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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133화 (133/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40)

    ―이 길이 맞는 건가?

    ―어디 보자…… 통로 구조가 우리가 지나왔던 곳과 변함없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꽤 오래 걸은 것 같은데, 이놈의 길은 끝이 보이질 않는군.

    ―하하. 외부에서 봤을 때도 구조가 상당히 기괴했는데, 내부는 얼마나 더 기괴하겠어요?

    손전등 불빛이 비추는 곳은 시시각각 원자재가 달라지고 있었다.

    ―어디 보자, 샘플을 하나 더 채취해야…… 이런! 샘플을 얼마 채취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샘플 병을 다 써 버렸다고?

    ―명색이 박사님이신데 좀 많이 챙겨 오지 그러셨습니까.

    ―아니, 이게 참…… 내가 지상에 있을 적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다네. 따까…… 대학원생들이 다 알아서 챙겨 줬거든. 좀 넉넉하게 챙겨 올 걸 그랬군.

    ―그보다 박사님 관점에서 이곳은 어떤 것 같아요? 얼마나 오래되었다든가, 완전히 처음 보는 원자재가 사용되었다던가, 그런 감상 없어요?

    ―박사라고 만능은 아닐세. 최소한의 연구 장비가 필요하지. 이곳에서 채취한 샘플을 연구실로 가지고 돌아가서 탄소연대측정법으로 대략적인 시기를 추측해 봐야겠지. 물론 그것도 한계가 명확하겠지만.

    ―어째서 한계가 명확한 건가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안정적인 검증이 가능한 시기는 대략 1만 년 안팎일세.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은 연대를 측정하기가 어렵지. 물론 그조차도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연구에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만.

    물론 지금껏 수집한 수많은 데이터와 좀 더 고급화된 장비로 교차 검증을 하다 보면 얼추 정답에 가까운 연대가 나온다며 이동춘 박사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곳은 뭐랄까…… 인간이 감히 측정하기도 어려울 만큼 오래된 것 같군. 수십만 년 전일 수도 있고, 수백만 년 전, 수천만 년 전, 어쩌면 수억 년 전일 수도 있다네.

    ―에이, 그건 너무 나갔죠.

    ―거짓말 같은가? 지구의 나이가 대략 46억 년인데, 인류가 그린란드에서 발견한 가장 오래된 화석의 나이가 무려 37억 년 된 것이라네.

    ―휘유.

    ―그린란드와 이곳의 차이점은 환경에 따른 보존 상태일세. 지하 12km, 바람은 거의 불지 않고 유적을 생각 없이 파괴하는 무지성 생명체 따윈 없으며, 거대한 지각변동도 없는 이곳에서 이 유적이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을 것 같은가?

    ―그거야 이 유적을 지은 고대인이 살았던 시기와 겹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그렇다면 고대인의 흔적은? 그들의 유해나 생활, 문화, 종교 양식을 나타내는 아주 사소한 흔적은? 이 유적이나 바깥의 이상한 기둥을 제외하면 전무해.

    지저 세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이 남아 있기에 ‘고대인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지, 실제로 고대인 유해 화석이나 그들의 생활 양식을 나타내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원시인들도 고대 동굴 벽화나 유해를 남겼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기괴한 유적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은 절대 아닐 테니 다들 ‘고대인이 있었다’고 단정 지은 것뿐일세. 아까 지질학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지? 이곳은 불가해의 영역일세. 수십 년간 한 분야만 판 나도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미스터리 하다 이 말일세.

    ―박사님 말대로 다른 박사님들이 더 계셨다면 여러 의견을 들어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건……!

    이동춘 박사의 아웃사이더 기질을 지적하는 한 남자 대원의 말을 끝으로 갑자기 손전등 불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음? 손전등이 왜 이래? 벌써 배터리가 다 됐나?

    ―그럴 리가. 우리 탐사 시작한 지 몇 시간밖에 안 됐잖아요.

    ―디그러쉬에서 대여해 준 지저 탐사 장비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세계적인 대기업도 실수는 하는 모양이군.

