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05화 (105/211)
  • 질서와 필요악(1)

    ‘골판지중장갑보병이 나타났다!’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해서 딱히 내 인생 커리어에 흠집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냥 살짝 부끄러운 흑역사 하나가 추가된 것뿐이지.

    어찌어찌 서울역에 간신히 복귀한 내가 따스한 난방 온기와 미지근한 연민이 담긴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을 무렵, 내가 63빌딩에 두고 왔던 알파 대원들도 속속 복귀했다.

    그들은 내가 어쩌다 골판지중장갑보병 신세로 서울역에 먼저 복귀했냐는 사실보다, 대체 한강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더 궁금한 것 같았다.

    뜨끈한 믹스 커피를 마시며 심신의 안정감을 되찾고 있던 나는 다시 한강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이런 놈들이라도 살려 보겠답시고 수십 마리가 넘는 나이트워커들을 이끌고 한강까지 가서 처리해 줬더니만, 돌아오는 게 아랫것들의 참새 같은 쫑알거림 뿐이라니. 내가 군 생활 하던 시절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됐잖아? 뭐가 그리들 불만이야?”

    “한강을 아주 개박살을 내 놓으셨던데요! 덕분에 주변에 그 괴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마포대교로 우회하느라 진땀 뺐습니다!”

    “진땀만 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내가 그 지랄 안 해 놨으면 너흰 지금쯤 한강 밑바닥에서 비트코인 80층 탑승자랑 짝짜쿵 하고 있었을걸?”

    “저희가 한창 작업 중일 때 아래에서 뭔가 난리가 났다는 걸 느끼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뭘. 사실은 봉인되어 있는 줄 알았던 63빌딩에도 나이트워커가 있었고, 그놈들을 끌고 바깥으로 나가려다 다른 놈들까지 세트로 유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한꺼번에 처리했지.”

    처리 방식이 좀 과격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설마 나도 영하 25도에 한강 다이브를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사상자 없이 다들 무사히 복귀했으니 다행이네.”

    추성훈에게서 데이터가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랩탑을 받아 든 최진석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사실 처음 최진석이 이 자리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안면을 후려갈길까 고민고민했는데, 역시 그건 조금 미뤄 두기로 했다.

    63빌딩에 정확히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이런 풋내기들을 내게 달아 준 게 단순히 조심성 없는 성격이라 그랬던 건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자신의 팀원들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그 장소에 대한 탐사를 해 보고 싶었을 만큼 탐욕적인 성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조심성 없는 성격이었다면 무턱대고 중장갑보병을 10명 이상 투입시켰을 테니까.

    나는 최진석 또한 그 나름대로의 신념과 사상을 가지고 이 험난한 지상을 살아가는 야심가라고 판단했다. 혹은 그냥 미친놈이거나.

    ‘어느 쪽이든 나는 그냥 이득만 취하면 돼.’

    이득을 취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다 보면 언젠가는 싫어도 남들 위에 서게 된다.

    승부와 게임, 경쟁의 공통점은 이기면 이길수록 위로 올라가게 되는 시스템이다. 그 절대적인 시스템에서 도태된 자들을 우리는 흔히 ‘낙오자’나 ‘패배자’라고 부른다.

    최진석은 나를 알고, 나도 이번 기회에 최진석을 알았으니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불가침 영역을 정했을 터. 그는 내가 가진 63빌딩 물자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 줄 것이다.

    ‘저 모습을 보니 처음부터 물자 따윈 관심도 없었던 것 같지만.’

    이대로 차도식파가 63빌딩을 통째로 꿀꺽해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서울역이라는 꿀무지를 한 손에 거머쥐었으며, 서울 생존자 그룹은 서울역을 중심으로 거래나 협력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같은 군인들이 어째서 서울역에 합류하지 않았는지 안 봐도 뻔했다.

    병사보다 높은 계급을 극도로 혐오하는 최준석의 특성상, 군 고위 간부가 이끄는 타 군부대의 서울역 합류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겠지.

    아마 자발적으로 꼬리를 내리고 왔다고 해도 군 간부만큼은 직접 처형하고 병사나 장비를 흡수하지 않았을까 싶다.

    군 간부에 대한 이유 없는, 극렬한 적의. 충분히 이해가 된다.

    중장갑수색대와 중장갑타격대는 모두 최고 상급자가 대통령이었던 만큼 군 간부들과의 접점은 굉장히 적었지만, 목숨을 거는 건 결국 우리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지도 않으면서 병사한테 꼽이나 주고, 자질구레한 일을 시키고, 마음에 안 들면 휴가 제한이나 외박 제한을 걸어 대는 군 간부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지.’

    당연히 우리는 그런 부조리를 당하지 않았지만, 같은 군인 출신이라면 공감대 형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실제로 당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당한 것처럼 느끼는 그런 거.

    최준석은 바로 그 부분에서 이상할 정도로 과몰입을 하고 있는 거다.

    대충 그의 정신 상태가 영 건강하지 않다는 식으로 짚고 넘어간 다음, 다시 체력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내가 목숨처럼 챙겨 온 배낭 속에는 디그러쉬제의 튼튼한 녹음기 3개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활동 장비는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 그러니 서울역에서 장비를 보급받고 지저 도시에 복귀할 계획이다.

    물론 서울역을 떠나기 전에 롯데호텔과 서울역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울역은 아무래도 잡일을 해 줄 노동력이 조금 부족해 보이니, 롯데호텔의 민간인 노동력을 대량으로 알선시켜 주면 합당한 대가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하루를 더 쉬고 장비를 보급받아서 서울역을 떠나기 전에 최준석에게 그런 얘기를 꺼냈더니, 그 역시 서울역과 인근 지역을 완전히 복구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는 부분을 인정했다.

