론 믿지 않는 것으로 뒤따르는 각종 제약이나 불이익은 전적으로 당사자가 책임져야겠지만.

    “대단한 자신감이군. 하지만 자네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아서 재차 상기시켜 주겠네. 여긴 미래그룹 본사에서도 가장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는 장소일세. 자네가 마음대로 큰소리쳐도 될 공간은 아니라는 거지.”

    “어차피 주변에 로봇견이나 사설 경호원들도 잔뜩 있겠다, 여차하면 우리 둘 담궈서 아예 없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것 같은데, 후회할 짓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일수록 그런 궁색한 허세나 부리기 마련이지. 이제 자네의 생사여탈권과 덧없는 꿈을 쥐고 있는 날 어떻게 설득할 건가?”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까? 전 슈뢰딩거의 고양이나 다름없습니다. 죽여 보기 전엔 결과를 장담할 수 없죠.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내가 죽는다면 가장 먼저 내 부재를 눈치챌 사람들이 지저 도시에만 수만 명이다. 어제 내가 복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오늘 이후로 갑자기 종적을 감춘다? 그것도 미래그룹 본사에서?

    “내심 기대하시는 것 같으니까 간단한 시나리오 하나 짜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저와 제 동생을 처리하시면 북부 지구와 남부 지구가 이변을 눈치챌 겁니다. 전 지저 도시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 나가기 전까지 그들과 주기적으로 연락하거나 만나거든요. 제 흔적이 미래그룹 본사에서 끊어졌다는 걸 눈치채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이제 성난 군중과 군인들을 상대하셔야겠군요. 로봇견과 미래그룹 산하 경비업체로 막기엔 힘들 겁니다. 정부가 개입한다고 해도 큰 피해를 입겠죠. 무엇보다 제 사망 소식이 지상에 알려지면? 그때는 대재앙이 시작되는 겁니다. 제가 목숨 줄 붙여 놓은 사람들이 미래그룹을 용서하겠습니까? 그 이전에 자신들을 버리고 지저 도시로 도망친 정부는?”

    결국 사이 좋게 멸망한다는 진부한 엔딩으로 끝난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반대로 자네가 다져 둔 기반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권력을 꿰찰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우린 그들과 협상하면 그만이야.”

    “아, 물론 사람이란 동물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보니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몇 가지 안전장치를 걸어 두긴 했습니다.”

    나는 비서실장에게 회의 및 보고용으로 쓰이는 화이트보드 하나를 빌려 거기에 내가 이끄는 세력들을 그려 넣었다.

    “차도식파가 저를 배신할 경우 외부에서 몰래 들여온 의사들에게 내부 폭로를 하게끔 해 두었습니다. 제가 사라지면 근본이 양아치 집단인 차도식파는 그들을 영원히 노예처럼 다룰 것이라고 경고해 두었으니, 차라리 불법체류자 신분이라고 해도 정부에 의탁해서 차도식파를 제거하고 살아남으라는 식으로 언질을 주었죠. 물론 제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도록 이중으로 감시역을 붙여서 억제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서울에 자리 잡은 신생 생존자 집단.

    “이쪽에는 나름 유능한 인재 한 명이 저를 대신해서 집단을 이끌고 있는 만큼 저를 배신해도 제 자리를 꿰찰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생명 줄인 원전과 정수 처리 시설에 상시 차도식파를 대기시켜 두고 언제든지 시설을 폭파할 수 있게끔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차도식파가 배신한다면 반대로 유능한 인재 쪽이 알아서 이들을 제거하고 원전을 대신 확보해 줄 테니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목숨 걸고 안정화시킨 경상도.

    “경상도에는 2개 중장갑보병 소대를 배치해 두었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제 사람들이나 다름없어, 경상도에서 내부 배신자가 나올 것 같다 싶으면 즉시 처리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차도식파와 서울 생존자 집단이 저를 배신하면 경상도에서 직접 대규모 병력을 끌고 올라와 깔끔하게 처리해 줄 겁니다.”

    나는 서로 얽히고설킨 삼각관계를 보여 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의 세력 구도를 만들어 놨는데, 모든 세력이 저를 동시에 배신하지 않고서야 누구도 제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내 자리를 꿰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서울과 경상도를 동시에 장악한 다음 막강한 군대로 지저 도시까지 집어삼키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이 또한 경상도의 대리인을 USS 퍼니셔호 함장인 존에게, 그 감시역을 알파 대원들에게 맡겨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진석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이 있을 터전을 스스로 없애면서까지 나를 배신하고 권력을 탐할 이유가 없다.

    서로가 절묘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이면서, 동시에 언제든지 서로를 찌를 수 있는 가시 같은 존재. 나는 결코 한데 뭉칠 수 없는 고슴도치들을 관리하는 사육자였다.

    “그래도 믿기지 않으신다면 여기서 죽을 각오를 하시고 저와 제 동생을 처리하셔도 됩니다. 성공과 밝은 미래만을 꿈꾸는 대기업 총수께서 암울하기 짝이 없는 미래를 스스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쯤 하면 됐으니 일단 앉지.”

    “원하신다면.”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는 태평하게 과자와 차를 곁들이고 있는 동생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하늘 같은 오빠가 목숨 걸고 열변을 토하는 마당에 동생이란 녀석은 팔자 좋게 티타임이나 즐기고 있다니.

    “내 솔직한 감상을 말하지. 자네는 우리 기획전략실 팀에서 분석한 인간상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군.”

    “기대 이하였습니까?”

