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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39화 (139/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46)

    존 H 해럴드 함장은 간밤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대규모 교전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유의미한 변화도 보여 주지 않았던 기상에 이상 현상이 포착된 지 고작 몇 분이 흘렀을까, 관측병으로부터 다급한 보고를 받았을 시점에는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검은 비라…….’

    보급품인 군용 담배는 진즉에 다 떨어져서 하는 수 없이 전투식량에 들어 있던 껌을 씹으며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관측병의 보고, 상황병의 긴급 상황 알람, 갑작스러운 교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당직병들의 무차별적인 사격음.

    찬바람을 뚫고 날아드는 후끈한 열기와 바다의 비린내조차 밀어 낼만큼 지독한 혈향이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 때, 존 함장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흑야 사태 당일에만 해도 미 정부가 자신들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버렸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먹긴 했으나, 함선의 최고 지휘관인 그가 수병들을 챙기지 않으면 대체 누가 챙기나 싶어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렇게 약 2개월간 부산항 인근에 정박하여 대한민국 기동함대와 협력하며 경상남도 일대를 방위했다.

    본래 일본 요코스카가 근무지인 미 7함대 소속 군함이 ‘단독’으로 부산항 인근에 정박해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으나, 10월경에 미국 측에서 한국으로 비밀리에 수송하기 위한 VIP가 있었다.

    상층부에서 말하길 그 회색빛 노신사는 모든 정보가 기밀 처리된 ‘무명’이며, 공항을 통해 특정 국가를 공식적으로 방문할 수 없는 신분이라 존 함장의 이지스 구축함에 블랙옵스가 하달된 것이다.

    그 위대한 미 해군이 단 한 사람을 특정 국가에 밀항시키기 위해 적당히 정치적 명분을 들이대며 부산항에 정박했고, 흑야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에 그가 육지를 밟을 수 있게 처리했다.

    간단하면서도 곤란한 블랙옵스를 성공적으로 처리한 존 함장과 수병들에겐 느긋한 겨울 휴가가 포상으로 주어질 줄 알았건만, 설마 한순간에 세상이 멸망해 버릴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2개월 뒤의 미래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존 함장은 처음부터 해당 블랙옵스를 ‘정중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피해 보고하게.”

    “……사망자 31명, 중상자 16명, 경상자 29명, 사상자 총원 76명입니다. 또한 갑판을 포함한 선체 외부에 다수 경미한 손상이 발생하였으며, 소수 적대 개체의 침입을 허락한 선원실 일부는 완파되었습니다.”

    대체 언제부터일까.

    상황 보고를 하라는 말 대신 피해 보고를 하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시커멓게 죽은 눈을 한 부관은 지금도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추위, 공포, 고통, 공포, 굶주림, 공포, 탈수, 공포.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포라는 단어가 개미처럼 바글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태 초기에 다들 함께 살아남자며 으쌰으쌰 했던 희망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만이 동공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기만 했다면 그들은 진즉에 귀환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군대로부터 정상적이고 넉넉한 보급을 받을 수만 있었다면, 모든 육지의 연안이 얼어붙지만 않았더라면, 칠흑 같은 어둠과 함께 GPS 시스템이 먹통이 되지 않았더라면.

    최신예 기술 대부분은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인공위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하필 이 최신예 이지스 구축함 역시 인공위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일본, 미국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정부의 통제를 상실해 버린 대한민국 군대는 최대한 빠르게 자신들이 살길을 모색했다.

    그중 하나가 빨갱이들처럼 부의 재분배 및 배급제 실시, 인권 및 생명권 경시였다.

    매번 억압받기만 하던 대한민국 군인들이 단체로 들고일어나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고, 정기적인 보급을 빌미로 미 7함대 소속 구축함까지 ‘연안경비함’으로 묶어 두기에 이르렀다.

    정기 보급이 아니면 지상에 발을 올려놓기도 힘든 존 함장과 수병들은 원자로가 과부하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지난 2개월을 바다 위에서 보냈다. 그 결과, 가장 먼저 검은 비의 피해를 입었고.

    “몹시 안타깝고 죄스러운 일이지만 전사자들의 유해를 본국으로 귀환시킬 수 있을 만큼 본 함은 여유가 없네. 가능한 예를 차려서 그들의 유해를 바다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게.”

    “그것 외에도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원자로는 아직 견딜 만하지만 식량과 식수 그리고 의약품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군수물자 역시…….”

