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프라 복구 작전 (2)
알파 원, 그러니까 현재의 알파(중장갑타격대)를 이끌고 있는 최진석 병장과 2주 만에 다시 만났을 때 특별한 감정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친근한 군대 후배 같지도 않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 같지도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우리를 돕는 조력자 같지도 않았다. 그냥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적으로 좋냐 싫냐를 물어보면 싫은 쪽에 가깝고, 함께 일을 할 파트너로 좋냐 싫냐를 물어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쪽에 해당하는 미묘한 인간이다.
다만 최진석은 나를 좋은 쪽으로 보고 있는 듯, 우리가 서울역에 방문하자마자 내쫓기는커녕 환대해 주었다. 만약 내가 서울역의 주인이었다면 무조건 내쫓았을 텐데.
차치하고, 나는 63빌딩에서 수확한 물자 일부가 보관된 서울역에서 운반팀에게 물자 회수를 맡겼다. 내가 일한 몫을 정당하게 받아 가는 것이라 그 부분에 대해선 최진석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내가 단순히 물자 회수를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중대급 장비와 인원을 데리고 나온 걸 보면 이 근방에서 볼일이 있다는 거겠지. 그 중간 지점으로 서울역을 선택했다는 건 우리에게도 볼일이 있다는 거고. 내 말 틀린가?”
“63빌딩 침투 계획을 내가 도왔었지. 이제 너희가 도울 차례야.”
“그 일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것으로 아는데?”
“물론 나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야. 계획에 협조해 주면 서울역에 전기와 수도를 반값 할인해서 공급해 주지.”
전기와 수도 공급이라는 말에 최진석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울역이 제아무리 풍족한 물자와 이상적인 지형을 바탕으로 천혜의 요새를 구성했다고 한들, 만성적인 전기와 물 부족 현상만큼은 어쩔 수 없을 거다.
이곳에도 서울역을 운용하기 위한 비상 발전기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전기를 꽤나 아껴 가면서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요최저한의 난방과 조명을 위해서만 전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쯤은 일전에 방문했을 때 눈치챈 지 오래다.
“사실 전기는 둘째치고 물이 가장 시급하겠지. 서울역은 규모가 규모인 만큼 물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코딱지만 한 군용 정수 장치로는 씻는 물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울 거 아냐?”
군대에선 유사시 적지에서 물을 직접 정수 처리 해서 마셔야 한다는 누군가의 기막힌 의견 때문에 만들어진 소형 정수 장치가 존재한다.
개발부터 양산까지 얼마 안 된 신삥이라 최전방 부대에만 우선 보급 된 걸로 아는데, 최진석은 최전방 부대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중 몇 개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문제는 서울역이 너무 큰 탓에 그것들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고.
“확실히 물은 중대 사항이지. 눈을 녹여 먹는 것도 한계가 있고.”
“눈에 뭐가 섞여 있을 줄 알고 그걸 녹여 먹어?”
“사람은 원래 급하면 똥이고 된장이고 안 가려.”
최진석은 서울역 대합실에 바글거리고 있는 민간인을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식수를 포함해서 최소한의 위생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물이 필요해. 그래서 눈이 내릴 때마다 싹 긁어모아서 녹인 다음 정수 처리 해서 썼지.”
“이상한 병이나 특이 증상을 보인 사람은?”
“아직까진 없어.”
하긴, 우리도 지상 작전에 나갈 때마다 눈을 오지게 맞았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긴 하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미리 말해 두는데 난 사람 함부로 못 믿는 성격이라 정당한 거래를 통해서만 관계를 유지하는 놈이야. 그래서 너희가 협조를 거부하면 우리가 전력수도복합발전소를 복구했을 땐 더 비싼 값 받고 물건 팔 생각이거든.”
“반대로 너희가 시설을 복구한 뒤에 우리가 무력으로 빼앗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나?”
“난 그런 걱정 안 해.”
이번에는 내가 저 아래의 민간인들을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중장갑보병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있었다.
“침투, 공작에 능한 내가 여길 몰살시키는 게 어렵겠어?”
“…….”
