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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38화 (138/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45)

    세상의 색채가 녹아내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일반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내가 마약이라도 한 건 아닐까? 정신병자가 아닐까? 철 지난 중2병에 걸려서 새벽 감수성이 섞인 발언을 내뱉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슬금슬금 나를 피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색채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그날의 하늘이 어느 날 갑자기 ‘검정’이라는 색채로 완벽하게 칠해진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풍화하듯 지금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 불어난 강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듯, 하수구의 오폐수가 꿀렁꿀렁 밀려 내려오듯,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온갖 더러운 감정이 표출되듯.

    ‘저것들’은 그저 칠해졌다가 흘러내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았다.

    “후우.”

    마음 같아선 담배라도 한 대 빨고 싶었지만, 나는 술은 마실지언정 담배는 하지 않는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입술을 짓씹었다.

    일은 잘 풀리고 있다.

    내가 처음 흑야 사태와 마주한 지 2개월이라는 시간이 넘게 흘렀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가진 능력과 경험, 지식을 십분 활용해 많은 이권을 거머쥐었다.

    지저 도시에는 나를 응원하거나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튼튼한 기반도 마련되어 있으며, 먹고살 걱정이 없을 만큼 자산과 물자 비축도 충분히 해 두었다. 물론 눈앞의 미래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정체된 인간은 인간조차 아니라는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꽤 많은 투자자를 긁어모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여러 분야에 투자했다.

    새로운 거주 지구 확보, 서부 지구에서 몰래 빼낸 슈퍼 곡식 종자의 수경 재배, 대기업의 지원하에 각종 신기술과 신제품을 직접 테스트하며 실생활에 적용. 윤택하면서도 안전이 보장된 삶을 향해 꾸준히 발버둥 쳤다.

    그럼에도 내 안의 갈증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달콤하고도 시원한, 끝이 없는 청량감을 맛보기 위해 남들보다 한 수, 두 수, 열 수를 앞서 나가고자 애썼다.

    그 결과, 지상에서도 수많은 거점과 지지 기반을 확보한 것은 물론, 차세대를 위한 새로운 거주 구역과 발전 시설까지 내 통제하에 들여놓았다.

    이 정도면 완벽하지 않은가?

    기껏해야 20대 중반 남성이 2개월 만에 해낸 것치곤 너무나도 과하지 않은가?

    아니, 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압도적이어야 한다. 아버지가 언제나 내 머리 위에서 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던 만큼, 그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나는 언제까지고 ‘부자유’ 속에 갇혀 지내는 거다.

    “본래는 대장인 내가 직접 ‘사절단’으로 가야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없으면 서울역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아. 물론 통제가 아니라 관리라는 의미에서.”

    “남한테 일 맡기고 자기는 한가하게 서울역에서 맥주나 마시겠다?”

    턱.

    최진석이 던진 맥주병을 가볍게 받아 든 나는 단숨에 뚜껑을 따 버리고 내용물을 들이켰다.

    일전에 마셨던 미적지근한 맥주가 아닌, 냉장고에서 제대로 차게 식힌 얼음장 같은 맥주였다. 한국인 DNA를 가진 나는 아무래도 술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다.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짜릿한 맥주의 맛에 순간적으로 ‘크하!’ 하고 탄성을 터뜨릴 뻔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감탄은 잠시 접어 두었다.

    검은 비는 그쳤다. 검은 색채가 녹아내리다시피 한 하늘은 미약하지만 이전보다 조금 더 태양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밝기가 조금 올라갔다. 지상은 여전히 어두컴컴하지만 달빛이 있는 밤 정도로 바뀌었다는 의미다.

    바꿔 말하자면 지상에 달빛 정도의 빛이 내리쬘 만큼 하늘을 덮고 있던 암흑 물질이 지상으로 낙하했으니, 이제 그놈들과 사투를 벌여야 할 시간이다.

    나이트워커와 나이트워치가 일반 커피였다면 놈들은 T.O.P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최진석과 함께 조용히 맥주를 들이켜며, 서울역의 방화벽 바깥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조용하게, 음습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움직이던 나이트워커 놈들과는 달리 놈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지상을 활보했다.

    놈들을 막아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화력도, 보급도 마땅치 않은 소규모 생존자 그룹이 가장 먼저 피해자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어둠과 추위 속에서 두더지처럼 숨어 지냈던 것 같은데, 지상에 낙하한 검은 존재들까지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 같다.

    “지상에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

    내 질문에 최진석은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며 고민하는 듯하다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1개월.”

    “근거는?”

    “충분한 인력과 물자 그리고 안전지대가 이미 확보된 상태다. 추가적인 군수물자와 싸울 수 있는 군인만 있으면 어떻게든 1개월 안에 자급자족 시스템을 만들 수 있어.”

    거기에는 내가 지저 도시에서 공수해온 슈퍼 곡식의 종자를 충분히 보급하고, 발전소를 이용해 전력과 수도를 반영구적으로 공급한다는 전제조건까지 성립되어야만 한다.

    당연히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최진석은 내가 그 계획에 동참할 것이라는 걸 알고서 당당하게 대답한 것이다.

    “적이 한둘이 아니야. 서쪽(인천)에는 김포공항과 인천항을 접수한 사이비 종교쟁이 놈들이 득시글거리고,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타르 덩어리 새끼들이 지상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어. 그 밖에 폭도 무리로 전락한 전직 경찰이나 군인들도 상황에 따라서 방해가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지저 도시 기득권층 또한 지상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답시고 군사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 물론 지저 도시가 움직일 기미가 보인다면 가장 먼저 내가 눈치채고 막겠지만, 중요한 건 사방팔방에 온통 적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기반을 다지는 데 2개월이라는 시간과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소모되었는데, 앞으로 수많은 적들을 처치하고 나만의 깃발을 높이 흔들기까지 얼마나 더 걸릴까? 나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알파는 딱히 세상과 사회 체계를 뒤엎으려고 쿠데타를 일으킨 게 아니야. 세상이 멸망해 가는 와중에도 우리 같은 아랫사람들을 챙겨 주지 않는 윗사람들에게 질려서 각자도생을 택했을 뿐이지.”