    “그만. 자네가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이 배보다 승조원들의 수명이 더 짧아졌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네.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에 했을 거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RHIB(고속 단정)와 수송 헬기를 이용해 대한민국 연안에 침투한 뒤 자발적으로 물자를 수급해 오는 방법 말인가? 눈이 있으면 부산을 차지한 저 군인들을 좀 보게. 죄다 눈이 돌아갔어.”

    미국의 든든한 우방국이었던 대한민국 군대의 위용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 버렸다.

    군인들은 지난날 동안 억압받아 왔던 울분을 풀기라도 하겠다는 양 민간인들의 머리 위에 서서 고혈을 쥐어짜 내고 있었으며, 그런 한편 전시가 아니면 사용할 일이 없는 다양한 무기 체계로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대한민국 기동함대의 사령관과 협력이라는 미명하에 잠깐 지상 땅을 밟은 적이 있었던 존 함장은 저들이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판단했다.

    마치 도배된 것처럼 여기저기 배치된 미사일포대와 대공포대, 거리의 특정 구역마다 자리 잡은 전차와 장갑차들은 화력에 미친 국가의 군대가 타락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저런 곳에 몰래 침투해서 자발적으로 물자를 수급하고 무사히 복귀한다? 난다 긴다 하는 특수부대를 한 트럭 데려다 놔도 다들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연료를 아끼지 않을 작정으로 침투 범위를 넓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지상 또한 해상 못지않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잠재적 리스크가 너무 컸다.

    결국 최신예 구축함 한 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저들이 정기적으로 가져다 주는 보급만 받아먹으며 연안을 방어해야 하는 실정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세상이 이렇게나 미쳐 버렸는데 저들이라고 미치지 않을 리가 없다.

    이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을 찾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러기엔 이 현실이 지독하리만치 비현실적이었으니까.

    “하다못해 물자 보급만 충분히 받는다면 언제라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련만…….”

    “…….”

    블랙옵스를 수행하느라 공식적으로 군수물자를 보급받지 못한 점, 일본과 가까워서 보급에 여유가 있다고 섣부른 판단을 해 버린 점 등이 가장 뼈아팠다.

    ‘하다못해 일본이 순식간에 망하지만 않았더라면…….’

    이젠 다 부질없는 가능성일 뿐이라 존 함장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어쨌든 보급이 필요하다. 보급만 충분히 이루어지면 뭐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 외톨이 군함에 선뜻 보급을 해 주는 위인이 나타난다면 기꺼이 그의 발가락이라도 핥으리라.

    *    *    *

    ―해당 전철에 탑승한 모든 인원은 들어라! 지금부터 검문이 진행될 예정이니 성실하게 검문에 응하길 바란다! 반복한다! 해당 전철에 탑승한……!

    “염병.”

    창가의 모든 블라인드를 내려 내부의 빛이 일절 새어 나가지 않게 신경 써서 외부인들은 아직 이곳에 누가, 얼마나, 어떤 목적으로 탑승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선로 위에 대놓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두고 버팅기는 놈들을 상대로 냅다 전철을 꼬라박을 수는 없었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에선 그딴 거 신경 안 쓰고 일단 들이박지만, 현실은 탈선과 기기 고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떡합니까?”

    중년 기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내게 물었다. 덧붙여서 중장갑보병들에게는 일단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숨죽인 채 대기하라고 해 두었다.

    ‘설마 대구를 코앞에 두고 여기서 발목을 잡힐 줄이야.’

    현재 위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대구가 있는 칠곡군 지천역. KTX 입장에선 그냥 거쳐 가는 수많은 지잡역(?)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점거한 무리들은 통행세를 꼭 받고 싶은 모양이다.

    ‘하기야 사태 초기에 남부 지방으로 피난 온 전철을 제외하면 지난 2개월간 통행은 없었을 테니 수상하다 싶겠지.’

    나는 무전기를 통해 중장갑보병 2개 소대에게 언제든 응전할 수 있도록 전투태세를 지시한 후, 내가 민간인인 척 홀로 하차해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기장에게는 혹시라도 돌발 사태가 발발하거나 내가 신호를 보내면 즉시 모든 객차의 문을 개방하고 안전한 곳에 숨어 있을 것을 권유했다.

    “전철을 출발시키는 게 아니라 모든 객차의 출입구를 개방하라는 겁니까?”

    “저 바리케이드는 사람이나 장비로 직접 치워 내야지, 영화처럼 냅다 들이박는다고 뚫릴 것 같지가 않아서요.”

    작정하고 이런 한적한 시골 역을 점거한 놈들인데 설마 그 정도 가능성도 예상해 두지 않았을까. 분명 선로에 처치 곤란한 모종의 장치를 준비해 뒀을 것이다.

