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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65화 (165/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72)

    지상과 지하 세력이 힘을 합쳐 사람을 모으고 거점을 만들면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결과물이 나타났다.

    사실상 반포동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형 아파트단지 거주구역은 지하철역과 붙어 있기 때문에 사람 간의 이동, 물자의 이송이 편리한 것은 기본이었다.

    거기에 지난 3개월간 오직 안전과 생존 하나만을 보고 악착같이 버텨 온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이라 그런지, 다들 이곳에서 쫓겨나기 싫어서라도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분위기였다.

    남자는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여자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서로에게 대립각을 세우지도, 불필요한 다툼이나 이유 없는 혐오 분위기를 조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전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다들 악착같이 노동에 힘쓰고 있었다.

    “여유가 없는 인간은 딴생각을 품기 힘들다더니, 그 말대로였네.”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이제 막 번영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 거주 구역 거리를 구경하던 내게 최진석이 다가왔다.

    그는 한쪽 귀에 꽂은 인터컴으로 쉴 새 없이 누군가의 보고를 전해 들으면서,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 패드로 어떤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세간에서 남자는 멀티태스킹에 취약하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작정하고 몸을 굴리다 보면 결국 다들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진다는 걸 그가 증명했다.

    피로에 찌든 눈, 몇 번이나 질겅질겅 씹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부르튼 입 그리고 거친 피부.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경상도에서 구르는 동안 최진석 역시 이곳에서 지독하게 구른 모양이었다.

    “길바닥에 눕기만 하면 골아떨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마중나올거면 미리 한숨 자두지 그랬냐?”

    “...네가 매주마다 경상도에서 올려보낸 정보원을 통해서 대략적인 얘기는 전해들었어. 그쪽에서 상당한 규모의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무고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던 썩어빠진 군벌들을 처리했다며? 당장 경상도 대통령으로 나서도 되겠던데.”

    “나도 매주마다 서울에서 내려온 정보원을 통해 들은 게 좀 있지. 내가 확보한 라디오타워를 이용해서 서울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군소 조직이나 떠돌이 생존자들을 규합하고, 이곳에서 새롭게 시자할 수 있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생활기반을 다졌다면서? 서울시장으로 출마하면 딱이겠네.”

    “하하하......”

    “흐흐흐......”

    잠시도 쉬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린 우리는 서로에게 웃지 못할 농담을 툭툭 던졌다,

    그것이 결국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칼날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상대가 느끼고 있을 고통을 조롱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

    “후우, 솔직히 내가 경상도에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으면 일이 좀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미 발전소와 정수처리시설을 확보한 이상 안전한 거주구역만 확보한다면 따로 손쓸 일은 없겠다 싶었거든.”

    “나도 누구 말마따나 경상도에 있을 생존자 집단과 가볍게 접선할 겸, 정보교환만 하고 돌아오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지. 설마 군벌 세력들과 피 튀기는 전쟁을 할 줄은 몰랐지만. 내 생일이 벌써 다가왔나 하고 착각할 뻔 했다니까.”

    서프라이즈도 그만한 서프라이즈가 없었거든, 그렇게 쏘아붙인 나는 때마침 드럼통을 가득 실은 수송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이와중에 또 기름은 어떻게 긁어모았대.”

    “버려진 군 부대, 예비물자가 보관되어 있는 국가 시설, 아직 멀쩡한 주유소나 유조차량을 있는대로 탈탈 털었지. 사실상 서울에 남아있는 모든 기름을 바닥까지 긁어모았어.”

    전력과 수도는 정상적으로 공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아직 기름을 필요로 한다.

    최첨단 대용량 전고체 배터리팩으로 굴리기에 전차나 장갑차는 너무나도 무거웠고, 결국 엔진을 빵빵하게 돌리려면 기름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기계 정비나 총기수입, 어쩔 수 없이 불을 피워야 하는 상황에도 온갖 기름이 필요하다.

    이곳에 수용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다가오는 미래가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최진석은 가능한 많은 물자를 긁어모으려 했던 것 같다.

    “수방사 산하 군 부대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버려둔 군수물자나 기갑차량들이 제법 많아. 그걸 전부 가져와서 닦고 조이고 기름쳐서 굴리려면 최종적으로 기름이 필요한데, 알다시피 한국은 산유국이 아니야.”

    “...그래서 인천항에 배가 그렇게 많았던 거구만.”

