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15화 (115/211)
  • 오염(2)

    “최대한 많은 생산 단지를 파괴해야 하네. 가능한가?”

    “지금쯤이면 시작했을 겁니다. 이곳에서 자연광(태양광)을 얻을 수 없으니 주변에 있는 것들에게서 닥치는 대로 열량을 얻으려 하겠지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네. 그저 내 아내를 죽인 놈들이 멀쩡하게 잘 먹고 잘사는 꼴을 볼 수가 없어.”

    “형제님께서 느끼고 계실 분노를 저희는 이해합니다. 그렇게나 금실이 좋은 부부셨으니.”

    “그래! 빌어먹을!”

    쾅! 쩌적!

    유리 테이블을 세게 내려친 50대 남성은 분노를 삭이지 못해 씨익씨익거렸다.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지상에 있을 시절 꽤 잘나가는 수완가였다.

    나름대로 야심도 있었고 머리도 비상했기 때문에 정계나 재계에 이래저래 줄을 대면서 일감을 곧잘 수주받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꾸준히 세력을 늘려 나갔었다.

    그러던 중 원자재 유통 및 공급 사업이 지저 도시 프로젝트 때문에 대박이 터지면서 벼락부자가 되었다. 윗사람들에게 먹인 돈이 꽤 많았는지라 지저 도시 입주권도 미리 확보해 둔 상태였으니, 늙어 죽을 때까지 걱정 없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아내가 갑자기 사치를 부리고 귀족처럼 살기 시작해도 그것을 감당할 재력 그리고 여전히 사이좋은 부부라는 관계가 있었기에 별문제 없는 줄 알았건만.

    갑작스럽게 암에 걸려 죽어 가던 아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해결책을 찾다가 이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지저 도시의 입주권과 큰 재력을 가진 남자가 ‘형제’가 되어 주길 원했고, 그는 아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노라 맹세했다.

    그렇게 지방에서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아내에게 흑연의 일부를 주입하고, 건강을 되찾게 했다.

    아내의 건강에 차도가 보이자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밀린 일거리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돈, 더 확고한 지위를 얻어야 앞으로도 이 행복이 유지될 것이라 믿었기에.

    그리고 흑야 사태가 벌어진 당일, 서울에 있던 자신이 먼저 지저 도시에 입주하고 아내는 다소 늦게 출발했지만 어찌어찌 입구 앞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비록 지상에서 큰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안전한 지저 도시에서 다시 아내와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던 그날.

    그는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정확히는 그의 아내가 매우 위험한 물질로 추정되는 무언가에 감염되어 있었으며, 또한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를 벌였기에 불가피하게 사살했다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내 아내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빌어먹을! 사치가 좀 심하고 성격이 살짝 드센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게 있어선 항상 착하고 멀쩡한 아내였다고! 그런 사람을 대체 왜……!”

    “진정하시지요, 형제님. 형제님의 도움으로 저희가 이 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원자력발전소를 파괴한다는 작전은 두 번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번에 생산 단지를 파괴해 버리면 결국 이곳은 무너질 겁니다.”

    “그래, 그래. 자네들만 믿고 있다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어째서 그만한 거액을 들여서 자네들을 여기에 들여왔겠나?”

    지저 도시 입주권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을 자랑했다. 오죽하면 지저 도시 프로젝트 관계자 및 노동자, 군인들의 가족들까지 제외하면 일반인 비율은 거의 없다시피 했겠는가.

    지저 도시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는 입주권을 판매해서 자금을 마련했고, 그것이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지저 도시에 입주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확실하게 파괴해 주게. 내 아내를 짐승처럼 총으로 쏴 죽여 버린 놈들이 발 쭉 뻗고 자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예. 형제님의 소원대로 이곳은 더 이상 미래와 희망으로 빛나는 도시가 아니게 될 겁니다.”

