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63화 (163/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70)

    분기점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상생해야만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는 인간 사회에서 ‘혐오’라는 감정은 삶의 큰 원동력이 되어 준다.

    무능을 혐오하는 자들은 스스로 유능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불법을 혐오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의를 행하기 위해 선인이 되려 노력한다.

    방향성이 조금만 바뀌어도 불화와 분쟁으로 이어지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이 세상에 완벽한 옳고 그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혐오라는 이름의 양날 검도 쓰는 사람 나름이라는 거다.

    나는 지금쯤이면 멋진 신년을 장식하는 찬란한 태양 빛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야 할 동해 앞에 섰다.

    모두가 기대했던 2031년 1월 1일의 해돋이는 결국 볼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우리는 높은 창대에 극악무도한 군벌 세력 핵심 인사들의 목을 내걸었다.

    하늘 높이 올려진 그들의 동그란 목이 우리의 새천년을 알리는 태양이요, 아래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 오래전에 식어 버린 희망의 불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바다 앞에서 마침내 경상도 일통(一統)에 성공한 남자가 되었다.

    폭압과 공포정치에서 풀려난 자들은 눈물을 쏟으며 힘든 시기는 다 끝났다고 울부짖었으며, 지난날 동안 쌓인 것이 많았던 자들은 목만 대롱대롱 걸려 있는 망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흑야 사태가 벌어졌을 당시에만 해도 무려 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경상도에 존재했으나, 단 2개월 만에 수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갑작스러운 한파, 가진 것 없는 자들의 굶주림, 나이트워커의 습격, 군벌들의 잔혹한 처우, 강력 범죄 폭증.

    그렇게나 질서정연했던 대한민국 사회가 혼란을 맞이한 지 고작 2개월 만에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 수백만 명이 남아 있다. 어떻게든 핵심 도시에 자리를 잡아 모든 것을 원상복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끈끈한 협동심으로 걸어 나갈 의지가 있다.

    그렇다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출산율이 소수점 단위였던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생존의 투지를 불사를 것이고, 생존에 위협이 되는 모든 위험 요소를 철저하게 배제하려 들 것이다.

    이미 내가 몸소 보여 주지 않았던가. 누구라도 그럴 의지가 있다면,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만 한다면 해내지 못할 것이 없음을.

    그래서인지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나는 국민 대통령 못지않은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이 평화와 안정을 쟁취하기 위해 적지 않은 피가 흘렀지만, 대다수가 이런 결과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대가였다고 생각해 준 덕분이다.

    하지만 나는 얼씨구나 하고 냅다 그들의 대통령이나 교주가 되지는 않았다. 썩어 빠져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철저하게 삼권분립을 지키면서 청렴결백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설령 자신이 지지했던 대통령이라도 가차 없이 깎아내리는 게 이 나라 국민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허울 좋은 ‘임시’라는 수식어를 붙인 적당한 감투 하나를 만들어서 자신의 머리에 썼다.

    임시라는 말은 언제나 큰 면죄부가 되어 준다.

    일 못하는 놈이면 ‘어차피 임시니까’라고 적당히 넘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 잘하는 놈이 임시라는 수식어가 붙은 감투를 쓰고 있으면, 향후 그 감투를 내려놓을 때가 오더라도 오히려 국민들이 알아서 바짓가랑이를 붙들 것이다.

    유능한 대통령의 임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언제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연임이 안 돼서 참 아쉽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처럼.

    나도 반 정도는 그런 효과를 노렸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굉장히 단순한 이유였다.

    ‘너무 바빠.’

    피와 화약으로 얼룩진 절망의 2030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밝은 2031년을 맞이한 것까지는 좋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통합된 경상도의 내정을 살피고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상당히 많은 수고가 들었다.

    오죽하면 땜빵용으로 USS 퍼니셔호의 존 함장까지 끌고 와서 그를 든든한 주한미군으로 탈바꿈시킨 다음(그는 주일미군 소속이었다) ‘치안’의 전반적인 부분을 맡겨야 했을 정도니까.

    기존의 군벌 소속 군인들은 모두 무장을 해제하고 민간 노동력으로 전환했으며, 반대로 지금껏 노예 취급 받아 오던 민간인들을 예비군으로 징집해서 좁게는 마을 자경단, 넓게는 지역 평화유지군으로 재편했다.

    그리고 곳곳에 숨어 지내던 전문직 종사자들과 박사 학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긁어모아서 시급한 문제에 투입시켰다.

