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인사이드 아웃 (143)
“진보된 기술의 결정체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
“내가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형편없었네. 이 갑갑한 세상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었지. 하물며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정치인들은 솔선수범해서 각종 규제를 걸어 앞길을 막곤 했어.”
박한화는 투명한 창 앞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회색빛 노신사의 왜소한 등을 바라보았다.
어딜 어떻게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노인이다. 툭 치면 억 하고 쓰러질 것 같고, 당장이라도 요양원에서 푹 쉬게 해 드려야 할 노인.
하지만 그가 이름을 가지지 않은 노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디그러쉬에서 이름을 가지지 않은 ‘무명’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기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무명(無名)이란 곧 위명(威名)의 증거!
그리고 박한화는 자신 또한 그 위업에 한 발자국 다가섰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일을 잘 처리해 주었더군.”
“과찬이십니다.”
“아니, 우리가 어찌 자네의 노고를 모르겠나. 이 한반도 땅에서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우리의 위대한 선조(고대인)의 흔적을 찾아냈으며, 마침내 그들께서 후손을 위해 남긴 기술의 극치를 손에 넣었으니. 벌써부터 이 노구는 찬란하게 빛날 인류의 미래가 기대되어 이미 식어 버린 열정이 다시 한 번 피어오르는 것 같다네.”
“허면…… 저 또한 어르신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따라오는 게 아닐세. 함께 걷는 게지.”
천천히 돌아선 노신사는 고개를 숙인 박한화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직급 카드를 손수 거둬 갔다.
디그러쉬에서 이름을 가진 자가 이름 없는 자로 거듭나게 될 때, 가장 먼저 잃게 되는 것은 자신의 직급을 상징하는 직급 카드다.
그 의미를 깨달은 박한화는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감이 정수리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나이나 체면도 잊고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을 것이다.
쉴 새 없이 달려온 기간이 무려 30년이다!
명문대를 나와 젊은 나이에 국내 대기업에 입사한 그는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아낌없이 펼쳤고, 곧 모두에게서 인정받는 엘리트가 되었다.
모든 것이 탄탄대로였던 그 시절의 박한화는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폭주 기관차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수많은 자칭 라이벌들이 그와 경쟁하다 줄줄이 나가떨어지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어떤 일을 해도 압도적인 성과를 냈고, 단 한 번도 쓴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실패라는 단어는 자신의 발판이 되어 줄 버러지들만 실컷 맛보는 독주(毒酒)였다.
그 과정에서 서른이 조금 넘는 나이에 명망 높은 인맥의 주선으로 맞선을 본 결과, 자신에게 그럭저럭 어울리는 참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곧 자신을 닮아 영특한 아들까지 낳았으니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땅이 넓은 줄 모르게 되었다.
쉽다. 너무나도 쉬웠다.
인생에서 굴곡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편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에겐 아둥바둥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습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국내의 대기업이 더 이상 자신 같은 인재를 품을 만큼 충분히 크고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서 알아주는 글로벌 대기업에 입사한 그는 국내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실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이 더 쉽겠다는 양 하품까지 하며 일을 처리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15년 전쯤, 그의 아들을 한창 교육하고 있을 때에 ‘디그러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범재들 사이에서 재능을 썩힐 바에야, 천재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당돌한 제안이었다.
연이은 성공에 지루해진 그는 반쯤 재미 삼아 수많은 대기업들의 러브 콜을 무시하고 디그러쉬에 입사했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머리통을 강하게 후려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남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면 자신은 기껏해야 호수 속 메기였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거대한 바다. 그것이 바로 디그러쉬라는 정체불명의 기업이었다.
“자네의 탄탄대로였던 사회생활 30년 중 절반을 이곳에 바친 소감은 어떤가?”
“무한한 영광과 감동을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 세계 각지의 대기업들이 인정했던 박한화라는 엘리트의 이름이 사라지는 소감은 어떤가?”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 일말의 미련도 없습니다.”
“더 이상 한 가정의 아버지도, 부하 직원들의 믿음직한 상사도, 멍청이들이 제멋대로 인정한답시고 불러 댔던 엘리트도 아니게 되는 소감은 어떤가?”
“희열을 느낍니다.”
50년이 넘는 인생.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을 100세라고 가정했을 때 무려 절반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박한화의 눈빛에 깃든 불꽃은 오히려 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다.
그의 앞에 선 노신사와 자신은 더 이상 다르지 않다. 완전히 똑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른 열망이, 자신만이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경험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에 대한 기대감이!
박한화라는 인간이 지난 50년간 쌓아 온 자신의 삶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내던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자, 보라.
자신은 결국 마지막까지 실패하지 않았다.
모두가 인정하는 엘리트, 한 치의 흠도 없는 완벽한 아버지, 모든 범재들의 위에 군림한 유능한 상사.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무명(無名).
박한화의 직급 카드를 거둬 간 노신사는 미리 준비해 둔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더 이상 박한화가 아닌, 무명의 가슴팍에 달려야 합당한 물건이었다.
“그 넥타이를 매게. 이름이라는 하찮은 고치를 찢고 나온 젊은 친구.”
단숨에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헤친 박한화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고급스러운 금실로 장식된 검은 넥타이를 착용했다.
