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08화 (108/211)
  • 질서와 필요악(4)

    힘차고 강한 아침!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박한성!

    “언제나처럼 우중충한 아침이군.”

    오전 10시 40분경에 눈을 뜬 나는 텅 빈 집의 거실에서 배를 벅벅 긁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넓은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여전히 우중충한 지저 도시 내부였다. 햇빛도 없고, 구름도 없고, 그저 도시의 빛이 주변을 조금 밝게 해 줄 뿐인 풍경.

    평생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면 모를까, 갑작스럽게 멀쩡한 하늘을 두고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든 인간들에게 이곳은 적잖이 답답한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최근 지저 도시 내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신 건강 문제로 방문하는 사람도 많다는 모양이다.

    이렇게나 넓은 공간 속에서도 영원히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답답함을 호소한다니,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불편한 동물이구나 싶었다.

    이거 나만 불편해?

    “크, 차게 식힌 매실차도 맛있네.”

    입맛 돋우는 데는 매실차만큼 좋은 게 없다고 했던가.

    레모네이드 대신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매실차를 머그컵에 따라 마시며 힘차게 하루를 준비했다.

    우선 반찬과 국을 데워서 식사를 끝마치고, CF 속 남배우 못지않은 드라마적 연출 기법으로 폭풍 샤워를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외출을 위해 현관 거울 앞에 섰을 때는 무심코 욕지기를 할 뻔했다.

    내 앞에 웬 미남이 서 있었으니까.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외출할 맛이 나지.”

    어서 내 조각 같은 외모를 보고 여자들이 너도나도 번호를 따 갔으면 좋겠다. 지금의 내 연락처는 너무 빈곤하다.

    하지만 주상복합아파트를 나서고, 셔틀버스에 타서 북부 지구까지 향하는 동안 여자에게 번호를 따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내게 말을 걸어오는 여자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삶에 찌든 북부 지구 방위군과 마주쳤을 때가 되어서야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챘다.

    나 역시 그들처럼 삶에 찌든 얼굴을 하고서 오늘 하루도 일용할 양식과 돈을 벌기 위해 어디론가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괜스레 짜증이 나서 옷 앞섬을 적당히 풀어헤쳤다. 그래도 기보 좀 살리려고 캐주얼한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맸건만, 다 쓸모없어졌다.

    여느 때처럼 차도식 병원에 들러서 업무는 잘 돌아가고 있는지, 혹시 수익을 삥땅 치거나 농땡이 부리는 놈이 없는지 확인했다.

    의료인들은 언젠가 정식으로 지저 도시 시민권(ID 카드)을 발급받게 되는 그날까지 게으름 피울 생각은 없는 듯, 매우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보통 권위 의식으로 똘똘 뭉친 의사들은 환자에게 조금 딱딱하게 구는 경향이 있는 것에 비해, 차도식 병원 의사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이게 유일한 밥줄이라는 걸 이해한 것이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더 나은 법이니까.’

    의료인들을 도와 간단한 사무, 접수, 안내, 청소 등을 맡고 있는 차도식파 조직원들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상 작전을 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쉬운 일이라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차도식 병원은 차도식이 엄선한 놈들만 보내서 일을 시키는데, 이 ‘꿀직장’을 놓치면 조직 내에서도 험한 일을 맡게 되기 때문에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이다.

    ‘병원은 이대로만 유지하면 수익 걱정은 없겠군. 조만간 규모를 더 확장하는 것도 검토해 봐야겠어.’

    건물과 토지만 확보한다면 추가 의료기기나 병상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밀수범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물건들이라 지상 작전 중 아무 병원이나 들러서 적당히 가져오면 된다.

    중요한 건 더 이상 지상의 공장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의약품, 그리고 그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의료인 확보다.

    ‘의료인도 지상에서 확보해 둔 전초기지를 통해 알아본다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거야.’

    의료인은 시국이 시국인 만큼 굉장히 귀중한 인재지만, 그 의료인이 안전한 지저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면 밀입국을 주선해 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의약품은 올해까지라면 어떻게든 약국과 병원을 터는 것으로 부족한 양을 충당할 수 있겠지만, 당장 내년부터 걱정이다.

    일단 지저 도시 내부에도 약물 생산 공장이 존재하긴 하지만, 생산할 수 있는 의약품 수가 그리 많지도 않을뿐더러 생산된 물량을 우리가 떼 올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부족한 게 너무 많아.’

