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23화 (123/211)
  • 인프라 복구 작전 (5)

    빛이 돌아온다.

    질척거리는 타르처럼 온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던 어둠이 빛이라는 세척액에 의해 조금씩 씻겨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빛이 들어온 것은 서울역이었다.

    건물 규모만큼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 서울역 특성상, 아무리 비상 발전기가 있다고 해도 전력은 아껴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절전 모드로 운용하고 있던 전력에 엄청난 여유가 생겼다.

    이 기이한 사태에 전력을 관리하고 있던 기술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최진석에게 보고를 했고, 최진석은 때마침 군용 무전기를 통해 부하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물자는 풍족하지만 전력과 수도가 부족해서 지금까지 서울역이라는 둥지에서 몸을 웅크리고만 있었던 그들이다.

    최진석은 숨을 몰아쉬는 기술자를 진정시키며 더이상 절전 모드로 시설을 운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이제 난방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더러운 눈을 녹여서 식수로 활용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숨죽여 흐느낄 필요도 없다.

    자신의 염원에 한층 더 다가선 느낌이 든 최진석은 잠시 희열에 젖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만 놓고 보면 브라보 원과 접촉한 것은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자신보다 한 기수 앞선 선배인 그는 이미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브라보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최고의 수색대원이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윗대가리들이 작정하고 사고사 처리 하기 위해 무려 17번이나 북한에 침투시켰으나, 그는 언제나 그랬다는 것처럼 당당하게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의 동료가 죽고, 또 몇 명의 정신이 붕괴되어 폐기 처분 당하든 상관없이.

    군 내부 기밀 자료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최진석은 박한성에 대해 연구하고 개인적인 평가를 내린 한 심리학자의 디그러쉬제 녹음기를 손에 넣었다.

    책상에 녹음기를 올려 둔 그는 이미 몇 번이고 들었던 기록을 다시 한 번 재생시켰다.

    ―박한성은 상응하는 보수가 확정되어 있는 목적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일종의 황금만능주의인가?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지 않는 형태의 깔끔한 보수를 원합니다.

    ―예를 들면?

    ―그는 세 번째 수색 임무 성공 후 영내 수색대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보수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그 보수가 확정된 것인 양 그런 요구를 했다는 겁니다.

    ―그건 지금도 의문이라는 사람들이 많더군. 왜 그런 행동을 보인 거지?

    ―간단합니다. 그는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인재라는 사실을 수색 작전 3회에 걸쳐 선보였고, 따라서 자신이 선을 지킨 요구를 한다면 군 측에선 무조건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이미 보수를 확정 짓고 3회에 걸친 수색 작전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매우 이상한 계산법이군. 논리도 기괴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한성의 심리 상태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 겁니다. 국정원장님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라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미래를 계산하여 거기에 자신의 행동과 합리성을 부여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하다기보단…… 앞서 말한 대로 기괴하군. 어떻게 인간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지?

    ―국정원 측에서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디그러쉬의 중역으로 일하고 있는 박한화의 아들이더군요. 그리고 박한화는 업계 내에서도 유명한 인간입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죠.

    최진석이 박한성은 브라보가 아니라 알파로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그는 다른 떨거지들과 다르게 무려 박한화의 아들이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엘리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는 진정한 인재였으니까.

    ―재벌 2세, 3세들도 어릴 때부터 일종의 제왕학 수업을 듣는다지요? 그건 박한성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느 나라든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으니 분명 지독하면서도 창의적인 수업을 받았을 겁니다.

    ―하기야 그 독사 같은 인간 밑에서 자랐다면 그런 애새끼가 튀어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은데……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무엇이 이상합니까?

    ―박한성이 상응하는 보수가 확정되어 있는 목적에 매우 예민하다면, 어째서 임무의 위험성에 비해 그리 큰 보수를 바라지 않았던 거지? 그는 지금까지도 수차례 진행된 수색 작전을 성공시켰는데.

    ―아, 그 부분이군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평가할 때 가장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긴가민가했으니까요.