    우선 경상도에 남아 있는 물자와 원자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굴려야 할지, 또 남아 있는 물건으로 수백만 시민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최종적으로는 기술력으로 문제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중한 논의를 거쳤다.

    기계를 만질 줄 아는 사람은 기계투성이인 공장이나 발전소로 보냈고, 사람을 만질 줄 아는 사람은 병원으로 보내는 매우 심플한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것도 나 혼자선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작업량을 자랑했기에, 나름대로 스스로를 엘리트라 자부하는 알파 대원들도 사무 작업에 총동원했다.

    중요한 업무는 대부분 우리 선에서 해결했지만, 정책의 방향이 결정되면 해당 정책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공무원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많은 공무원들을 또 시청에 박아 두고 굴렸다.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할 일이 산더미처럼 쏟아졌지만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품지 않았다.

    이미 망가져 버린 사회에서 자신들은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지만, 이 사회를 다시 복구시키기만 한다면 예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춥고 먼지 풀풀 풍기는 곳에서 살기보단, 조금 힘들더라도 따뜻하고 깨끗한 곳에서 살길 원한다.

    공산주의 국가처럼 배급으로 나눠 주는 쥐꼬리만 한 식량이 아니라, 제대로 돈을 써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이미 21세기의 편의성을 알아 버린 선진국 시민들에게 빈곤국 거지꼴로 살아가라고 하는 건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터.

    게다가 일 못하고 악독하기까지 한 무능한 윗대가리들이 무참히 썰려 나가는 광경을 봤으니 이제 와서 딴생각을 품을 수도 없다.

    좋든 싫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 부담이 크게 줄어든 건 사실이다.

    경상도로 내려와서 군벌 세력을 모두 처리하기까지는 고작 며칠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혼란을 수습하고 지역을 안정화시키는 건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물론 그사이 나도 잠자코 있었던 것은 아니다. KTX를 다시 운용해서 서울에 연락책을 파견했고, 경상도 탈환과 내 생존 사실을 알렸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차도식파는 지저 도시의 서북부 지구 개발을 끝내고서 ‘슈퍼 곡식’의 종자를 성공적으로 빼돌렸다.

    쌀, 보리, 밀, 옥수수 같은 가장 기본적인 곡물부터 시작해서, 고구마나 감자 같은 구황작물까지 확보했다고 한다.

    남은 것은 한강에서 퍼 올린 물을 정수 처리한 뒤, 소형 핵 모듈에서 뽑아낸 막대한 양의 전력을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지하철에 공급.

    서울역과 롯데호텔에 있던 사람들을 긁어모아 이주시켜서 자체적인 수경 재배와 지역 거점화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서울역은 이제 전철을 이용하는 것 외에 거점으로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경비 및 운영 인력을 제외하면 모두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이주시킨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소수의 생존자나 떠돌이 상인, 그룹에 합류하길 원하는 인재들이 새로운 거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봄이 오기 전에 자급자족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슈퍼 곡식과 수경 재배 방식이 큰 시너지를 일으킨 모양이군.’

    둘 다 논밭을 운영하기 힘든 지역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곡식을 생산하기 위한 장점들만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하루가 멀다 하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가루(먼지) 때문에 공기가 탁한 지저 도시와는 달리, 지상은 추위 문제만 해결하면 공기는 청정 그 자체였다.

    전력과 수도 공급에 문제가 없으니 사람과 식물이 콘크리트 밀림 속에서 함께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복귀하면 가장 먼저 상태를 둘러보고 미비한 점을 보완해야겠어. 그리고 대량으로 수확하고 나면 종자의 일부는 경상도로 옮겨서 심기로 하고.’

    경상도에는 한강 못지않은 낙동강이 존재한다. 게다가 서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원전과 정수 처리 시설이 넘치기 때문에 수백만 시민들의 생활 걱정은 없었다.

    식량 공급만 어떻게든 안정화시킨다면, 김선후 중장이 꿈꿨던 것처럼 무식하게 공장을 돌려서 무기와 장비를 대량으로 찍어 낼 수 있다.

    이미 끝을 맞이한 인간의 시대를 다시 한 번 인간의 손으로 시작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장 큰 문제가 셋이나 남아 있네.”