    환자로 위장해 병원 내부를 적당히 둘러본 나는 마지막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너희들이 보기에 20~30대의 젊은 사람이 크게 아파 보이지도 않는데 병원을 방문했다면 반드시 감시를 붙여 둬. 만약 어딘가 불편해 보여서 방문했다고 해도 젊은 환자라면 일단 담당 의사에게 말해서 진단 기록을 따로 떼 놓으라고 해. 정말로 병원을 방문할 만큼 몸이 안 좋은 환자였는지 알아야 하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묻는 조직원에게 나는 솔직하게 ‘국정원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서, 그냥 적당히 존재하지도 않는 라이벌 조직을 언급했다.

    “우리가 이렇게 잘나가고 있는데 다른 조직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겠냐? 당연히 젊은 놈들을 적당히 환자처럼 위장시켜서 정탐을 보낼 거 아냐. 이 병원 주 손님층이 대부분 40대 이상 중년, 노년층이기도 하고.”

    “아, 조직들끼리 상대편 영업장에 정탐꾼 보내는 건 흔합니다. 나중에 교대 근무자에게도 말해서 단단히 주의시켜 두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모르는 척하면서 감시를 하란 말이야.”

    “저희가 영업장 굴려 본 짬밥이 얼만데요. 맡겨만 주십쇼!”

    “새끼야, 여긴 영업장이 아니라 병원. 너흰 지금 직책상 건물 경비원이지 주먹질이나 하면서 어깨 세우고 다니는 깡패가 아니라고.”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수상쩍은 놈은 CCTV로 얼굴 따 놔. 모자나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온 놈들은 ID 카드 제출 기록 확인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고.”

    “예. 그것도 따로 전달해 두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사실 이렇게까지 주의를 해도 일반인이 작정하고 숨어드는 정보기관 요원의 꼬리를 잡기는 힘들다. 워낙 용의주도한 놈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될 것을 우려해 일반인을 정보원으로 포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추잡한 방식까지 사용한다면 아무리 주의해도 결국 차도식 병원 내부 보안이 뚫리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경비 인원을 대폭 늘리자니 오히려 낭비일 것 같고.

    ‘이럴 때 디그러쉬가 사용하는 그 감시용 드론 좀 갖다 쓸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하필 디그러쉬란 말이지.’

    아버지가 디그러쉬 중역이란 것을 제외하면 딱히 접점도 없고 부딪친 적도 없는 기묘한 글로벌 대기업. 대한민국의 대표 대기업이라 알려진 미래그룹조차 한 수 접어 주는 그놈들과는 묘하게 엮이기가 싫다.

    설령 아버지가 디그러쉬 중역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먼저 디그러쉬에 접근하는 일은 없었을 만큼.

    차도식 병원을 빠져나온 뒤, 곧장 차도식파 거점으로 향하지 않고 중간에 공구리파가 운영하는 정비소에 들렀다.

    내가 지저 도시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이 이미 퍼졌는지, 공구리파 조직원들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상도 아재 덕분에 공구리파와 꽤 친분이 있었다.

    “마침 점심 먹으려던 참인데 젊은 친구도 같이 할텨?”

    “아, 전 집에서 먹고 나왔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하! 요즘 사람답지 않게 젊은 친구가 참 예의가 발라. 그럼 가볍게 한잔하는 건?”

    “웃어른이 주시는 건 받아야죠.”

    “고럼, 고럼! 쩌어기 아랫마을 김씨가 탁주를 만드는데 맛이 아주 기가 막혀!”

    정비소에서 기름때를 묻히며 일하던 아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반주상 앞에 앉혔다.

    식사라고 해 봐야 주로 레토르트 식품에 몇 가지 반찬을 더한 것이 전부였는데, 다들 이렇게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게 어디냐며 마냥 좋아라 했다.

    특히 공구리파는 아재 비율이 상당하다 보니, 조직 우두머리가 고된 노동을 하는 작업자들을 독려하기 위해 매일 일정량의 탁주를 배급한다고 한다.

    지상에 있던 시절 시중에 팔던 막걸리보다 훨씬 더 싸구려틱한 느낌의 수제 탁주는 주로 배급 쌀이나 지상에서 공수해 온 쌀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먼 옛날 농부들이 마시던 그 탁주가 맞다.

    물론 너무 취하면 자칫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배급량이 굉장히 적지만, 정비소 노동자들은 대부분 술 한 잔 가볍게 입에 적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정비소 구석에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레토르트 식품과 탁주 한 잔을 가볍게 곁들이고, 자연스럽게 정보 및 의견을 교환했다.