“신호탄을 쏴서 이곳으로 나이트워커들을 몰려오게 할 것까지도 없어. 너희가 이곳에 틀어박혀 말라 죽을 때까지 며칠이고 몇 개월이고 인근 건물에 자리 잡고 저격해 줄 수도 있어. 아니면 폭탄을 설치해서 저 튼튼한 방화벽을 박살 내 놓을 수도 있고.”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집단일수록 잃을 것도 많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자 최진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잠시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잊었군. 네 계획에는 협조해 주지. 이쪽에서 중장갑보병 20명을 지원하겠어.”
“겸사겸사 작전에 필요한 물자도 좀 지원해. 알다시피 우리가 좀 가난해서 총알도 아껴 쓰는 상황이야.”
“어려울 거 없지.”
이런 중대 사안을 가벼운 말 몇 마디로 합의한 우리는 악수를 나눈 뒤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물자를 회수한 운반팀에게 다시 지저 도시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고, 전력수도복합발전소를 복구하기 위해 필요한 타격팀은 남게 했다.
장갑차가 호위하는 운반팀은 먼저 물자를 회수해서 빠르게 복귀했으며, 우리 쪽에서 남은 인원은 저쪽에서 지원해 줄 중장갑보병 20명과 함께 재편성에 들어갔다.
계획을 진행함에 있어서 소통 부재는 가장 큰 적이기 때문에 서로 익숙하지 않아도 적절하게 한 팀을 이룰 수 있게끔 조정했다.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한 박자 쉬어 간다느니 어쩌니 하는 건 다 쓸모없었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은 속전속결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즉시 서울역을 빠져나왔다.
서울역에서 쭉 남하해 이촌역을 따라 금강아산병원을 거쳐 동작대교로 향했다.
40명에 달하는 엑소스켈레톤 착용자와 전투 보조 인원 20명, 물자는 빵빵하고 자신감도 충만한 상태다.
목적지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도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형태가 점점 뚜렷해졌다.
동작대교 너머, 그러니까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한강 뷰 아파트들의 조경을 해치지 않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 잡은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올림픽대로 바로 옆에 위치한 한강변 일대를 싹 밀어 버리고 그곳에 전력수도복합발전소를 세운 것이다.
이 복합 발전소가 완공될 때만 해도 지저도시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기술적 진보니 도약이니 하고 뉴스에서 줄창 떠들어 댔던 것이 기억난다.
기술의 특혜를 톡톡히 받고 있는 서울 중심부에서 더러운 한강을 깨끗하게 정수하고, 전력 발전까지 하는 효자 발전소라고 동네방네 소문까지 냈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울 중심부에서 북한산까지, 그리고 북한산에서 다시 지하 12km까지 인프라 라인을 연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조용히 ‘보조 발전 시설’로 전락해 버린 비운의 발전소다.
지저 도시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의 최신예 기술이 잔뜩 적용된 완전 자동화 시설이라며 떠들어 댔던 것치곤, 너무나도 조용했다.
‘흑야 사태가 발발하면서 모든 발전소들이 원격 제어, 혹은 AI의 판단에 의해 가동 중지 되었겠지.’
그래서 대한민국에 어둠과 추위가 훨씬 더 빨리 다가왔던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동작구에서 구 하나만 건너면 영등포구인데, 그곳에서도 나이트워커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을 기억한 나는 소음을 줄이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강북 지역은 이미 지저 도시 출신 밀수 조직과 서울역에 자리 잡은 알파 부대가 대부분 정리했다지만, 강남 지역은 아니었다.
수도권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군부대 대다수는 인천으로 ‘빤스런’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다른 군부대의 지원을 바랄 수도 없었다.
대교를 건너면 곧장 발전소였기 때문에 철조망이 둘러쳐진 부지에 접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맹추위로 전신이 얼어붙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모두가 숨죽인 채 절단기로 철조망을 하나하나 끊어 냈다.
전력이 살아 있었다면 벌써 불법 침입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도 남았으련만, 세상은 여전히 지독하리만치 고요했다.
나는 조직원과 중장갑보병으로 새롭게 편성한 A팀 30명을 이끌었고, 김명호는 같은 비율로 구성된 B팀을 이끌었다.