    지난날의 혹독한 운용 때문에 많이 상해 버린 USS 퍼니셔호가 한창 수리 중이니, 믿음직한 존 함장을 내 ‘임시’로 앉혔다. 임시의 임시가 등장하고야 만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내부의 불만이 도질 우려가 있으니 알파 대원들에게 이곳에 남아 줄 것을 요청했다. 알파 2개 소대가 굳건히 지키고 있다면 감히 임시의 임시 대리에게 불만을 품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내가 서울과 경상도를 완전히 통합하는 그 날까지 어떻게든 방파제가 되어줄 거다.

    알파 대원들은 최진석 병장이 자신들을 내게 맡긴 순간부터 반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였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 최진석이 추구하는 미래와 겹친다는 것을 알고 내 지시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반면 존 함장은 내 결정에 조금 불만이 있어 보였는데, 자신이 서울에 함께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분명 저와 함께하시면 이 모든 사태의 끝을 보실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결례를 무릅쓰고서 한마디 하자면 현재 함장님은 USS 퍼니셔호와 승무원들이 아니라면 알파 대원 한 명보다 못합니다.”

    “즉 USS 퍼니셔호의 수리와 승무원들의 요양이 끝나면 내가 필요한 시기가 올 거라는 건가?”

    “반은 맞습니다. 나머지 반은 현재 민간용 선박을 군용으로 개조하고 있는 각 조선소의 책임자들과 논의해 보시면 알 겁니다.”

    “……설마 군함 한 척이 아니라 함대가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나는 씁쓸하게 담배를 꺼내 무는 존 함장에게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인천에 대한 소식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기동함대 대부분이 어느 날 인천으로 훌쩍 떠나 버리고, 인천항에 수많은 선박들을 집결시켰다는 뜬소문은 들은 적이 있네.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수많은 군함과 민간 선박들을 결집시켜서 해상 도시를 건설한 놈들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존 함장은 담배를 태우다 말고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부재를 노리고 세력을 모은 반란군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질이 나쁩니다. 흑연교라는 어느 미친 사이비 종교 집단이 김선후 중장이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을 괴물로 만들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말세로군, 말세야. 자네 같은 애국자는 어떻게든 망가진 나라를 살려 보겠답시고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한쪽에선 미친놈들이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라를 좀먹는 꼴이라니. 내 조국도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소원이 없겠군…….”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기동함대는 썩어도 ‘함대’입니다. 그에 준하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줌왈트급 구축함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단독으로 재래식 전투를 벌이기엔 벅찰 겁니다.”

    “맞는 말일세. GPS가 복구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순항미사일을 비처럼 퍼부어 줄 수 있으련만…….”

    “GPS는 하늘에 다시 태양이 뜨지 않는 한 복구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의 마지막에 일이 틀어지지 않으려면 저희가 가진 힘만으로 어떻게든 불순 세력을 처리해야 합니다.”

    내 앞에 도열해 있는 가장 큰 문제 셋.

    1. 인천항에 자리 잡은 흑연교.

    2. 지저 도시에 자리 잡은 디그러쉬.

    3. 움직이는 종말 장치나 다름없는 암흑 물질.

    “사실 수많은 선박들을 전투용으로 개조한다고 한들 함대의 최소 요건조차 충족하지 못하겠지만, 구색만이라도 갖춘다면 해상 훈련은 맡겨 두겠습니다. 미국에서도 최고봉 엘리트가 아니면 감히 함장이 될 수 없는 두 척의 배 중 한 척을 담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하나는 줌왈트급 구축함, 다른 하나는 ‘제럴드 포드’급 항공모함이다.

    모두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최신예 기술이 집약된 군함이기 때문에 명예로운 함장의 자리를 거머쥘 수 있는 건 엘리트 중의 엘리트뿐이다.

    나는 그가 한 명의 군인으로 활동한다면 알파 대원보다 못한 전력이라고 치부했지만, 한 명의 지휘관으로 활동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라면 단순히 함장 선에서 그치지 않고 함대를 지휘하는 제독의 역할도 능히 수행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행히 이곳 경상도에는 군필자와 뱃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만큼 엉성한 함대라도 어떻게든 운용할 수는 있으리라.

    “대한민국 역사에서 미군이 인천과 연관되면 이런 일만 일어나는 것 같군.”

    “제2의 맥아더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조국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망나니 장군이라도 얼마든지 롤 모델로 삼아 주지.”

    서울행 KTX가 출발하기 직전, 나는 지난 3개월간 죽어라 고생한 바다 사나이의 억센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인천에서 봅시다.”

    “인천에서 만나지.”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 인천상륙작전이 수립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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