    ―그럼 자네 의견을 한번 들려주게.

    ―간단합니다. 그는 수색 작전을 통해 터득하는 전투 능력, 육체적 능력, 정신적 능력 그 자체를 보수라고 생각한 겁니다. 거기에 더해 ‘무의식’하에 군의 온갖 기밀 정보를 보관해 두는 것은 덤이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MK 울트라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됐네. 전투, 육체, 정신적 능력이 강화된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정보는 철저하게 지워졌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이미 엄청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해서 기억이 확실하게 지워졌다는 결과까지 도출해 냈는데……!

    ―제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의식’이라고.

    ―…….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 국정원장님께서 불의의 사고로 기억상실에 걸리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국정원장님은 오랜 직장 생활 덕분에 특유의 루틴에 매우 익숙해진 상태일 겁니다. 예를 들어 총성이 들리면 바로 자세를 낮추고 품속의 권총을 뽑아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터진다면 기억이 온전한 나는 그렇게 하겠지만, 기억이 없는 나도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예, 확신합니다. 바로 그래서 인간의 무의식이 무서운 점이기도 합니다. 한 번 무의식에 새겨진 강렬한 기억과 습관은 절대로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최진석은 그 대목에 크게 동감했다.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무의식에 새겨진 끔찍한 기억 때문에 육체와 정신이 큰 혼란을 겪는 질환이니까.

    만약 전장에서 돌아온 퇴역병의 기억을 약물로 말끔하게 지웠다고 해도, 그는 폭음이나 총성을 들으면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거나 간질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무의식이란 그런 법이니까.

    ―그렇다면 제거해야겠군.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 요원들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가?

    ―그럼 반대로 묻겠습니다. 국정원에 소속된 최정예 요원들 중 브라보에게 할당된 수색 작전을 최소 10회 이상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인재가 있습니까?

    ―…….

    ―제거하려면 적어도 수색 작전이 5회를 넘어가기 전에 제거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예, 높으신 분께서 일 잘하는 인재를 제거하게끔 놔두지 않으셨겠지요. 그래서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가 전역한 후에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어!

    ―사실은 국정원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그가 전역하고 난 뒤에는 너무 늦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 역시 10회가 넘는 수색 작전을 성공시킨 그의 속내를 더 이상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뇌파 탐지기를 사용해도 그의 뇌파는 조금도 요동치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인가?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어째서 무의식이 무서운 것인지. 그는 매 회 작전을 수행하고 복귀할 때마다 기억을 잃지만, 그 대가로 그의 무의식에는 온갖 기억과 경험 그리고 ‘본능’이 새겨지게 됩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에 다다른 것이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제 그가 왜 상응하는 보수가 확정된 목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최진석은 이해했다.

    ―그럼…… 그가 알파에 편입되지 않고 브라보를 선택했던 것도?

    ―그건 약간의 반항심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수색 작전을 수행할 때마다 그는 느꼈을 겁니다. 자신의 무의식에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쌓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그는 군말 없이 수색 작전을 수행한 겁니다. 목숨을 건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았으니까.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최진석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거해야 해! 그 미친놈을 사회에 풀어놓으면 대체 어떤 짓을 벌일지……!

    ―그는 자신이 한 번 얻은 것은 절대로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온전히 자신의 것을 가지지 못했던 불쌍한 사람처럼. 그러니 국정원장님의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을 겁니다.

    그 대목을 끝으로 녹음 기록은 종료되었다.

    실제로 심리학자의 마지막 예언은 적중했다. 박한성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는 끝없이 보수를 얻기 위해 목적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일반적이라면 목적을 우선시해 두고 그 과정에서 보수를 생각하지만, 그는 언제나 보수가 최우선순위에 있는 남자였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진석은 박한성에게 63빌딩 침투 계획에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막대한 보수를 약속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목숨이 위태로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음에도 박한성은 매우 쉽게 수락했다. 그리고 막대한 보수를 받아 내기 위해 억지로 목적을 달성시켰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기상관측 자료를 손에 넣었을 때, 최진석은 박한성이 ‘보수’로 지정한 것만큼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도 발전소를 빼앗긴 건 조금 뼈아프군.”