“비상사태 선포 때문에 출입구가 완전히 폐쇄된 상태인데, 강제 개방 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
이번엔 63빌딩과 달리 발전소에 그 어떤 손상도 입히면 안 되기 때문에 무식하게 폭약부터 까는 일은 자제하기로 했다.
그 대신 공업용 엑소스켈레톤을 능숙하게 다루는 조직원 몇 명을 불러서 폐쇄된 격벽을 강제 개방하게 했다. 혹시 모를 소음이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 서울역에서 가져온 방음판을 그들 주위에 세웠다.
“그런데 제가 이런 방면으로는 잘 모르지만, 발전소를 다시 가동하려면 보안 코드나 관리자의 인증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조직원들이 격벽 개방 작업을 벌이는 동안 김명호가 조용히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저도 그 점을 걱정하긴 했는데, 여단장이 녹음기로 보안 코드를 남겨 놨어요. 듣자 하니 롯데호텔에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곳을 관리하던 관리자 중 한 명이 피난 왔었다고 하더라고요.”
여단장이 언젠가는 이 발전소를 다시 복구하겠다고 잔뜩 벼르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해당 관리자로부터 보안 코드와 발전소 재가동 절차를 들은 여단장은 성실하게도 그것을 녹음기에 기록해두었으며, 현재는 그 녹음기를 이어받은 내가 여단장이 못 이룬 꿈을 대신하고 있는 상황이다.
처음부터 그 관리자라는 사람을 데려왔으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앞서 알아보니 그 사람은 우리가 롯데호텔에 오기도 전에 나이트워커의 습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최첨단 기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이 발전소가 고작 보안 코드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가동될 리가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일부 보안 절차를 생략하기 위해서 또 한 번 미래그룹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세상만 멀쩡했다면 미래그룹 주식에 전 재산 때려 박았을 텐데.”
내가 지상의 발전소 하나를 재가동해서 인프라 일부를 복구하겠다는 계획을 과감하게 밝히자, 미래그룹 측에서도 꽤 대담하게 나왔다.
비상 프로토콜의 보안 절차 일부를 생략하게 도와줄 툴(TOOL) 하나를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사소한’ 부탁 하나를 한 것은 덤이었다.
“격벽 개방 했습니다.”
방음판 안에서 나온 조직원 한 명이 우악스럽게 열어젖힌 격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공업용 엑소스켈레톤 몇 대가 달려들면 안 되는 게 없구나 싶었다.
격벽이 기기기긱, 하고 불쾌한 소음을 자아내며 완전히 개방되었을 때, 우리는 내부에 조명을 비추며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국가 보안 시설답게 형식적이지만 입구 보안 검색대도 있었다. 기밀 유출 및 불순한 목적을 가진 침입자 방지 목적이었다. 그것도 지금은 전력이 끊어진 탓에 아무런 쓸모도 없었지만.
“비상 전력은 제가 복구시킬 테니 명호 씨가 애들 데리고 먼저 정수 처리 시설로 가 주세요.”
복합 발전소답게 규모가 규모인지라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사람들이 떼 지어 들어와도 그다지 비좁다는 느낌은 없었다.
꽤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치곤 내부는 비교적 깨끗했다. 애초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먼지가 좀 쌓여 있을 뿐이었다.
다만 유일하게 거슬리는 점이 하나 있다면, 외부에 비해 내부 기온이 훨씬 더 낮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내부가 외부보다 조금 더 따뜻한 게 정상 아닌가?’
마치 이곳에서 냉기가 생성되는 것처럼,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냉동고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래서야 비상 발전기를 돌려도 기계들이 정상적으로 작동이나 할지 의심스럽던 그때, B팀이 향한 정수 처리 시설 방면에서 묵직한 총성이 들려왔다.
“……멈추지 않고 계속 간다. 저쪽 문제는 저쪽에서 처리할 거야.”
“하지만 저희도 가서 돕는 게…….”
“그럴 거면 왜 팀을 나눠서 역할 분담을 했는데? 오히려 1분 1초라도 더 빨리 전력을 복구시켜 주는 게 나아.”
정수 처리 시설은 한강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기에, 나는 총구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