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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34화 (134/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41)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32분. 미래그룹에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잠이 들어 지금까지 골아떨어졌던 모양이다.

    부스스한 몰골로 침대에서 일어나 전등을 켜니 내 책상 위에는 랩으로 깔끔하게 포장된 샌드위치와 보온병 그리고 작은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쪽지를 읽어 보니 대한민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시듯, 우리 여사님께서도 내 건강을 염려하시며 쉬엄쉬엄 일하라는 메시지를 남겨 두신 것이었다.

    샌드위치는 저녁쯤에 만들었는지 딱히 쉰내가 나지도 않았고 맛과 식감도 나쁘지 않았다. 보온병에는 샌드위치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커피가 있었기에 매우 늦은 브런치(?)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후우…….”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샌드위치는 식욕이 떨어져서 비실대고 있던 몸뚱이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고급 커피는 축 가라앉아 있었던 정신을 번쩍 일깨워 주었다.

    나는 꿈속에서도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복잡한 생각들이 어느덧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스스로에게 식별 번호가 존재하는 것처럼 알맞은 위치로 이동한 생각은 다른 생각과 연결되어 마침내 ‘논리’로 승화되었다.

    이내 모든 생각의 정리가 끝나고 나니 이 생각을 마음껏 털어놓을 적절한 상대와 시간 그리고 환경이 필요했다.

    ―위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 박한성: 내 방으로

    ―못생긴 애: 아 왜

    ―위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 박한성: 빨리 안 오면 동생이 오빠 말 안 듣는다고 엄마한테 이름 ㅅㄱ

    ―못생긴 애: 개띠꺼워 시발

    어딜 감히 하늘 같은 오라버니가 호출하는데 여동생이 꼬박꼬박 말대답이나 하는 것이지? 대한민국의 유교 사상이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뒤틀렸단 말인가? 통탄을 금치 못하겠구나!

    “왜 불렀는데.”

    “나가자.”

    “뭐?”

    “옷 챙겨 입어.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고.”

    “아, 그럼 부르기 전에 말하든가!”

    그렇게 빽 소리를 지르곤 다시 자기 방으로 뛰어가는 못생긴 애의 반응에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여동생을 갈구지 못하는 오빠는 존재 의미가 있는 걸까?

    나도 화장실에 가서 가볍게 씻고 나와 옷을 챙겨 입으니, 여동생도 간편한 메이크업과 외출 준비를 끝마친 참이었다. 왜 여자들은 가벼운 외출에도 메이크업에 혼과 열정을 다하는 것일까.

    “근데 아까까지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더니 왜 갑자기 나가자는 건데?”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내가 슬쩍 눈치를 주자 여동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그냥 집에서 대화를 나눴겠지만 이번에는 집에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우리는 주상복합아파트단지 특유의 큰 스케일을 자랑하는 크리스마스 장식 사이로 당당히 걸어 나갔다. 서민이든 부자든 이런 쪽으로 분위기를 타는 건 다들 똑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서민의 크리스마스에는 로망이 있고, 부자의 크리스마스에는 로망이 없다는 것 정도? 언뜻 차별적인 발언처럼 들리겠지만 의외로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서민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나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분위기에 취해 순수하게 로망을 만끽하는 한편, 부자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불투명한 것에 기대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동심이 있고 없고의 차이랄까? 우리 남매는 이미 오래전에 동심이 개박살 나 버렸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씁쓸할 따름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 쓸데없이 번쩍거리는 거 나만 거슬리냐?”

    “나도 그래.”

    “내 안의 또 다른 박한성이 저 장식들을 다 잡아서 뜯어 버리라고 울부짖고 있어……!”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자. 쪽팔리니까.”

    어떤 의미에선 성스러운 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늘, 이곳 주민들 역시 광장에 나와 분위기에 젖은 채 연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이 눈에 거슬릴 따름이라 나와 여동생은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을 벗어났다. 바깥에 나가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번쩍거리거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건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서 어디 가는데?”

    “내 일터.”

    “그 조폭 아지트? 그런 곳은 좀 싫은데…….”

    “네가 인턴 그만두고 나면 스스로 몸도 지키고 돈도 벌 줄 알아야 하는데, 내가 만들어 둔 발판에서 크는 게 낫지 않겠어?”

    “뭐야, 벌써 장악 끝났어?”

    “밑 작업은 다 해 놨지. 사실상 내 조직이나 다름없어.”

    도저히 일반적인 남매가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텅 빈 무인 셔틀버스를 타고 북부 지구로 향하는 와중에도 음험한 대화를 서슴없이 나눴다.

    내가 모든 면에서 여동생의 상위 호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였으나, 그래도 우리 남매가 서로 엇갈리지 않는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이 음험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인턴을 그만둔다는 얘기는 뭐야? 아버지는 날 정규직에 앉힐 것 같은데.”

    “너 거기 계속 있으면 죽어.”

    “……그래?”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에 여동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괬다.

    “지저 도시 외부 탐사 프로젝트 때문이지? 인턴인 나조차도 알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연구 샘플과 데이터가 회사로 들어왔더라.”

    “그리고 때마침 함께 돌아온 탐사대원들은 죄다 쓰러지기 시작하고?”

    “그치. 인생 처음으로 눈앞에서 사람이 픽 쓰러져서 숨을 안 쉬는데, 난 처음에 그 사람들이 너무 피곤해서 오빠처럼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나중에 보안 요원들이 오더니 쓰러진 사람들을 바디백에 담아서 어디론가 옮기더라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여동생에게 그런 미친 광경을 보여 주고서도 별다른 조치나 위안이 없었다는 점이 더 소름 끼쳤다.

