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30화 (130/211)
  • 딥 인사이드 아웃 (138)

    ―너희가 가 줘야 할 곳이 있다.

    ―새로운 부대원들이 들어올 예정이니 잘 대해 주도록.

    ―너희의 작전 데이터가 중장갑보병 전술 교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군인은 ‘의문’을 품어선 안 된다. 품어야 할 것은 오직 ‘충성’뿐이지.

    ―도착했습니다!

    “…….”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천천히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격벽이 다시 열리기까지 격벽 바깥에서 잠깐 지냈는데, 그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아무리 난방시설과 비상식량이 잘 갖춰져 있다고는 해도 어둠과 추위 속에서 홀로 이틀을 버티는 건 꽤나 고역이었다.

    혹시 나이트워커가 자신을 노리지 않는지, 지저 도시의 존재를 눈치챈 폭도나 사이비 종교쟁이들이 격벽 근처에 다가오지 않는지, 그런 걱정들 때문에 잠을 자다가도 몇 번씩이나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면 훨씬 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격벽이 열리기를 기다렸을 텐데,

    밥을 먹고, 경계하고, 잠들고, 다시 경계하고, 난방설비를 확인하고, 또 경계하기를 반복하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격벽이 열렸을 때, 나를 발견한 군인과 소수의 밀수범들이 어찌나 놀란 표정을 짓던지.

    “젊어서 고생해야 늙어서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고생은 좀 과한 감이 있어.”

    뿌드득, 우드득.

    잔뜩 굳은 몸을 거칠게 풀어 주며 어기적거리는 발걸음으로 군부대를 빠져나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요 며칠 사이,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저 도시는 ‘희망’이라는 테마로 열심히 프로파간다를 하고 있었다.

    비록 지상은 ✕됐지만, 그래도 안전한 지저 도시에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는 주제로 침체된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국가 내부에 혼란이 가중되면 언제나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고, 반대로 외부의 문제로 국가가 곤란해지면 내부의 힘을 결속시켜서 사기를 끌어올리는 방식은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모든 국가의 지배층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무지몽매한 피지배층을 휘두르고, 독려하는 척하면서 더 고혈을 쥐어짜 왔다.

    나는 그런 방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요에 의한 통제나 억압,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적의 추구 같은 것은 적어도 효과만큼은 확실했으니까.

    효과가 확실한 극약은 누구나 다 좋아한다.

    당장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거나, 큰 빚을 진다는 걸 알면서도 사채를 끌어다 쓰거나,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인간은 원래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회를 형성했다면 그 사회도 인간들과 똑같은 유형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불편한 진실에서 잠시 눈을 돌리고, 행복한 거짓을 탐하는 것에서 오는 쾌락은 쉽사리 포기하기 힘든 법이다. 나 또한 인간인데 그걸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니까 가게마다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인공 눈으로 만든 눈사람 장식을 봐도 딱히 역겹고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인간은 그런 동물이라고 이해할 뿐.

    ‘뭐, 희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의 지저 도시는 2개월 전의 지저 도시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확실하게 개선되고 있다.

    식료품이나 생필품 생산 및 공급 문제가 빠르게 해소되고 있으며, 뭘 어찌해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던 기업들도 다시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뛰어들어 투자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완성에 불과했던 지저 도시가 조금씩 완성에 가까워지면서, 우울하기만 했던 입주민들의 분위기가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애초에 다들 그만한 여유가 있으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웃고 떠들고 있는 것이겠지. 객관적으로 봐도 좋은 현상이다.

    ‘생각해 보니 내 기억에 크리스마스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네.’

    버스 정류장에서 동부 지구행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문득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참으로 부질없는 연말 행사 중 하나였다. 산타클로스는 당연히 본 적도 없고, 아버지라는 작자에게서 진심이 담긴 선물 하나 받아 본 적도 없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라’고 말하며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린 남매에게 카드 하나를 툭 던져 주는 아버지에게서 우리가 뭘 볼 수 있었겠나?

    물론 자식 사랑이 대단하셨던 어머니께선 개인적으로 정성스럽게 선물을 준비하시고 또 특별한 식사나 간식까지 차려 주셨지만, 우리 남매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동심과 기대감이 빠르게 식어 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많은 돈과 높은 지위, 빼어난 외모와 뛰어난 재주는 분명 행복의 척도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인간미’가 빠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내가 겪어 봤으니까 장담할 수 있다.

