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09화 (109/211)
  • 질서와 필요악(5)

    고급 과자에 대한 건 넘어가자. 나는 관대한 남자니까.

    자연스럽게 내 몫의 믹스 커피를 타서 소파 한구석을 차지하고, 머쓱하게 웃고 있는 그들에게 자초지종 설명부터 받기로 했다.

    “저 없는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또 있었던 모양이죠?”

    커피 믹스 봉투를 반으로 접어서 티스푼 대신 휘휘 저으며 물었다.

    때마침 과자를 다 씹어 삼킨 차도식이 정장 앞섬에 묻은 부스러기를 가볍게 털더니, 내게 양피지처럼 돌돌 말려 있는 스마트 글라스 한 장을 던져 주었다.

    받아 든 스마트 글라스를 펼쳐 들자 [북부 지구 자력 개발 로드맵]이라는 타이틀의 파일이 실행되었다. 투자자 목록, 협력 조직 목록 그리고 가장 먼저 개발이 시행되는 구역 및 개요까지.

    파일을 하나씩 누르면 해당 파일이 멋들어지게 쫙 펼쳐지면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꼭 대학 시절 조별 과제로 PPT 만들 때를 떠올리게 했다.

    가장 먼저 투자자 목록을 눌러 보니 의외로 기업인과 정치인, 그 외 돈 많은 졸부들의 이름이 제법 올라와 있었다.

    그들도 내심 북부 지구는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보다 자력으로 개발하게 놔두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니 초기에 투자해서 나중에 배당금이나 혜택을 더 많이 타 먹으려는 심산인 게 뻔했다.

    ‘하기야, 아무리 밀수 조직들이 떼돈을 벌어들였다고 해도 온전히 밀수 조직들의 자금력만으로 개발 사업을 시작하는 건 힘들었겠지.’

    내가 부탁했던 대로 차도식은 지난날 동안 착실하게 VIP들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면서 특유의 입담과 친화력으로 인맥을 쌓아 온 것 같았다. 그 결과가 이 대규모 투자 유치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협력 조직 목록에는 당연하게도 북부 지구를 대표하는 거대 밀수 조직과 상인 조합, 그리고 군부대가 떡하니 이름을 올려 두었다.

    순수하게 협력 조직 전체의 머릿수만 계산해 보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5천 명이라는 대인원이 나온다. 우리 밀수 조직도 여느 대기업들처럼 하청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조직원이 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같은 밀수 조직들로부터 하청을 받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 북부 지구에 제법 많다.

    대부분 기업에서 내주는 하청을 하러 가지 않느냐고? 그쪽은 일당을 그리 잘 쳐주지도 않는데 일은 더럽게 빡세서 오히려 최후의 보루처럼 여겨지고 있다.

    마치 대한민국 남성이 최후의 최후까지 내몰리면 노가다 판이나 쿠팡 물류 센터 단기 알바를 나가는 것처럼.

    나는 은근슬쩍 다시 고급 과자에 손을 가져다 대는 김명호의 손을 탁 쳐 내고, 아직 남아 있는 과자 하나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고급 과자 특유의 부드러운 단맛과 옅은 짠맛이 혀끝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과자란 건 그냥 버터에 설탕만 때려 박으면 다 맛있는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만 맞는 말이다.

    단맛을 더욱 돋구기 위해 짠맛을 조금 섞는 기법도 있고, 부드러운 단맛이 가능한 오랫동안 여운이 남도록 맛의 깊이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기법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급 과자다.

    내가 이걸 백화점에서 빼내 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실종자 명단에 올라간 당일에 당사자를 제쳐 두고 날름 까먹는단 말인가?

    나 박한성은 차도식파에 실망했다!

    “투자는 둘째치고 각 조직들의 협력은 어떻게 이끌어 낸 거예요? 다들 겉으로는 서로 상부상조하려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자기 조직이 우선인 개인주의 집단인데.”

    “동생 이름 좀 팔았지.”

    차도식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하니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아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럼 제 이름 실컷 갖다 쓰셨으니 이제 로열티를 주셔야겠는데요.”