    어둠 속에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들은 숨죽여 오열하고 있는 그의 집무실을 조용히 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 * *

    직원의 안내를 받아 게스트용 휴게실에 도착한 나는 꽤 많은 사람들과 마주했다.

    나 말고도 파견을 나온 각 기업들의 직원들 하며, 평소처럼 특정 화물 운반을 위해 방문한 유통업자, 혹은 생산 단지에서 잡초나 해충을 제거하는 일일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생산 단지 대부분은 자동화 공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기계의 힘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었다. 바로 그런 곳에 일일 근로자들을 투입해서 일을 맡긴 뒤, 보상을 지급하는 형태였다.

    이곳은 기업이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 정부가 관리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업에서 내주는 하청에 비해 인기가 많다는 모양이다.

    ‘하긴. 워낙 거대한 생산 단지라 어디 짱박혀서 시간 좀 축내다 보면 적당히 일하고도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드론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기업 하청에 비하면 선녀가 다름없지.’

    그래서 그런지 넓은 휴게실 내부는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일일 근로자들은 얼떨결에 일하다 말고 도로 불려 들어와서 쉬게 되었으니 놀자판이 벌어졌고, 반대로 한시가 급한 기업 소속 직원이나 유통업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곳은 정부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기밀 유출을 우려해 스마트폰 및 허가받지 않은 전자 기기 사용이 전면 금지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 역시 서부 지구 게이트에서 스마트폰을 제출해 둔 상태였다.

    미래그룹 소속 직원인 것처럼 꾸며서 몸수색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건 나도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몸을 지킬 수단은 가지고 있으니 남들에 비하면 양반이긴 한데…….’

    사실 ‘그런 의도’를 품고 가지고 온 것은 아니지만, 사무 가방처럼 보이는 이것은 내 호신용품이었다.

    국정원 요원들이 대놓고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시점에서 지난번처럼 갑작스럽게 놈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미래테크에 따로 부탁해서 만든 물건이었다.

    사무 가방 안에는 접이식 단축 기관단총 1정과 개량되어 크기가 대폭 줄어든 센트리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일종의 호신용품 패키지라고 하면 편할 것이다.

    이전처럼 주머니나 품속에 무기를 넣고 다니는 건 너무 티가 나는 데다, 갑작스러운 몸수색을 당하면 나만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을 테니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마련한 대책이었다.

    우선 내 정체가 들통날 것을 우려해 기업 소속 직원들이 뭉쳐 있는 곳이 아닌, 북부 지구 출신들이 많은 일일 근로자 무리에 접근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내가 눈치를 주자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했다.

    북부 지구 거주민들에게 있어서 박한성은 암묵적으로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협조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생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으니까.

    내가 그렇게 하게끔 강제한 것이 아니라, 나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게끔 만들었다.

    북부 지구에서 매번 최고 효율로, 최소 사고 비율로 물자를 가져오는 조직은 차도식파가 유일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껴도 괜찮겠습니까?”

    “아, 안 될 거 없지! 젊은 친구도 이리 와서 한 잔 쭉 받으라고!”

    최근 북부 지구에서 밀주가 유행한다더니, 일일 근로자들 역시 각자 보온병에 너도나도 밀주를 담아 와서 홀짝이고 있었다.

    시골에 내려가면 농부들이 작업 도중에 새참으로 막걸리를 한잔 걸치는 것처럼, 이들 역시 노동 중의 지루함과 피로함을 달래기 위해 밀주를 가져 온 모양이었다.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기에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그들 사이에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이미 오늘 일일 노동은 물 건너간 것 같지만, 정부가 관리하는 곳이라 일당은 제대로 주기 때문에 다들 마음이 편해 보였다. 당연히 일 적게 하고 제 돈 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

    나는 기업 소속 직원이나 유통업자들이 알지 못하는 생산 단지 내부의 일이 알고 싶었다. 이들이라면 잡초나 해충 제거, 혹은 쥐새끼를 잡기 위해 깔아 둔 덫을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현장직인 만큼 현 사태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밖에서 무슨 소란이 일어난 건지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오늘 파견 나온 게 처음이라 아직 이쪽 방면을 잘 모릅니다.”