    ―아, 영화에서 이런 장면 꼭 나오지 않아요? 클리셰라고 하던가? 손전등이 갑자기 깜빡거리거나 뭐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 꼭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이상한 소리 집어치워. 봐, 몇 번 두들기니까 다시 잘 작동하잖아.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거리던 손전등을 몇 번 탁탁 두들기자 빛의 세기가 돌아왔다.

    클리셰 얘기를 꺼냈던 여성 탐사대원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괜스레 손전등을 이리저리 막 휘둘렀다. 손전등에서 터져 나온 환한 불빛이 기괴한 문양과 문자로 범벅이 된 벽과 천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라도 싸 올 걸 그랬어요. 탐사라는 건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네요.

    ―아니, 자네는 이런 곳에서 밥이 넘어가나? 애초에 여기선 숨도 제대로 못 쉴 텐데 밥은 어떻게 먹으려고?

    ―그거야 밖에 나가서 먹으면 되죠. 그리고 원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렇게 멋진 유적을 구경하다가도 배가 고프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요.

    ―젊은 친구라 그런지 속이 참 편하구만. 나 때는 말이야, 일단 탐사와 연구가 한 번 진행되면 사흘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았어! 그러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면 그제야 배달 음식을 양껏 시켜 먹고 며칠을 죽어라 잠만 자곤 했지.

    ―대학원생들만 그런 게 아니라요?

    ―……흠흠.

    탐사대는 벽을 통통 두들겨 보기도 하고, 흙먼지가 짙게 깔린 바닥을 발로 쓸어 보기도 하면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럼 이제 움직입시다. 헤드캠으로 촬영할 수 있는 건 전부 담아 두고, 샘플 채취가 필요하면 정지 신호로 팀원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건 그렇고 내부 통로 구조도 굉장히 이상하네요. 걷다 보면 넓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좁아지고, 좁아지는 것 같다 싶으면 다시 넓어지고.

    ―벽이나 천장의 재질도 조금씩이지만 달라지고 있어. 이상한 문양인지 문자인지 모를 것들도 어느샌가 사라졌고.

    ―흠, 이런 경우 크게 두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겠군.

    ―걷는 길에 심심하지 않게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그거야 어려울 거 없지. 마치 고의적으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이 기괴한 통로 구조는 사실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것이 첫 번째 가설이고, 두 번째 가설은 그 반대일세.

    ―반대라고 하신다면?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막는 용도일세.

    그 말에 탐사대원들이 흠칫하며 몸을 떨자 이동춘은 피식 웃었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그의 눈가가 휘어지는 걸 보니 반쯤 팀원들을 놀려 먹으려 했던 것 같다.

    ―뭐,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네. 난 개인적으로 첫 번째 가설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으니. 애초에 이런 고대 유적 같은 곳에 생명체 따위가 살아 있을 리도 없거니와, 외부에 입구가 여럿 있던 것만 봐도 침입자들을 농락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으니까.

    ―하하, 그건…… 다행이군요.

    ―왜? 호러 SF 영화에서처럼 정체불명의 고대 괴물이 툭 튀어나와서 자네들을 습격할 거라고 생각했나?

    ―흉가 탐험 중에 불쑥 괴담을 꺼내면 누구라도 그런 불안감을 품지 않겠습니까?

    ―아, 분위기의 문제였다는거군. 내가 젊은 친구들을 배려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네. 살아 있는 고대 괴물 따윈 존재할 수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였어. 영구동토층 아래에 묻혀 있던 고대 바이러스 같은 거라면 또 모를까.

    ‘애초에 여긴 영구동토층도 아닐뿐더러, 우린 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덧붙인 이동춘이 어깨를 으쓱이자 탐사대원들도 별 반응 없이 넘어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걸었을까. 1인칭 시점으로 내부 구조를 최대한 화면 속에 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어둠 속 너머로 불빛을 비췄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

    ―아니, 분명 말소리 같은 게…… 벽을 통통 두들기거나 바닥을 무언가로 쓱쓱 끄는 소리 같기도 했고.

    ―에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박사님이 농담 좀 했다고 바로 분위기 잡아도 안 무섭거든요?

    ―진짠데…….

    그는 결국 손전등 불빛을 거두고 다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우리 야광봉 몇 개나 남았지? 나는 6개 남았어.

    ―저는 10개 그대로예요.

    ―나도 10개 그대로.