    “안타깝지만 당분간은 빈털터리야. 다들 이번 사업에 목매고 있어서 허리띠 바짝 졸라야 한다고.”

    “그럼 이자는 연 3할로…….”

    “요즘 사채업자들도 그 정도는 안 떼먹는다.”

    전직 조폭 출신이 그렇다고 하니 사실이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한국인의 대표 음료인 믹스 커피와 찰떡궁합이 따로 없다. 어지간한 고급 입맛을 가진 사람들도 이 조합 앞에선 두 손, 두 발 다 들겠지.

    마지막으로 펼친 개발 시행 구역과 개요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서부 지구와 가까운 공터를 활용하기로 했군요.”

    “그쪽에 지저 도시의 중요 인프라가 집중되어 있으니까. 또한 지저 도시가 식량 자급자족에 성공하면 가장 먼저 식자재를 납품받기에도 적합한 위치 선정이잖아?”

    “그렇죠. 지금의 지저 도시는 중앙 정부가 컨트롤을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 비리를 저지르기에도 안성맞춤인 위치 선정이네요.”

    범죄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까울수록 쉽게, 빈번하게, 은밀하게 발생한다.

    특히나 밀수처럼 몰래몰래, 대담하게 저지르는 범죄일수록 물리적인 거리가 짧아야 한다.

    우리가 당장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도 서울의 일부 지역에서만 물자를 공수해 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논리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용케 개발 허가가 났네요? 보나 마나 서부 지구 측 보안과 기밀 유지를 위해서 일정 거리 내에 민간인 개발 및 접근을 금지할 줄 알았는데.”

    “그거야 높으신 분들이 힘써 주신 덕분에 스리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통과했지. 게다가 표면적으로는 북부 지구의 만성적으로 부족한 주택 공급 문제 해결과 경제 활성화가 사업 목적이야. 서류상으로만 보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오히려 대통령 표창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린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표면상으로는 말이죠.”

    아무리 높으신 분들의 힘을 썼다지만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가 아직 지상에 있을 때에도 경찰과 검찰, 금감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건축물이나 불법 영업장은 판을 치고 있었다.

    특히 공무원이 비리에 가담하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정부가 주변을 감시해도 코앞의 범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표적인 예로 LH의 부동산 투기 비리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일할 수 있는 공무원들의 수가 현저히 적고, 그 프로세스를 지나치게 간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부가 우리의 개발 사업에 숨겨진 음흉한 음모를 눈치챈다?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장 지난날에 우리 밀수 조직들을 잡아 족치지 못한 시점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가? 지금의 중앙 정부는 무능하다.

    ‘정확히는 무력하지.’

    인력, 자금, 주변의 협조. 모든 것이 부족한 정부가 밑바닥에서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는 독충들의 움직임을 어찌 전부 파악하겠으며, 또 어떻게 대책을 강구한단 말인가.

    내정 끝판왕이라 불리우던 제갈공명을 데려와도 불가능한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주택 공급 사업이지만 실제로는 ‘은밀한’ 영업장을 짓기 위한 목적이 다분한 계획이네요. 도로, 수도관, 가스관, 배선을 서부 지구와 연결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왕래를 노리는 중간 거점으로 만들려는 거죠?”

    “바로 그거지. 동생이 이래저래 힌트를 준 게 많아서 사업 초안을 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

    후르르릅.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면서 사업 개요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니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나는 물리력이나 자금력, 인력을 이용해 단숨에 자리 하나를 꿰차고 상대에게 반 강제적으로 협조를 요구하는 방식을 굉장히 싫어한다. 신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상대에게 반감을 살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간에 거점(전초기지)을 마련해 두고 서서히 내 사람, 내 돈, 내 물건을 침투시키면서 하나둘씩 장악해 나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시간과 자금이 많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안정성이 높으며 성공 확률도 굉장히 높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이런 유형의 계획에 동참하는 동업자들은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본전을 되찾기까지 시간이 제법 소요되는 장기 투자 계획에서 본전도 못 찾고 배신할 멍청이는 없으니까.’