    “그 뭐시냐…… 생산 단지 안쪽에서 사람이 실종됐다던데?”

    “생산 단지가 워낙 커서 길을 잃었다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더라고. 듣자 하니 처음에 그 직원 찾으려고 다른 직원들까지 보냈었는데, 찾으러 나선 직원들까지 실종됐다는 거야. 그래서 한바탕 난리가 난 거지.”

    “저 하늘에 날파리처럼 날아다니는 드론인지 뭔지 하는 것도 벌떼처럼 모여서 엄청 돌아다니고, 여기 직원들은 CCTV도 막 돌려 보면서 찾아봤다는데도 저들끼리 아무리 찾아봐도 못 찾겠다고 어떡하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더만.”

    “그래서 현장에서 일하던 우리까지 전부 복귀해서 이러고 있지.”

    “보통은 이런 일이 있으면 일당 주고 바로 귀가 조치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우리도 모르지. 아까 직원 한 명이 와서 말하기로는 보안 문제 때문에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달라던데.”

    역시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보고 들은 게 제법 있었다.

    결코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면 상상했던 최악의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우리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좋지. 여기 구내식당도 있어서 때 되면 밥도 주고, 온도도 쾌적해서 여기가 우리 집보단 훨씬 낫거든. 흐흐!”

    “아따, 형님, 무단 외박하면 마누라한테 등짝 날아간다더니 그건 걱정 안 되시고?”

    “아, 국가 공무원이 우리를 잡아 두는데 마누라가 어쩌겠어? 공무집행방해 안 하려고 얌전히 잡혀 있었다고 말하면 되겠지!”

    내가 얻을 건 다 얻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들은 다시 자기들만의 취중 잡담 세계에 빠졌다. 그 와중에 고스톱 패를 가져온 사람이 노름판을 벌이면서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휴게실 창가로 다가간 나는 널찍한 통유리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생산 단지를 바라보았다.

    어디는 밀, 어디는 옥수수, 어디는 벼를 재배하고 있는지라 마치 넓은 도화지에 다양한 물감으로 띄엄띄엄 직육면체를 그려 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인명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바깥의 군대는 내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눈치였으니, 이곳 직원들은 자신들끼리 자체적으로 일을 수습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단 한 사람도 정신병자 살인마, 테러리스트,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기괴한 무언가가 인명 사고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 내부에서 일어난 사고를 은폐하는 건 대한민국 전통이니까.’

    하물며 이곳은 일개 기업도 아니고 정부가 관리하는 곳인데 당연히 사건, 사고에 민감하겠지. 서둘러 내부 단속부터 들어가서 저들끼리 사고를 덮으려 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그저 향후 서부 지구에서 생산될 식량에 대해 미리 알아 두고 싶어서 사전 답사라도 할 겸 방문한 것뿐인데 졸지에 발이 묶일 줄이야.

    일일 근로자들 말대로 밥맛 하나는 끝내주는 구내식당에 가서 끼니라도 때울까 생각하다가, 문득 저 넓은 평야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포착했다.

    생산 단지에서 연기라고?

    “저, 저, 저! 생산 단지에서 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야, 미친!”

    나 말고도 창밖을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는지, 누군가가 굉장히 당황한 어조로 외쳤다. 그러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넓은 창가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미친! 저 밭 한복판에 불이라도 난 거야?!”

    “곡창지대가 워낙 넓어서 화재가 한 번 번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텐데……!”

    “아니, 자세히 보면 화재 연기가 아닌 것 같은데? 불이 났다면 연기가 좀 더 크고 확 번져야지!”

    “그래, 화재 연기가 아니라 좀 다른…….”

    타앙!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온 총성이 이 자리에 모여든 모두의 귓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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