    역설적이게도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산 원유 대부분은 인천항에 묶여 있었다. 그 말은 거대한 유조선에 한가득 담겨있을 검은색 젖과 꿀을 저 염병할 사이비 놈들이 독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놈들이 어떻게 그만한 규모의 배들을 굴리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이러니 서울을 이잡듯이 뒤져도 기름이 턱없이 부족할수밖에.

    “놈들이 김포공항까지 점거했으니 내 예측이 맞다면 항공유까지 싸그리 털어갔을 텐데......”

    “항공유를 털어갔다는 건 헬기나 수송기를 운용할 수 있다는 의미지. 그리고 네가 알아온 정보에 따르면 놈들은 저 바깥의 괴물들처럼 밤눈이 매우 밝은 것 같고.”

    사이비 놈들이 제 몸에 흑연의 정수를 마약중독자마냥 꽂아넣으면서 점점 인간성을 버리고 밤눈이 좋아진 건 팩트다.

    밤눈이 좋아진 놈들에게 열상장비나 GPS 같은 것이 필요할리 만무하고, 마침 그런 놈들에게 기름과 공중 장비가 있다.

    위의 조건들로 인해 머지않아 서울에서 발생할 치명적인 문제에 대해 논리정연하게 서술하시오(5점).

    “내가 왜 악착같이 기갑장비와 군수물자, 기름을 모았는지 알겠지?”

    최진석의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지상을 차지했다면 놈들은 해상과 공중을 장악했다. 물론 저쪽에 제대로 된 파일럿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중요한 건 대비해야할 문제가 하나 더 늘었다는 점이다.

    “막말로 놈들이 서울에서 제 2의 9.11 사태를 벌이겠다고 한다면 너나 나나 사이좋게 좆되는 거야.”

    “우리만 좆될까. 우릴 믿고 여기에 모인 사람 모두가 좆되겠지.”

    검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수송기, 혹은 여객기. 미사일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질량을 자랑하는 금속덩어리가 지상에 꽂히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벌어진다.

    아무리 크고 튼튼하게 지은 아파트 단지라고 해도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은 뻔하고, 자칫 잘못하면 지반이 푹 가라앉아 지하철역이 통째로 매몰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사전에 놈들의 자폭테러를 막고자 발칸포부터 대공전차까지 죄다 뜯어온 것이리라.

    '이상하네. 난 분명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는데 왜 문제를 하나 해결하면 곧바로 두개가 새로 생기는 거지?'

    이것이 정녕 내 운명인가? 해결해도 해결해도 끝없이 무한증식하는 문제와 업무에 짓눌려서 질식사(과로사)하는 비참한 인생이?

    내가 비록 신을 믿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신이 있다면 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도 그냥 세상을 창조했을 뿐인데 인간이 등장하면서 온갖 문제들이 무한하게 증식해나가는 꼴을 봤을 테니까.

    역겹고 끔찍한 미래에 몸서리치던 것도 잠시,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은 매우 한정적이니 해당 범주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놈들이 이미 몇몇 염탐꾼을 보내서 이곳을 파악했다던데, 만약 자폭 테러를 할 생각이었다면 벌써 했을 거야. 지금도 하늘이 조용하다는 건 놈들이 그럴 마음이 없거나, 다른 이유때문에 잠시 미루고 있다는 뜻이지.”

    “위치가 노출된 이상 상시 위험에 노출된 건 변함없어.”

    자신에게 배정된 지휘용 막사 앞 접이식 의자에 걸터앉은 최진석은 마른세수를 했다.

    분명 자신을 위해 마련된 개인 집무실이나 휴식 공간이 있을 텐데 굳이 바깥의 지휘용 막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건, 외부의 위험 요소들이 언제 이곳을 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강박증 때문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전쟁이 터지면 군인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서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우리는 이걸 스트레스성 불면증이라고 부르도록 사회적 합의를 봤지.'

    땀내나는 사내자식들끼리 그윽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오글거리는 대화를 나눌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머리를 맑게 해주는 카페인이나, 반대로 깊은 잠에 빠지게 해주는 알콜이다.

    근처에 놓여있는 아이스박스에서 캔맥주를 꺼내 최진석에게 하나 던져주고, 나는 언제 마셔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캔커피를 집어들었다.

    드럼통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작을 마주보며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를 꺼냈다.

    “인류의 완전한 멸망까지 빠르면 반년, 늦어도 1년.”

    내가 먼저 운을 띄우자 캔맥주를 홀짝이던 최진석이 피식 웃었다.

    “반년도 너무 느리지. 난 3개월.”