    만약 발전소를 손에 넣은 게 박한성이 아니었다면 최진석은 망설임 없이 중장갑보병을 동원해 발전소를 빼앗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한성이 발전소를 손에 넣은 이상, 전력과 수도세를 반값 할인해 준다는 다소 황당한 합의에 만족하기로 했다. 괜히 그를 건드려서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더 많다는 걸 이해한 결과였다.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전력이 온전히 복구되면…….”

    최진석은 서울역 내부에 보관되어 있는 최신예 전철과 열차를 떠올렸다.

    대용량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해 한 번 전력을 완충하면 철도를 따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위대한 문명의 이기. 안타깝게도 하이퍼루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전 단계를 대표하는 기술력의 집약체였다.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이 끊어진 인천, 그리고 부산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계획의 핵심 요소인 만큼 최진석은 전력 확보에 집중하기로 했다.

    손상된 기록

    계획은 순조롭다.

    사실 순조롭다고 평가하는 것도 부족하다. 그야말로 커다란 돛에 해풍이 딸려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수 처리 시설에서 상정해 두었던 범위 내의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김명호가 조직원들을 잘 이끌어서 원만하게 해결했다.

    한강에서 나이트워커 변종들이 유입된 원인으로 추정되는 파손된 파이프와 외벽 수리는 착착 진행되는 중이고, 시설 관리용 안드로이드가 미친 듯이 움직이며 오랫동안 쌓인 더러움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수고를 던 나는 스마트글라스로 만든 서울 지도를 테이블에 펼쳐 두고 김명호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다.

    ‘전력은 우선 서울역과 롯데호텔에만 공급하죠. 정수 처리 시설 재정비가 끝나는 대로 수도 역시 그쪽으로만 우선 공급하고.”

    “음? 노원역도 우리 전초기지 아닙니까?”

    “전초기지는 맞지만 서울 중심부에선 거리가 너무 멀어요. 전력과 수도 공급 고려 대상이라고 보긴 힘들죠.”

    김명호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당장 우선 공급 순위가 아닌 건 명백했다.

    “물론 노원역에 우리가 들인 품이 적지 않으니까 전력과 수도를 공급하긴 하겠지만, 그게 당장은 아니라는 거예요. 서울의 중심부와 서울 동부, 어느 쪽이 더 가치가 높은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노원역은 지금처럼 적당히 중개무역센터로 사용하되, 여유가 남으면 그때 전력과 수도를 순차적으로 공급하기로 하죠. 지금은 사람들을 서울 중심부로 끌어모으는 게 우선이니까.”

    “사람들을 서울 중심부로 끌어모은다라…… 좋은 계획이 있습니까?”

    두말하면 입 아프지. 레모네이드를 좋아하는 어느 게임 먹방 BJ가 말하길 계획 없이 움직이는 리더만큼이나 멍청한 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장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역과 롯데호텔 그리고 인근 호텔 및 대형 상가에 전력과 수도를 공급해서 우리 지역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에요. 하지만 그곳을 채우기 위한 사람을 모으려면…… 역시 여길 확보해야겠죠.”

    나는 서울 용산구 남산에 위치한 국가보안시설을 가리켰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남산타워가 맞다.

    이게 국가보안시설로 지정된 이유는 재미있게도 청와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와 높이 때문이었는데, 그밖에도 송신탑 역할을 하기 때문에 평시에는 보안 직원과 청원경찰이 상시 근무하고 있다.

    지금은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접근 자체는 어렵지 않겠지만, 롯데호텔 근처를 지나갈 당시에는 건드려 봤자 무의미한 장소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전력 공급이 곤란하니까.

    뿔뿔이 흩어진 군대, 경찰 그리고 서울 시민을 다시 서울로 불러들일 수 있는 핵심 요소이면서, 동시에 발전 시설을 확보하지 않으면 가동할 수 없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타워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비상 발전기가 존재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이 타워를 발전소처럼 완벽한 형태로 손에 넣고 싶었다.