    “조건과 계기만 마련되면 각자도생에는 자신 있다는 거냐?”

    “지금까지도 잘해 왔는데 앞으로도 당연히 잘하겠지.”

    “그래그래, 다른 건 다 괜찮지만 내 앞길만 막지 마라. 그럼 나도 협력할 수 있는 선까지는 협력해 줄 테니까.”

    빈 맥주병을 휴지통에 던져 넣은 나는 그렇게 말하며 KTX에 탑승했다.

    본래 부산행의 리더를 맡는 것은 최진석이었으나, 그는 내가 구상하고 있는 미래 계획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되레 바통을 내게 넘겼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보면 그냥 똥을 패스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이 또한 우리 사이에서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입장 교환이었다.

    목마른 사람도 나고, 우물을 찾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나니까, 결과적으로 부산행을 택해야 하는 것도 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최진석에게는 서울의 ‘전체적인’ 방위에 힘쓰는 역할을 맡겼다.

    내가 운전대 잡고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유일한 대가리인 최진석이 직접 가야 하는데, 최진석이 자리를 비웠다가 잃을 것들을 감안해 보면 리스크가 너무나도 컸다. 그게 싫으면 내가 부산을 대신 가 줘야 한다.

    즉 최진석과 나는 서로에게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하나씩 교환한 셈이다.

    “발전소와 발전소 근처의 예비 거주 지역, 그리고 서울역과 롯데호텔, 이거 4개만큼은 죽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그러려고 지금까지 훈련하고 싸워 왔던 거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나였으면 당연히 걱정 안 했지. 너한테 맡길 수밖에 없어서 그런 거라고.”

    “…….”

    남들과 달리 난 뭘 해도 잘한단 말이야.

    우리의 침묵 속에서 지금까지 서울역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던 KTX 기관사와 승무원 몇 명이 전철에 먼저 탑승하고, 뒤이어 나를 필두로 한 2개 소대 중장갑보병들이 화물과 함께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배터리 OK, 예비 연료 OK, 화물 OK, 사람 OK. 남은 건 선로 위의 안전 확인뿐이었다.

    “필드 클리어 준비!”

    최진석의 외침에 방화벽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백 명의 중장갑보병과 무기를 든 민간인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가 바짝 긴장했다.

    전투기가 이륙하기 전에 반드시 활주로에 장애물이나 새가 없어야 하는 것처럼, 전철이 지나가야 하는 선로 위에도 무엇 하나 존재하면 안 된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기관사가 전철의 시스템을 점검하고 각 기관부와 동력부를 확인하는 동안 방화벽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점검이 끝난 전철이 출발하게 되면 당연히 어그로가 끌릴 텐데, 그 어그로를 사람들이 먼저 끌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선로가 엉망이 될 테니까.

    “12시 방향에 적 다수 발견!”

    “장거리 사격은 피한다! 중거리 이하 교전을 유도해!”

    “소화기 분말은 아껴! 끓는 물을 먼저 사용해!”

    전철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내부 플랫폼과 달리, 어쩔 수 없이 노출되어 있는 외부 플랫폼에는 예상대로 놈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 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위협적이긴 했다.

    나이트워커나 나이트워치와는 달리 놈들에겐 머리를 쏴서 한 방에 처리한다는 개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액체인지 고체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육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좀 더 머리를 써야 했다.

    끓는 물이나 기름을 부어서 아예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흩어 버리거나, 반대로 소화기 분말 같은 것을 뿌려서 응고시킨 다음 충격으로 박살 내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신기한 건 놈들 역시 나이트워커처럼 뜨거운 것에는 반응하지만 차가운 것에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날씨에도 얼어붙지 않고 잘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겠지.

    타타타! 탕! 탕!

    인간과 빛을 발견한 타르 덩어리들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자아내며 돌진하자 결국 첫 사격과 함께 여기저기서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삽시간에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예광탄 세례가 어둠 속 공기를 찢어발기며 목표물을 덮쳤다. 다만 나이트워커나 나이트워치와는 다르게 놈들은 탄환 같은 순수한 물리력에는 조금 더 강한 모습을 보였다.

    “탄환 아껴! 가까이 오면 샷건으로 날려 버려!”

    “기관총 사수, 아직 쏘지 마! 좀 더 접근하게 둬!”

    “어그로만 끌어, 어그로만!”

    선로에 있는 놈들을 먼저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최진석이 동료들과 예비역에게 호통을 치면서 사람과 무기를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특히 순간적으로 강력한 화력을 충분히 가해야 타르 덩어리가 완전히 분해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좀 더 신중해진 것 같았다.

    ‘여기 있는 놈들을 처리하고도 하늘과 지상에는…….’

    나는 KTX 내부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모든 창을 닫게 했다. 외부의 일은 외부의 일이니까.

    KTX 내부와 외부의 소음이 거의 차단되었을 무렵, 마침내 점검이 끝난 전철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 2개월간 선로가 관리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인프라는 실로 위대하니 아직은 버틸 수 있을 터.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기 시작한 전철은 외부 플랫폼을 벗어나 한강 위를 가로질렀다.

    이미 출발한 이상 소득 없이 되돌아올 수 없는 부산행 KTX가 본궤도에 올랐다.

    ‘연말정산이 될지 신년 보너스가 될지는 까 봐야 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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