    ‘지금의 내 삶도 인간미가 없는 건 매한가지인데, 이런 모순을 견뎌야만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건가?’

    피식 웃으며 때마침 도착한 셔틀버스에 탑승하니 피로가 쌓인 몸이 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전신에 상처와 피로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이 내 무의식 속에 새겨졌을 때, 언제나 나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매우 가늘고 뾰족한 바늘을 가지고 있으며, 실린더 속에 투명한 액체를 품고 있는 이름 모를 주사기였다.

    바늘이 내 팔뚝을 뚫고 들어왔을 때, 정체 모를 약물이 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갈 때, 선명했던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때.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편안하게 잠들었고, 다시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곤 했다. 찝찝함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 주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말로 편하고, 기분 좋고, 치유되는 느낌의 주사였지만, 그것은 불편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행위라는 걸 안다.

    행복한 거짓 속에 잠겨서 무의미한 벌레처럼 인생과 기회를 낭비하느니, 차라리 조금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불편한 진실과 계속 마주하는 게 훨씬 더 낫다.

    그래야 자신을 잃지 않을 것 같았다.

    “직장인들 갈려 나가는 곳도 똑같구만.”

    도착한 동부 지구도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광장 중앙에 떡하니 세워진 인조 크리스마스트리가 빛나고 있었다.

    다들 필사적으로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는 것처럼, 우린 이 상황에도 크리스마스를 즐길 여유 정도는 있다고 발악하듯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지저 도시에 크리스마스 휴무 같은 건 있을 수 없으니 다들 분위기만 내는 것이리라.

    여느 때처럼 미래테크에 방문한 나는 이진혁 본부장과 다시 한 번 대면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멀쩡하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꽤나 놀란 눈치였고, 내가 성공적으로 화물을 입수해 왔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임무를 맡겼다는 건데, 값을 더 높게 쳐서 받을 수 있겠다는 사실만이 내게 심심한 위로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패할 줄 알았어요.”

    “전 세일즈맨입니다. 물건과 신뢰를 판매하는 사람인데 약속을 못 지킨다는 건 어불성설 아니겠습니까?”

    듣기 좋게 세일즈맨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사실 내 신분이 개인 용병이나 해결사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거래 대상이 이렇게나 큰손님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큰손님과 거래하는 나의 가치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이다.

    오는 길에 전문가를 어떻게든 찾아서 이 랩탑에 들어 있는 정보를 몰래 빼내 볼까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신뢰로 먹고사는 입장에선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이 있다.

    그래서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랩탑 보관 케이스를 이진혁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자신의 전속 비서를 시켜 한 금고에서 특수 인증키를 꺼내 오게 했다. 언뜻 생체 인증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작은 열쇠 안에 특수한 전자코드가 삽입되어 있는 반 아날로그, 반 디지털 인증키였다.

    찰칵.

    특수 인증키로 보관 케이스의 1차 잠금을 해제한 그는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랩탑 덮개에 자신의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러자 생체 인증 절차를 거친 랩탑 덮개가 2차 인증을 끝내며 완전히 개방되었다.

    역시나 전고체 배터리가 삽입된 랩탑이 최대 절전 모드를 유지한 상태로 지난 2개월간 인천항에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게 뭔지 궁금하지 않나요? 미래그룹에서 딱 하루…… 아니, 반나절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인천항에서 이것을 가져왔을 텐데, 그 시간이 없어서 끝내 가져오지 못했던 귀물이지요.”

    “의뢰인의 개인적인 정보까지 캐내는 건 돈 안 되는 일이라 사양하고 있습니다.”

    “하하! 농담도 잘하시기는……. 어찌 됐건 이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주셨으니 그에 걸맞은 보수를 지급해드려야겠지요. 뭐가 좋을까요? 막대한 물자? 기술과 인력 제공? 아니면 지저 도시 내에서 미래그룹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다양한 편의?”