    일단 목표를 정하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거리낌 없이 실행해도 문제없는 계획이다.

    침투.

    장악.

    통제.

    심플하기 짝이 없는 3개의 과정만 거치면 그 어떤 것이라도 반드시 내 손에 들어오니까.

    왠지 익숙한 것 같다고? 당연히 익숙하겠지. 우리가 지상에 있을 때만 해도 중국이 이런 방식으로 특정 국가들을 자본, 사상적으로 천천히 잠식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중국과 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중국은 다소 부담이 될 수 있는 외부의 적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고, 나는 거리낌 없이 찔러도 문제가 되지 않는 내부의 적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거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누구도 내가 뒷배라는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북부 지구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몇몇 조직들도 박한성이라는 인물이 북부 지구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니까.

    국정원, 디그러쉬, 기타 등등.

    기껏해야 내가 괜히 수상해 보인다느니, 뭔가 꾸미고 있을 거라느니 같은 근거 없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

    전부 목숨을 담보로 걸어서 맞바꾼 것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 본 적도 없는 풋내기들이 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이건 자랑하는 게 맞다. 내가 좀 잘나야지.

    “각 기업을 통해서 중장비와 건설 자재, 기계나 건설 전문가도 대거 초빙했군요. 계획대로만 잘 진행한다면 내년 중으로 그럴듯한 거점 하나가 나오겠는데요.”

    “내년 중이면 지저 도시가 식량 자급자족에 성공할 거라는 루머가 돌더라고.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우리가 유통 사업을 벌여도 될 것 같은데요.”

    “흐흐, 잘 아네. 북부 지구와 서부 지구 사이에 거점이 자리 잡으면 중간 다리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은밀한 사업을 추가할 수도 있다고. 조폭들도 지상에선 심심찮게 사과 박스(뇌물)나 마약 유통을 하곤 했으니까.”

    “오히려 우리 외에 달리 적임자가 없죠.”

    지저 도시 내에서 추적당하지 않는 은밀한 유통망? 아직은 말뿐인 미래 사업이지만 일단 손에 넣기만 한다면 차도식 코인으로 달 여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지금 동원된 인력과 자본, 장비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전부 납득하고 다른 화제로 넘길 수 있었다.

    “북부 지구 자력 개발 사업 얘기는 대강 알아들었으니 이쯤 하고, 혹시 요 일주일 사이에 디그러쉬에서 뭔가 준비하고 있다, 같은 이상한 뜬소문 같은 거 없었어요?”

    “어, 혹시 지저 도시 외부 탐사 프로젝트를 말하는 겁니까?”

    이번에는 잠자코 있던 김명호가 대뜸 반응했다.

    “그걸 왜 네가 알고 있냐?”

    자신이 보기에도 생뚱맞은 상황이었는지 나보다 차도식이 먼저 되물었다.

    “요즘 밑바닥 놈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합니다. 일 빡세게 하는 하청보다 차라리 지저 도시 외부 한 번 둘러보고 오는 게 더 낫다는 말이 있어서 한탕 챙기려는 놈들이 제법 있답니다.”

    “디그러쉬는 영 불안한데…… 나도 거긴 왠지 느낌이 쎄 해서 일부러 줄 안 댔다고.”

    “밑바닥 놈들이 그런 거 가리겠습니까? 제가 애들 몇 명 풀어서 알아보니 디그러쉬 측에서 최근 영업 직원까지 풀어서 그런 놈들만 공공연하게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보고를 안 했냐?”

    “그냥 여느 때처럼 기업에서 자기들끼리 진행하는 사업인가 싶어서 일단 지켜보던 상황이었습니다.”

    ‘들었지?’ 하는 표정으로 되돌아보는 차도식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여동생과 김명호의 제보.

    각기 다른 세력에 소속된 인물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했으니 교차 검증이 필요해졌다.

    “마침 저에게도 들어온 정보가 있으니 그 건은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이참에 지저 도시가 돌아가는 판도를 좀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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