    디그러쉬의 내막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인간성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주춤해 버리고 만다.

    “아까 외출 준비하면서 잠깐 확인해 봤는데 지저 도시 9시 뉴스에서도 그 내용은 안 나왔더라. 디그러쉬 내부 직원들은 충성심이 어마어마하니 입막음 같은 건 아예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는 거지. 실제로 그랬고.”

    “그래서 나한테도 별다른 말을 안 했구나. 내가 박한화의 딸이니까 당연히 외부에 그런 내용을 떠벌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거야. 진짜 이상한 집단이라니까. 마치 사이비 종교 광신도들을 보는 것 같아.”

    아버지는 이미 박한성이라는 실패작을 키워 봤으면서, 박하나라는 딸도 나처럼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박씨 남매가 가진 고유 스킬 ‘반골 정신’은 상대가 강하게 나올수록 이쪽도 더 강하게 나가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디그러쉬에서 인턴 노릇을 하며 은근슬쩍 정보를 빼돌리고, 지난 2개월간 정이 들었을 법도 한 회사를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인턴 그만두면 뭐 하지?”

    “더 이상 어리숙한 인턴으로 남들이 던져 주는 일만 처리하면서 시간과 재능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그만큼 연습했으면 이제 실전으로 들어가야지.”

    나는 여동생에게 스마트폰으로 차도식파 장부 데이터를 넘겼다. 나와 차도식, 김명호만 공유하고 있는 차도식파 기밀 자료 중 하나였다.

    “자산 관리를 기반으로 한 경영과 투자부터 숙달하고, 여차하면 제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는 생존 기술을 배워. 전자는 네가 직접 해 보면서 터득하고, 후자는 내가 가르쳐 줄게.”

    “조폭이라서 내부는 빈 깡통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튼실하네?”

    “병원을 포함한 사업체 몇 개 굴리고 있고, 현재 서북부 지구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이야. 능력 있는 조직원들은 다른 조직에 용병 형태로 파견을 보내서 짭짤하게 소득을 올리고 있고.”

    나는 자신이 직접 만든 타 조직들의 대략적인 조직도와 규모, 사업체, 자산 규모 등을 정리한 추가 데이터를 여동생에게 전송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차도식파 경영과 투자에 많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내 몸은 하나이다 보니 날이 가면 갈수록 빡세지더라고. 몸을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은데 머리까지 굴리면 일이 꼬일 수도 있잖아.”

    “그래서 경영 겸 투자 고문 자리를 나한테 넘기시겠다?”

    “원래 이런 사업은 가족들끼리 다 해 먹는 거야.”

    가‘족’ 같은 직장. 꿈만 같지 않은가?

    북부 지구에 도착한 우리는 늦은 시간임에도 별다른 제지 없이 북부 지구 게이트를 넘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북부 지구 거주민 중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군인이든 상인이든 조폭이든 모두 내 앞에선 설설 기는 수준이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여동생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감상을 내뱉었다.

    “……기껏해야 조직 하나를 먹은 줄 알았더니 지구 하나를 통째로 먹었네.”

    “오빠가 너무 잘나서 혹시라도 열등감을 느꼈다면 특별히 사과 정도는 해 줄게.”

    “지랄.”

    내 다리를 가볍게 걷어찬 여동생은 남부 지구와 달리 늦은 밤에도 활기가 넘치는 북부 지구를 말없이 구경했다.

    남부 지구에도 사람은 많다. 그 넓은 지구에 돈 많은 부자들과 권력자, 그들의 가족들까지 다 밀어 넣었는데 사람이 적으면 이상하지.

    하지만 북부 지구는 그와 비교가 안 될 만큼 훨씬 더 많은 인구를 자랑했다. 지저 도시의 인구 비율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층이 북부 지구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며, 기회가 있다.

    당연히 기술과 부지를 선점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지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던 권력자와 졸부들과는 달리, 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집합한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들이 서부 지구와 동부 지구에 투자할 때 나는 북부 지구에 투자했으며, 그들이 서부 지구와 동부 지구가 지저 도시의 미래라고 생각할 때 나는 북부 지구를 또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북부 지구였지만, 내가 이곳에 투자하기 시작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모든 면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도 다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시끌벅적한 야시장을 열 만큼.

    “여기까지 만드느라 고생깨나 했지. 온갖 인간 군상이 모인 곳이라 치안부터 확립해야 했고, 돈이 돌게 하기 위해서 엄청난 물자를 끌어왔으며, 최종적으로는 방역 및 건강 개선을 위해 위생과 의료 시스템까지 구축했다고.”

    “그래그래, 이런 걸 여동생한테 자랑질하려고 2개월을 어떻게 참았대? 아직 자랑거리 남았으면 더 해 봐. 일단 들어줄게.”

    “나머지는 도착해서.”

    아직도 자랑거리가 남아 있냐고 되묻는 듯한 표정에 나는 씨익 웃으며 여동생의 머리를 잡아 방향을 바로잡아 주었다.

    “네가 디그러쉬 인턴 때려치우고 나면 익숙해져야 할 직장인데 직접 보면서 듣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이렇게까지 급하게 일을 진행하는 이유가 있어?”

    “있지.”

    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인류가 지하 12km에 지저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에서 제2의 삶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 크나큰 실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나는 지저 도시에서도 붉은 네온사인이 박혀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저 십자가의 네온사인보다 붉은 피가 앞으로 얼마나 더 흘러내릴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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