그 넥타이는 디그러쉬에 대한 모든 정보와 시설 출입에 대한 접근 권한 코드가 각인된 스마트 키의 일종이었다. 착용자의 맥박과 체온, 땀, 호르몬 분비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여 주인을 설정하고, 주인에게서 떨어지면 그냥 평범한 넥타이로 돌아가는 물건.
디그러쉬가 지금까지 수많은 정부와 기업, 스파이들을 상대로 철저하게 보안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젊은 친구도 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된 것 같군. 함께 가겠나?”
“어르신의 에스코트를 받을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하하, 우린 이제 나이, 성별, 종교, 문화, 사상을 막론하고 모두 동등한 존재일세. 이 노구를 너무 추켜세워 주진 말게. 당당해져도 좋아. 자넨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인정 욕구의 완벽한 충족.
100이라는 인정 욕구가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고 딱 100이 채워진 것 같은 아찔한 감각에 박한화는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자신은 눈앞의 노신사와 같다. 그보다 못나지 않으며, 또한 잘나지도 않은 존재. 그렇기에 위대함이라는 단상 위에 당당히 발을 올리고 있다.
다른 무명들이 오랫동안 맛보고 있었던 이 우월감을 만끽하기 시작했을 때, 박한화는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이만큼 위대해졌다면 더 이상 모르는 것이 있어선 안 된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하며, 모든 것을 자신 아래에 두어야 한다.
두 명의 무명이 경호원들을 대동하여 대형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이곳은 정치인을 비롯한 고위 관료, 대기업 총수 같은 최고 수준의 보안을 요구하는 VIP들을 위한 지저 도시 중부 지구.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시작했을 때 원자력발전소보다 훨씬 먼저 만든 공간이 중부 지구 바로 아래에 존재한다.
바로 이 지하 공간의 기밀 유지 때문에 미래그룹이 담당할 예정이었던 도시 지하철 프로젝트가 무산된 것이었다.
거대한 통유리 엘리베이터가 대략 10층에 달하는 깊이만큼 내려왔을까, 박한화는 지저 도시 만큼이나 밝게 빛나는 지하 공동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오직 디그러쉬만을 위해 일하는 수많은 엘리트들이 연구원, 보안 요원, 관리자가 되어 기계처럼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디그러쉬 본사에서 일하던 ‘봐 줄 만한’ 수준의 직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효율과 업무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마치 그들에겐 실수라는 코드가 처음부터 입력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모두 한때는 자네와 같은 사람들이었네.”
“……그렇습니까?”
“하지만 마지막 한 걸음이 부족해서 우리처럼 ‘무명’이 되지 못한 자들이지. 참으로 가엾고 딱하지 않은가? 단 한 걸음만 채웠다면 충분했는데.”
자신들과 저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단 한 걸음.
저들은 ‘무명’이 되기 위한 위업을 끝끝내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그 재능과 오랜 경험 그리고 디그러쉬에 대한 충성심을 높게 사서 특별히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전부였지만.
“보게. 자네가 기어코 확보한 저 위대한 인류의 자산을.”
“……지금까지는 저것의 쓰임새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군요.”
“기탄없이 말해 보게.”
박한화는 대다수의 연구원들이 들러붙어 방대한 양의 연구 데이터를 뽑아내고 있는 말뚝 같은 기둥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의 위대한 선조(고대인)들께서 태양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을 만큼 무한한 동력을 제공해 주는 영구기관, 혹은 그에 상당히 근접한 꿈의 에너지 결정체 아닙니까?”
노신사가 빙긋 웃었다.
꽤 오랜 과거에 인간들이 신의 위광에 도전하기 위해 바빌론의 탑을 건설했듯.
그것은 까마득히 먼 고대의 선조들은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영역에 도전했다는 증거였다.
“우리가 다시 이름을 되찾는 그날은 ‘신’으로 거듭났을 때일세.”
“……기대되는군요.”
고대인들이 어째서 지상을 버리고 지하로 숨어들었는지는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 모를 과거사는 이제 사소한 일에 불과했으니까.
* * *
―여기는…… (치직)…… 도쿄…… 저 도시…… 관제 센터…… (치직).
―주변 지저……시는 응답하라…… (치직)…… 침공이…… 시작…… 있다!
―베이징…… 지저 도시…… 공격받는…… (치직).
―러시아 극동…… 도시도…… 정체불명의…… (치직)…… 기습을…… (치지지직).
―쏴라! 쏴! 놈들이……지 못하게……!
―긴급 구조를 요청…… 이곳은 안전하지 않…….
―기상 관측 결과…… 하늘에서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는다…… 지상을 뒤덮는 것은 검은 비…….
―이 메시지가 전 세계의 지저 도시에 닿기를 바랍니다. ‘저들’은 충분히 태양열을 흡수했습니다.
―지상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지저 세계 또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신이시여, 우리를 보우하소서……!
“염병.”
크리스마스 당일. 차도식파가 접수한 서울 라디오 타워를 급하게 방문한 나는 인공위성을 거쳐 흘러 들어오는 각종 무전이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인공위성의 전파가 미약하지만 정상적으로 지상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장막이 조금 옅어졌다는 것,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상을 향해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검은 물질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다.
지구의 종말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라고 선포하듯 검은 물질로 구성된 인간들이 하나둘씩 지상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죽어라 착하게 살았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 주시네.”
나쁜 아이는 검은 석탄이나 먹으라는 걸까?
철컥!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 형태의 탄약 박스에서 나온 기계식 탄띠가 경기관총에 연결되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