    내 의도를 눈치챈 김명호가 정해진 답을 말했다.

    “혹시 라디오 방송을 할 생각입니까?”

    “해야죠. 까놓고 말해서 서울 외 지역은 부족한 것들 천지잖아요? 인프라부터 시작해서 식료품과 생필품까지. 천만 인구를 상시 수용하던 대도시에 한참 못 미치는 지역에 있을 바에야,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끔 하는 게 낫죠.”

    “하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듣고 피난민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들을 우리만으로 어떻게 감당합니까?”

    사실 그 부분은 나도 걱정이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 모순적인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는데, 서울 외 지역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이 성공적으로 타 지역에 도달했다고 한들, 실제로 그곳에서 이곳으로 힘들게 넘어오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으며, 또 각종 위험 요소를 뚫고 서울에 도달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정말로 많아 봤자 수만 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만큼 겨울이 닥친 지상의 추위와 어둠은 혹독했으니까. 나이트워커나 무법자로 변절한 인간들 역시 큰 위험 요소이고.

    그러니까 라디오 방송을 하는 거다. 블러핑 용도로.

    “서울에 자리 잡은 XX세력이 건재하다, 서울을 꽉 쥐고 있다, 귀중한 인재나 정보, 물자를 충분히 수용할 능력이 있다. 그걸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둑 터진 댐처럼 우르르 몰려오는 피난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건재하고, 또 그만한 능력을 갖춘 집단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의탁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기존의 기득권층이 가만히 내버려 두겠어요?”

    “……아!”

    그제야 김명호는 내 의도를 이해하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당연히 우리처럼 조직, 혹은 단체 단위로 사람을 이끄는 기득권층이 있겠죠. 지배층이라고 하는 게 맞나? 어쨌든, 그들은 불필요한 인구와 물자 유출을 최대한 막으려 할 것이고, 반대로 그들의 압박에 못 견딘 진짜 인재들은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찾아오려 하지 않겠어요?”

    거슬리는 군소 조직들의 내부 혼란을 조장하는 한편, 그 조직에서 합당하지 않은 대가와 처우를 받고 있는 인재들을 서울로 끌어모을 수 있다.

    불필요한 잔가지는 저들이 알아서 쳐내게 하고, 우리는 서울에 도달하는 진짜배기 알맹이만 쏙 빼 먹는 것이다. 그러니 수십, 수백만 피난민 떼를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조직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훌륭한 방식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지독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마음 쓸 필요 없어요.”

    “…….”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게 뿔뿔이 흩어진 군소 조직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해요. 하나가 되지 못한 중소규모 군소 조직들은 결국 어느 시점에서 패망할 테니까요.”

    당장 롯데호텔과 노원역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롯데호텔은 내부 배신자가 저지른 뒷공작 때문에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힘도 못 쓰고 빌빌대면서도 인원과 장비발로 1개월을 넘게 버텼다. 그런 지독한 패널티가 없었다면 서울역처럼 적극적으로 발전과 자급자족을 꾀했겠지.

    하지만 노원역은 사이코 종교쟁이 놈들의 개입이 없었다고 해도 결국 무능한 군 장교와 매우 적은 인원 때문에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전멸했을 것이다. 그게 나이트워커의 습격이든, 물자 부족이든, 내부 분열이든 간에.

    뿔뿔이 흩어진 군소 조직과 하나로 뭉친 대형 조직은 고작 그 정도의 차이 때문에 완전히 다른 생존율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해하기 힘들다면 서울역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서울역에 처음 자리 잡은 중장갑보병과 민간인들은 기껏해야 수백 명 단위였지만, 그들이 서울역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금세 수천 명 단위까지 불어났죠. 리스크가 매우 높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살리면서 자립에도 성공했어요.”

    “과연. 그렇게 생각해 보니 또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못해도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 이상이 몰려올 텐데 그 인원은 어떻게 감당하실 겁니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죠?”