    ―나는 4개 남았다네.

    야광봉을 10개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탐사대의 보고에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손전등의 배터리를 점검했다. 야광봉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손전등 배터리를 아낄까 생각했던 것이다.

    야광봉을 다 쓰고 나서 손전등을 써도 충분하니까, 손전등을 과감하게 꺼 버렸다. 하지만 손전등은 꺼지지 않고 다시 켜졌다.

    깜빡깜빡, 전원 버튼을 연달아 OFF로 바꿨지만 손전등은 다시 깜빡거리며 켜졌다. 혹시 고장이라도 났나 싶어 손전등을 탁탁 두들겨 보니 결국 손전등이 꺼졌다. 하기야 그 디그러쉬에서 제공해 준 장비인데 쉽게 고장 날 리가 없지.

    ―그보다 제법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 같은데, 슬슬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아.

    ―뭐가 나와 봤자 얼마나 대단한 게 나오겠어요? 고대 유물? 화석? 벽화?

    ―인마, 여기 지질학 박사님이 계신데…… 그런 것들이 대단한 게 아니면 뭐가 대단한 거야?

    ―난 신경 쓰지 말게.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들은 먼지 냄새 나고 낡아 빠진 것들에 미쳐 사는 족속들이다 보니 남들의 박한 평가에도 익숙한 법이거든. 젊은 친구들이 고리타분하고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아.

    ―하지만 대학원생들은 좋아했겠죠?

    ―당연히 좋아했지.

    좋아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논문과 학위는 물 건너가는 것이니까.

    피식 웃은 그는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하는 밋밋한 벽과 천장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샌가 좁아지고 넓어지는 통로에서 기이한 문양이나 문자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넓어졌다가 좁아지는 통로였는데, 갑자기 좁아졌다가 넓어지는 통로와 마주한 탓에 그는 실수로 입구 근처 벽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벽의 조각이 후두둑 떨어져 나가면서 흙먼지가 조금 일었다. 그는 실수로라도 위대한 유적을 훼손한 것 같아 찔끔했지만, 다행히 뒤따라오는 탐사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흠흠…… 이제 슬슬 끝을 봅시다. 얼른 탐사 끝내고 나가서 밥 먹어야죠.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이라도 싸 올 걸 그랬어요.

    ―이런 곳에서 밥이 넘어가나? 애초에 여기선 숨도 못 쉴…… 음?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그보다 우리는 지금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예. 몇 시간째 쭉 일직선으로만 나아갔으니…….

    ―그럼 자네 앞에 뭐가 있는지 한번 보게.

    ―제 앞에…… 어라?

    그는 절단기로 파괴한 금속문 앞에 서 있었다.

    ―어디 보자……. 샘플은 충분히 채취했군. 샘플 병이 꽉 찼어.

    ―그럼 탐사는 정상적으로 진행했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와! 그럼 이제 돌아가도 되겠네요?

    ―드디어 집에 간다!

    녹화 영상은 정확히 3시간 20분 지점에서 종료되었다.

    “감상 소감이 어떤가요, 박한성 씨?”

    영상 녹화가 끝난 시점에서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이진혁이 내게 물었다. 나는 레모네이드를 마시다 말고 자신의 시계를 확인했다.

    영상 시청을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정확히 3시간 20분이 흐른 뒤였다.

    “탐사대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조금 전에 보고를 받았는데 전원 연구실에서 사망했다는군요.”

    “사인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부 장기의 급속한 노화. 겉은 멀쩡한데 내부 장기가 100년은 묵힌 것처럼 급격하게 노화해서 정상적인 신진대사가 불가능해져 사망했다고 해요.”

    젊은 사람들의 내부 장기가 언제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연세가 지긋한 노인 수준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였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는 구태여 부정하거나 하진 않았다.

    부정하든 납득하든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상 속 이동춘 박사의 가설에 힌트가 있다고 봅니다.”

    “호오, 의견을 들어 보고 싶군요.”

    “이동춘 박사는 두 가지 가설을 내세웠습니다. 첫째는 저 기괴한 건축물의 내부 구조가 사실은 침입자를 저지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둘째는 반대로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막는 것. 이동춘 박사는 첫째 가설을 밀었지만 저는 둘째 가설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이유는?”