    정비소의 아재들이 원하는 정보는 주식처럼 앞으로 가치가 오르게 될 식품이나 생필품의 정보였고, 내가 원하는 정보는 현재 정비소가 만들 수 있는 부품이나 무기 정보였다.

    지저 도시의 경제를 훤히 꿰고 있는 나는 정비소 아재들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소소하게 던져 주고, 정비소 아재들은 내 상상력과 약간의 현실성이 가미된 의견을 바탕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동생은 그냥 재료만 갖고 와도 돼! 우리가 딱 원가만 받고 다 만들어 준다니까?”

    “그러면 남는 게 있어요?”

    “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동생 부탁은 무조건 들어줘야지! 상도 형님도 동생한테 이것저것 신세 많이 졌다고 하더만!”

    “그럼 나중에 정식으로 의뢰서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맡겨만 두라고.”

    그들과 짧은 점심시간을 보낸 나는 마지막으로 정비소를 떠나기 전, 혹시라도 북부 지구에서 본 적 없는 젊은 놈이 갑자기 찾아와서 일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주의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각 조직 간의 새로운 인력 유입은 이미 끝물인 거 아시죠? 이미 대부분의 조직이 안정화된 상태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로운 인력이 갑작스럽게 들어올 일은 거의 없어요. 갑자기 그런 사람이 찾아온다면 일단 주의하시는 게 좋아요.”

    “그 뭐시냐, 간첩일 수도 있으니께?”

    “쉽게 말하면 그렇죠. 형님들 기술 빼먹고, 조직에 몰래 숨어들어서 중요한 정보나 물자를 들고 나를 수도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새로운 인력은 조직원 추천제로 받으세요. 얼굴 모르는 놈보단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 우리도 생판 모르는 놈이 기어들어 오면 괜히 불편하기도 하고…….”

    “상도 아재한테도 전해 주세요.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라고!”

    아재들의 격한 배웅을 받으며 정비소를 빠져나오니 어느덧 오후 1시가 넘은 뒤였다.

    점심시간이 막 끝날 때인 지금, 지저 도시에서 일하는 인간들 대부분은 식곤증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태양이 없어도 식곤증에 시달린다는 게 참 우습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보니 따스한 햇볕이 없는 지저 도시에서도 그 감각을 기억하며 식곤증을 느낀다.

    이제는 제2의 집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차도식파 거점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조직원들이 나를 격렬하게 반겨 주었다. 내가 지저 도시에 복귀했다는 소식은 다들 들었을 텐데, 며칠 보지 못한 게 그렇게나 아쉬웠던 것일까?

    “그런데 오늘은 지상 작전을 나간 것도 아닌데 거점에 남아 있는 인원이 좀 적다?”

    “아,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지금 북부 지구 자력 개발 사업 때문에 최소 인원 빼고 전부 노가다 중입니다.”

    “일단 얘기는 들었는데 확 와닿지는 않더라고. 내가 자리를 비운 일주일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자세한 건 도식이 형님께 들어 보셔야겠지만, 일단 제가 들은 바로는 각 조직의 장들이 합심해서 공동 투자를 했답니다.”

    “누구 주도로?”

    “그야 도식이 형님이지요.”

    “그건 다행이네.”

    만약 다른 사람의 주도로 차도식이 공동 사업에 끼게 되었다면 나는 그에게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기획한 사업은 원래 사업에 끌려 들어온 사람들만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차도식이는 속는 쪽이 아니라 속이는 쪽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각 잡고 공동 투자해서 인력과 장비를 대거 끌어들인 걸 보면 차도식도 밀수 끝에 미래가 없다는 걸 안 모양이지.’

    밀수로 당장 부족한 걸 메꿀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영원할 수는 없다.

    지상에 존재하는 물자는 한정적이고, 또 물자를 가져오기 위한 리스크도 굉장히 크니까.

    그래서 차도식은 지금 여유 자금과 인력이 넘칠 때 개발 사업을 시작하는 게 나은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계속 미루고 미루다 보면 결국 흐지부지 무산되는 게 사업이라는 놈이니까.

    그리고 북부 지구 자력 개발 사업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 나는 어제 여동생이 알려 준 디그러쉬의 지저 도시 외부 탐사 계획이 갑자기 떠올랐다.

    비슷한 프로젝트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는 것이 참 묘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품으며 차도식의 집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었다.

    집무실 내부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는데, 무려 차도식과 김명호가 나 몰래 고급 과자와 커피로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씨발! 그건 축하할 일 있을 때 다 같이 먹자고 했던 과자 아닙니까!”

    내가 그거 가져오려고 백화점을 얼마나 뒤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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