    내 멍청한 질문에 김명호는 동작대교 옆 발전소를 가리켰다.

    “그럼 우리가 위치한 발전소 근처에는 뭐가 있죠?”

    이번에는 학생에게 답을 유도하는 선생님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핵심 시설만 따지면 동작역이 있습니다.”

    “그밖에는?”

    “동작역 우측에 죽여주는 한강 뷰를 자랑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파트단지가 있습니다. 못해도 수만 명쯤은 가볍게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입니다. 삼각산동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계속 말해 보세요.”

    “또 해당 아파트단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구반포역과 신반포역이 있습니다.”

    “좋아요. 더 해 보죠.”

    “동작역 남부에도 만만찮은 규모의 아파트단지와 수많은 편의점, 학교 그리고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마트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서울가톨릭대학성모병원이 가깝습니다.”

    “그럼 이제 대인원 수용 문제는 해결됐네요?”

    자신이 말하고도 믿기지 않는지 김명호는 황당한 눈빛으로 나와 스마트글라스 지도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이 모든 걸 예측하고 이 발전소를 확보한 겁니까?”

    “정확히는 여단장으로부터 이 발전소 위치와 용도를 듣고 나서부터였죠.”

    세상에, 빌어먹을, 맙소사. 난 너무 잘났어.

    “그러니까…… 어…… 진짜 완벽한 계획이긴 합니다. 주변에 모든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그곳에 충분한 전력과 수도만 공급해 준다면…… 허, 참.”

    뒤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도 굳이 말하겠다면야 말릴 필요는 없지.

    “……우리가 죽어 버린 서울을 다시 부흥시킬 수도 있습니다.”

    “거, 쑥스럽게 그걸 직접 말하시네.”

    당황스러워하는 김명호의 어깨를 적당히 두들겨 준 나는 실없이 웃으면서도 눈으로는 서울 지도를 낱낱이 훑었다.

    ‘강북과 달리 강남은 안전 확보가 되지 않았다. 꽤 많은 화력을 투입해서 안전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야.’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을지, 우리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는지, 또 향후에 얻게 될 막대한 잠재적 이윤으로 희생을 덮을 수 있는지도 계산해야 한다.

    필요한 일이라서 해야 한다기보단,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요한 요소들을 이곳저곳에서 가져오는 느낌이었다.

    마치 보수를 위해 무작정 골인 지점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전력과 수도만 공급된다면 식량은 지저 도시에서 종자를 구한 뒤, 지상에서 얼마든지 수경 재배로 기를 수 있다. 물론 얼어붙지 않게 따뜻하고 안전한 지하철역이나 시설 내부에서 키워야겠지만.

    어쨌든 그만한 과학 기술력이 밑받침해 주는 시대인 만큼 식량 걱정은 덜하다.

    안전 문제 또한 크게 우려되진 않는다. 우리가 화력으로 한번 싹 쓸어버린 다음, 여단장이 녹음기에 기록한 은닉된 군수물자를 싹 털어 버릴 예정이니까. 대한민국 남성들 중 20대 이상 대다수는 군필이니까 병력화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의식주가 모두 확보되고, 지저 도시가 아닌 지상에서 제2의 부흥이 일어난다면, 그런 현상이 타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고, 더 많은 이들이 내 뜻에 동조하고, 마침내 내가 그들을 이끌게 된다면.

    어쩌면 나는…….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겠지.’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계획을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조직원들을 더 격려하고 부추겼다. 지저 도시에서도 발전을 꾀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하길 권유하고 있다.

    그것이 자유와는 하등 관련 없는 무거운 짐 덩어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묘하리만치 내 의지는 이 원대하고 빈틈없는 계획을 순조롭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

    “아아.”

    그래서 나는 초조했던 것이구나.

    자유로부터 더 멀어질까 봐.

    그렇게 불안해하는 나 자신에게, 나는 스스로 안도와 격려의 말을 흘렸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유라는 보수를 얻기 위한 목표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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