    “탐사대가 들어갔다가 나온 지 3시간 20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100년이 소요되었잖습니까. 무엇보다 100년이나 그들과 함께했던 탐사 장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그들의 몸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무생물이 아닌 생물에게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성질을 가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언가’가 빠져나오지 못하게끔 하는 용도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무생물이 저 스스로 움직이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탐사대 역시 3시간 20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100년의 시간에 걸쳐 결국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요? 그럼 ‘무언가’를 막기 위한 저 건축물의 용도는 정말 형편없는 수준인 게 아닐까요? 사실상 존재 의미가 없을 만큼.”

    “탐사대가 건축물 주변에 말뚝처럼 박혀 있던 기둥을 죄다 뽑아 버린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반영구적으로 건축물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던 동력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온도가 체크 되었지만 막상 인간이 건드려도 문제없었던 그 말뚝 같은 기둥 말인가요?”

    “디그러쉬가 그것을 몽땅 채굴해서 이송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미래그룹 임직원들이 모두 벙어리가 된 마당에 나와 이진혁만이 넓은 회의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열띤 토론을 나누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사실상 무한 동력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디그러쉬가 확보한 겁니다. 그리고 탐사대를 저 건축물에 죄다 쑤셔 박았습니다. 그건 아마도 자신들이 가진 모종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저 건축물은 어떤 용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 용도가 인간 같은 생물에게도 적용이 되는가? 자신들이 말뚝 같은 기둥을 뽑아 간 뒤에도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 모든 검증 절차 끝에 나오는 결과는 어떤가?”

    그렇게 추측에 추측이 꼬리를 물고 가다가 나는 어느샌가 이상한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수많은 가설과 추측, 데이터를 토대로 이 벽의 가장 무른 부분을 공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디그러쉬의 목적은…….”

    모든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인류가 우주로 도약하려는 찰나, 갑자기 등장한 그들은 인류에게 드넓은 우주가 아닌, 좁디좁은 땅속으로 파고들게끔 권유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은 화성 탐사 프로젝트가 아닌, 지저 도시 프로젝트가 되었다. 수많은 인류가 지하 12km에 존재하는 지저 세계로 파고들었으며 디그러쉬를 대신해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해 주었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그런 일을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걸까?

    ‘북한에서 먼저 실험해 봤으니까.’

    10년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북한 인구가 갑자기 급격하게 줄어들고 군사적 행위 역시 사그라들게 된 주요 원인.

    덕분에 중장갑수색대가 잠수함을 타고 몰래 북한에 침투할 수 있을 만큼 북한은 죽음과 고요로 뒤덮인 땅이 되었다. 이유는? 디그러쉬의 어떤 ‘실험’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독재자 한 명이 괴뢰국가 전체를 주무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가난한 탓에 외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곳. 디그러쉬가 은밀하게 침투해서 수많은 땅굴을 파고 어떤 ‘실험’을 하기에 최적화된 무대였다.

    지끈!

    “쓰읍……!”

    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끈거리는 두통에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도 희미한 기억들의 파편을 하나씩 하나씩 조립해 나갔다.

    파편은 퍼즐이 되었고, 퍼즐은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그림은 ‘기억’으로 완성되었다.

    ―12km 아래에 뭐가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자고.

    ―캠코더랑 신호 증폭기를 엘리베이터에 연결해서 아래로 내려 봐.

    ―이상한 유적 같은 것이 보입니다.

    “그랬던 거군.”

    나는 고대인들이 어떤 의도로 저 기괴한 유적을 지은 것인지, 무한 동력이나 다름없는 기둥을 왜 유적 주변에 빼곡하게 박아 두었는지 겨우 이해했다.

    “……디그러쉬의 목적은 고대인들의 위대한 기술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후폭풍은 조금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그저 진보된 기술만을 원하는 괴물들.

    나는 조용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야 놈들이 빛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고대인들이 봉인한 그때부터 줄곧 빛을 보지 못하고 무한한 어둠과 시간 속에 갇혀 있었으니 ‘빛’에 열광할 수밖에 없지.’

    인류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이유?

    ‘놈들은 현대 인류를 여전히 증오스러운 고대인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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