    전부 좋은 조건의 보수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디그러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또 필요에 따라서는 그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부가적인 지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설마 내가 디그러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이진혁의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곧 숙련된 재벌 3세답게 그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소 값이 비싸기는 하지만 미래그룹 차원에서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군요. 물론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값을 올려도 받아 주기 힘들겠지만…… 괜찮겠죠.”

    이진혁은 랩탑의 덮개를 닫고 철저하게 무장한 경호원들에게 그것을 넘기며 말했다. 현재 미래그룹을 다스리고 있는 이진호 총수의 사설 경호원들일 것이다.

    앓던 이가 쏙 빠진 표정으로 돌아온 이진혁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원하시죠? 디그러쉬에 대해서 단 하나의 정보만 제외하면 어지간한 건 다 제공할 수 있어요.”

    미래그룹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정보라면 짚이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지금 그 정보를 원할 만큼 간덩이가 크지는 않았다.

    “최근 디그러쉬에서 주관한 지저 도시 외부 탐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을 겁니다. 그들에 대항해 로봇견 도지를 만들고 있던 미래그룹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 지저 도시 외부 탐사 프로젝트. 확실히 그쪽에 저희 쪽 사람과 탐사 장비 몇 개를 심어 두긴 했지요. 마침 탐사대가 어제 복귀해서 현재 전략기획실이 따끈따끈한 각종 정보를 취합 중이에요. 그게 탐이 나는 건가요?”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가 비록 박한화의 아들이긴 하나, 저는 디그러쉬와 하등 관련이 없습니다.”

    “당신의 여동생도 디그러쉬에서 일하고 있지 않나요?”

    “제 여동생은 아직 자신만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디그러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저와 뜻을 함께하고 있지만 움직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니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진혁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뼉을 쳤다.

    “좋아요. 당신이 정말 디그러쉬 측 끄나풀이었다면 애초에 저 랩탑을 우리에게 가져오지 않고 곧장 디그러쉬에게 넘겼겠죠. 따라서 우린 전적으로 당신을 믿겠어요. 물론 필요하다면 다양한 정보와 기술, 인력 제공을 포함한 온갖 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에요.”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지저 도시 외부 탐사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는 제공해 드리죠. 원한다면 오늘 중으로 있을 임원진 정보 분석 회의에 함께 참석해도 좋아요.”

    미래그룹의 임원진 정보 분석 회의에 함께 참석하라니. 저쪽에서도 만만찮게 과감한 방식을 택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안다는 듯,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완전히 신뢰하기로 한 사람을 고작 기밀 유출 우려 때문에 가까이 두길 거부한다면 그거야말로 큰 모순 아니겠어요? 그리고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죠. 친구는 가까이, 적이라면 더 가까이 두라고. 당신이 친구든 적이든 우리와 가까워져야 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에요.”

    가능하면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덧붙이는 이진혁에게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건 희미한 미소뿐이었다.

    “전 자유를 원합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자유가 아니라 좀 더 궁극적인 의미를 가진 자유 말입니다. 그걸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친구와 적을 여럿 만들 수도 있고, 앞길을 방해한다면 마찬가지로 친구든 적이든 얼마든지 배제할 자신이 있습니다. 앞길을 막지 않는 친구가 되어 주신다면 저 역시 성심성의껏 협조하겠습니다.”

    “휘유! 일개 개인이 굴지의 대기업 차기 회장을 상대로 하는 말치곤 조금 과격하네요. 하지만 당신에겐 그럴 능력이 있고 그럴 자격도 있어요.”

    그 대답은 내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미래그룹 역시 내 앞길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기서 박한성이라는 개인과 미래그룹이라는 단체의 동맹이 결성된 셈이다.

    그때,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한 이진혁이 내게 기분 좋은 뉴스를 알려 주었다.

    “아, 때마침 전략기획실 측에서 대략적인 정보 취합과 정리가 끝났다는군요. 곧 임원진 정보 분석 회의가 열릴 예정인데, 그토록 궁금해하는 디그러쉬 정보를 얻을 수 있겠군요.”

    “혹시 회의 중에 간식도 제공해 줍니까?”

    “회의가 꽤 오래 이어질 것 같으니 전속 파티시에들이 어련히 잘 준비해 오겠죠.”

    “전 레모네이드가 취향입니다.”

    재벌 3세는 얼마나 좋은 거 먹고 사는지 한번 체험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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