    “기대 이상이었지.”

    어느새 노기를 가라앉힌 이진호 총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박한화의 아들과 딸내미 아니랄까 봐 간과 심장이 아주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대체 어떤 교육을 받았길래 태평하게 남의 사업장에서 목숨을 걸 수 있는 건가?”

    “자신의 계획에 대한 확고한 믿음,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한 근거 있는 자신감 그리고 매 순간 현실에 충실하자는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게 전부입니다.”

    “난 아닌데?”

    “오빠가 그러면 동생도 따르는 법이야. 어딜 건방지게 딴 길로 새려고.”

    괜히 어깃장을 놓는 동생에게 핀잔을 준 나는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저는 대기업 총수님씩이나 되는 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거대한 그룹을 이끌고 있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에 도박하지 않는다는 것.”

    “맹점이군.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일세. 우리 같은 대기업이 전략기획실을 두고, 수많은 인재들을 외국으로 파견 보내면서, 뒷세계의 브로커들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쥐여 주며 정보를 수집하는 건 확신을 얻기 위함이니까.”

    “예. 확신이 없는 계획만큼이나 불투명한 미래도 없지요. 일반인들은 대기업이 그냥 어느 나라에 공장 짓고, 수 조 단위로 투자하면 그런 갑다 하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훨씬 더 험난할 겁니다. 그러니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을 만들어 내셨죠.”

    그 말인즉슨, 나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는 이진호 총수는 절대로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의미이다.

    만약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최대한 사람들을 굴려 가며 대응책을 마련한 뒤에 나를 제거하려 했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내가 좀 비밀이 많은 매력적인 남자 아닌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뭣 모르고 칼을 휘두를 수 없으니, 결국 이진호 총수는 일단 나와 협력하거나, 반대로 나와 모든 커넥션을 끊어 버리는 선택지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이진호 총수 입장이었다면…….

    “협력하지.”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겠군요. 전 기업인도 아니고 제왕학을 교육받은 재벌 2, 3세도 아니지만 사업 얘기를 할 때만큼은 기분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제 동생에게 사회 공부가 되기도 하고요.”

    “수첩 꺼내서 필기라도 할까?”

    “그냥 외워. 어차피 들으면서 금방 외울 수 있잖아.”

    “자네들을 보니 박한화가 왜 가정을 버리고 ‘무명’이 되었는지 알겠군. 자식들이 무서웠던 게야.”

    ‘무명’이라는 단어에 나와 여동생이 동시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흘리면 안 되니까.

    중요한 건 이진호 총수가 아버지가 어떤 선택을 해서 ‘무엇’이 되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은 아마도 ‘무명’이라는 것일 터.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디그러쉬를 택한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사를 남의 입에서 듣는 건 조금 그렇군요.”

    “실례했네. 하기야 자네들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박한화가 디그러쉬의 완전한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무명’은 디그러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일종의 배후 세력일세. 모든 사회적 신분을 스스로 말소하고 디그러쉬라는 기업의 이름 없는 부품이 되었음을 의미한다더군.”

    “아버지는 디그러쉬의 중책이었으니까요. 게다가 2개월 전에 그들이 무한 동력 기관을 손에 넣었으니 예정된 수순이긴 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버렸다는 사실에 별 감흥이 없는 건가?”

    “설마요.”

    마지막에는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자고 이미 다짐했는데.

    “이제는 아버지도 아닌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건 이쯤하고, 다시 건설적인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아까 저희에게 협력하겠다고 하셨지요. 지상의 위험 요소 중 하나인 사이비 종교 집단을 처리하기 위한 물자와 장비 지원이 필요합니다.”

    “사이비 종교 집단. 자네가 처음 ‘정수’를 가지고 왔을 때 그것을 뽑고 있던 흑연교라는 미치광이들을 말하는 건가?”

    “예. 인천에 자리 잡고 있는 놈들인데, 놈들이 원하는 정수 덩어리들이 서울에만 몰려 있다 보니 조금씩 서울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눈앞에 거슬리는 놈부터 치워 내야겠더군요.”

    나는 구체적인 지원 물품과 수량이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센트리건이 탑재된 자율 전투가 가능한 로봇견이 최소 50대 이상, 전투에 필요한 각종 군수물자와 의약품, 군용 장비를 최소한 1개 대대 이상 무장시킬 정도로 필요합니다.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해했네. 그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미래그룹이 지저 도시에서 멸망할 미래를 피하게 해 드리고,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대기업으로 복귀할 수 있게끔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걸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 알다시피 미래그룹은 지저 도시에서 별다른 정부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힘을 기르는 중일세. 즉 확실한 미래를 택하기 위해 그룹 전체의 사활을 걸었다는 뜻이지.”

    “미래그룹 전체 직원들이 거주할 수 있는 안전지대와 인프라 제공 및 수백만 고객과 근로자 유치. 물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지상에서.”

    “그 정도면 합당한 것 같군.”

    디그러쉬를 비롯한 정부와 모든 기업이 땅 밑에서 미래를 꿈꿀 때, 오직 미래그룹이 새로운 지상에서 미래를 꿈꾼다는 도박 수를 던졌다.

    얼마나 더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될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 흐른 뒤에야 평온을 되찾을 수 있는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안에 완전무결한 자유를 갈망하는 억압된 자아는 단 하나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실패는 이미 숱하게 겪어 왔다. 누군가의 시체와 핏물로 산을 쌓아서 하늘에 닿을 만큼.

    나는 누군가와 다르게 단 한 번의 성공이면 족하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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