    딱 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군장과 야투경, 외골격 파츠를 벗어 둔 나는 비교적 단출한 복장으로 하차했다. 그러자 플랫폼에서 손전등 불빛을 들이밀고 있던 무리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중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 나와 내 가슴팍에 총구를 들이밀며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너흰 어디에서 왔나?! 왜 혼자만 하차한 거지?!”

    “서울 일부를 수복한 수방사 예하 임시 철도 보급부대 소속 박한성 중사입니다. 국내외 연락망이 차단된 것을 우려한 상층부에서 제2의 수도인 부산의 상황을 알아볼 겸 후방 부대 보급을 위해 파견한 선발 보급대입니다.”

    “네 상사는?! 보급관과 부대를 책임지는 장교가 함께 타고 있지 않나?!”

    “여러분이 정확한 소속을 밝히지 않으셔서 우선 제가 먼저 하차한 겁니다. 크게 무장하지 않은 보급대가 자칫 민간인 폭도들에게 전철을 점거당하면 자칫 큰일로 번질 수 있다는 상관의 판단이었습니다.”

    나는 일부러 우리가 정보 수집 및 후방 부대 보급을 위한 보급대라는 것을 강조했다. 손전등 불빛이 너무 밝아서 역광 때문에 상대의 인상착의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행동거지나 총기 파지법으로 보건대 군인인 것은 확실했다.

    ‘목소리가 꽤나 걸걸하고 총기를 익숙하게 다루고 있다. 또 상대를 윽박질러서 겁주는 법을 잘 알고 있어. 새파랗게 젊은 현역이 아니라 노련한 예비역이군.’

    나를 무릎 꿇린 상대는 잠시 조용해졌다. 아마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네 소속을 증명할 수 있는 군번줄이나 신분증이 있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임시로 긴급 편성된 보급대입니다. 수방사가 서울을 수복하고 서울역에 거점을 마련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저 역시 경력상 부사관으로 급하게 차출된 사람입니다. 전산 처리도 제대로 안 되고 있는 마당에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군복을 입고 있지 않은 이유는?”

    가장 민감한 질문으로 파고들었지만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상대를 기만했다.

    “군복 수량도 부족하거니와, 이 미친 한파에 버티려면 병신 같은 군복보다 이런 방한 용구가 더 효율적이라는 걸 상층부에서도 인정했습니다. 그렇게나 의심된다면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분들의 복장도 확인해 보십시오. 모두 저처럼 군복이 아니라 사제 방한 용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아군 인식 씰만 붙인 상태입니다.”

    나는 어깨와 등에 붙여 둔 군용 아군 인식 씰을 내보이며 말했다.

    사실 이건 떠돌이 민간인과 아군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 다들 붙인 것이지, 딱히 군 소속이라서 붙인 게 아니었다.

    어쨌든 딱 봐도 민간인처럼 보이는 내가 군용 아군 인식 씰을 어깨와 등에 붙이고 있으니 상대도 조금 아리송한지, 몇 걸음 물러나서 동료들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방사 소속 군인은 맞는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 저 꼴로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 제대로 무장도 안 된 애들이라고, 그런 얘기들이 스산한 공기를 타고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다시 돌아온 상대가 내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로 수방사가 서울을 수복했나?”

    “예.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에 어떻게 KTX를 운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2개월간 지상 상황이 어땠는지는 다들 아실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언제나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래서 1%의 진실과 99%의 거짓을 섞어서 말하면 대개 1%의 진실이 100%인 줄 알고 홀라당 넘어오는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언제나 위선적인 정치인들의 수려한 말발에 속아 넘어가는 것처럼.

    나는 KTX를 운용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는 1%의 진실만을 얘기했을 뿐이지만, 저들은 그 1%의 진실을 제멋대로 과대 해석하고 포장해서 최대한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 증거로 나를 압박하고 있던 살기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럼 잘됐군. 우린 경상도와 타 지역 접경지를 방위하고 있다. 검문에 응하기만 하면 별 탈 없이 후방으로 보내 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상관들에게도 의미 없는 저항 의사는 접어 두고 검문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알려라.”

    나는 그의 요구대로 가져온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모든 객차의 출입구를 개방해 주십시오. 잠시 후 이곳에 주둔 중인 방위 부대의 검문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다들 준비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냥 보급대일 뿐이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렇게 무전을 보낸 직후, 모든 객차의 출입구가 개방되자 손전등을 든 무리들은 킬킬 웃으며 무방비하게 전철로 몰려갔다.

    “지금!”

    그렇게 외친 내가 재빨리 바닥에 몸을 던지다시피 엎드리자, 곧 멍청이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포화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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