    한 달 전쯤에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인류의 멸망에 대해 이렇게 농담처럼 떠들어 대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하늘을 뒤덮은 암흑 물질이 수백, 수천 년, 어쩌면 지구 멸망 전까지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류에겐 태양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원자력 에너지가 있고, 어둠과 추위를 몰아낼 수 있는 문명의 이기가 있었으니까. 급격하게 줄어든 인구도 문명사회를 재건하면 다시 복구될 거라고 생각했다. 인류는 원래 위기에 강한 법이니까.

    하지만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져 내리면서 모든 희망적인 관측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주 잠깐 내린 검은 비만으로도 지상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놈들은 서울에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놈들이 유독 서울에만 몰려 있는 이유는 뻔하다. 지저 도시의 디그러쉬가 확보한 무한 동력 기관을 노리고 있는 거다.

    그게 지저 도시에 있는 한 하늘을 뒤덮은 암흑 물질은 끝없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상에서 어렵사리 문명을 재건하고 있던 우리가 독박을 쓰는 구조였다.

    “인천에서부터 슬금슬금 서울로 침범해 오기 시작하는 사이비 무리와 하늘에서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타르 덩어리들. 어느 쪽이 더 우리의 멸망을 앞당길 것 같아?”

    최진석의 질문에 나는 달콤씁쓸한 캔 커피의 맛에 감탄하면서 답했다.

    “어느 쪽이든.”

    저 타르 덩어리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고대 선조와 다르지 않은 사냥감들이고, 사이비 놈들에겐 귀여운 예비 신도나 실험체쯤으로 보이겠지. 둘 다 전망이 밝지 않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면, 인류 멸망이라는 대환장 특급 열차에 편도 티켓으로 탑승하지 않으려면 선택을 해야 한다.

    당장 눈에 거슬리는 놈부터 처리할 것인지, 궁극적으로 가장 위험한 놈부터 처리할 것인지.

    “넌 당장이라도 하늘을 뒤덮고, 지상을 점거한 저 타르 덩어리들부터 처리하고 싶겠지?”

    내 질문에 최진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가장 커다란 문제가 코앞에 있는데 나라도 그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착각하면 안 된다. 흔하디흔한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서도 언제나 가장 강대하고 흉악한 적을 마지막에 잡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대결전에 돌입하기에 앞서 불안 요소는 완전히 제거해 두지 않으면 막판에 뒤통수 맞을 확률이 높다. 마왕을 때려잡은 직후의 용사가 허무하게 배신당하는 클리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거다.

    “놈들을 끝장낼 방법이 있어. 이미 계획의 기반을 다져 둔 상태야. 미국 정부와 날 연결해 줄 끈이 경상도에 있지.”

    “USS 퍼니셔 호의 함장?”

    “그래, 그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협조해 주면 최종적으로 조국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거든. 하지만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엄청난 준비와 쉽지 않은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저 사이비 놈들을 뒤에 두고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턱도 없는 소리.

    저놈들은 애초에 나이트워커든 암흑 물질이든 좆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몸에 흑연의 정수인지 뭔지를 때려 박고 광신도를 늘릴 수만 있다면,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미친놈들이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이미 롯데호텔에서 놈들과 거하게 한판 붙기도 했었다.

    “계획은 내가 짠다, 사전 준비도 내가 할 거고, 계획 결행도 내가 할 거야. 너흰 그냥 손만 좀 거들어 주면 돼. 바로 옆의 동료가 죽어 나가도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최진석은 캔 맥주를 마시다 말고 멍하니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경상도에서 군벌들을 처리할 때도 그렇게 했었나?”

    “그래. 모든 걸 내가 계획하고 주도했지.”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겁쟁이처럼 뒤에서 숨어 손짓 턱짓으로만 사람을 부리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곳에 언제나 내가 있었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달콤한 승리도, 영원불멸할 성공도 손에 넣을 수 없을 테니까.

    누군가는 나의 뒤틀린 사상과 비정상적인 탐욕을 두고 정신병자 취급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종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세상에선 오히려 내가 정상인이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네 목숨부터 걸어. 이 세상 그 누구도 너와 네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공짜로 목숨을 걸어 주진 않아.”

    우리는 지금 분기점에 서있다.

    “좋아, 나도 끼지. 대신 실패하면 네 등에 칼을 꽂는 건 저 사이비 놈들이 아니라 내가 될 거다.”

    “얼마든지.”

    캔 맥주와 캔 커피가 허공에서 땡그랑 하고 부딪치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결정지었다.

    우선은 눈앞의 거슬리는 놈(흑연교)부터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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