    물론 롯데호텔에는 군 간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있는 노동력은 민간인으로 한정 지었다.

    군인, 소방관, 경찰들은 특별히 외주 형태로 일을 맡기면서 별도의 보수를 지급할 것이라고 하니, 서울역을 기준으로 주변이 빠르게 안정화될 것 같았다.

    ‘서울역이라는 맛있는 요리가 완성되기까지 빠르면 몇 개월도 안 걸리겠군.’

    지저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생존하고 발전을 꾀하는 서울역을 뒤로한 채, 나는 홀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남이 고생해서 만든 요리가 가장 맛있는 법이다.

    * * *

    도합 일주일이라는 대장정을 거치고 북한산에 홀로 복귀한 나는 격벽 앞에서 차도식파와 달가운 해후(邂逅)를 나눴다.

    그런데 이번에 격벽을 나선 차도식파 조직원들의 수는 굉장히 적었는데, 조직원 중 한 명이 말하길 자신들은 차도식파 전초기지에 정기적으로 점검 및 거래를 나가는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럼 물자 수색과 지역 정리를 담당하는 본대는 어디서 뭘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것은 지저 도시에서 2030년 버전 새마을 운동을 하고 있다는 기괴한 대답이었다.

    정기적으로 나와서 지상의 물자를 확보하는 대신, 조직원 대다수를 지역 개발에 투자해야 할 만큼 지저 도시의 일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전초기지 점검과 거래를 담당하는 소수 인원을 그대로 떠나보낸 나는 굉장히 넓은 엘리베이터에 혼자 앉아서 복귀했다.

    12km라는 막대한 높이의 땅굴을 혼자 내려가면서 느낀 감상은 정말 별것 없었다. 에베레스트 산맥보다 훨씬 더 높은(깊은) 이 초대형 땅굴을 오르내리는데 워낙 익숙해진 것이다.

    전력을 아끼기 위해 엘리베이터 내부 전등은 모두 꺼 두었기 때문에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덜컹덜컹하고 고속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말없이 어둠이 걷히고 빛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지금 이 경건한 마음가짐은 수도원의 사제들과 비슷한 무언가가 아닐까 하는 잡생각 따위를 하면서.

    “엘리베이터 개방!”

    익숙한 북부 지구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남부 지구 엘리베이터로 복귀했기 때문일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조금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직 규모도, 하다못해 팀 규모도 아니고 혼자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미친놈이 대체 어디 있냐고 생각 중이겠지.

    “다들 수고하십니다. 금일 복귀자 명단에 차도식파 소속 박한성이라고 써 주세요.”

    “어, 차도식파 소속 박한성 씨라면 일주일 전에 나가서 복귀하지 못한…… 설마 지금 돌아오신 겁니까?”

    “일이 일이다 보니 혼자만 늦게 돌아왔네요. 아무튼 사정이 있어서 복귀가 늦었던 것뿐이니까 실종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면 지금 지워 주세요.”

    차도식파 조직원들에겐 내 실종 기준을 일주일로 잡아 두라고 했기 때문에, 딱 일주일째가 된 오늘 실종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ID 카드와 지문 인식기로 내가 박한성 본인임을 인증하자, 인원 파악을 하는 군인이 서둘러 실종자 명단을 수정했다. 예상대로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지상 파견 임무는 심신을 크게 지치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호텔과 서울역에서 각각 한나절을 편하게 휴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걸 보면, 역시 보약 한 첩이라도 지어 먹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집을 자주 비우는 건 이제 일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나 여동생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동생에겐 내가 사정을 설명해 두었고, 또 어머니를 걱정하는 여동생이 한 번 더 내용을 걸러서 알려 드렸을 테니까.

    아버지는 여전히 디그러쉬에서 일만 하느라 바쁠 테니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 쪽에서 내게 관심을 접어 주는 게 더 고마울 정도다.

    남부 지구는 군인들의 24시간 경계 시스템이 조금 완화되었는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군인보다 주민들이 좀 더 많았다.

    또한 요 일주일 사이에 남부 지구에도 지상에서 들여온 물자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경기가 훨씬 활발해진 것을 느꼈다.

    당장 사람들의 휴식터 취급만 받고 있던 카페는 이제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앉아서 사제 커피나 음료를 마시고 있었고, 음식점마다 맛있는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지상에서 들여온 물자들 중 식재료 비중이 유독 높았는지, 삭막하기만 했던 거리에 조금씩 생활감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윗대가리들이 이 광경을 보면 자신들의 식량 공급 정책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착각하겠군.’

    이미 정치인들이 우리에게 크게 한 번 데인 상황이기 때문에 포인트 거래량이 확 늘어나도 저쪽에서 크게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드디어 이 지저 도시에 법에 의한 표면적인 질서와 밀수라는 이름의 필요악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이대로 지저 도시가 완벽하게 자급자족과 자기발전이 가능한 상태가 되기 전까지 꿀을 빨면 상당한 이권을 챙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나는 전방에서 휘적휘적 걸어오는 검은 정장 차림의 회사원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슬쩍 몸을 틀었다.

    겉보기에 위험한 장비는 모두 배낭 속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지저 도시에서 하이킹을 즐기는 이상한 놈처럼 보일 뿐이다.

    점심 시간에 굳이 VIP들이 거주하는 남부 지구를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회사원만큼이나 의심할 건더기가 없다는 얘기다.

    내가 정장 차림의 회사원과 비스듬하게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내 옆구리를 파고드는 차갑고 묵직한 금속 재질이 느껴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총부터 집어넣고 얘기하지?”

    나는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손을 슬쩍 빼며 말했다.

    내 손에는 세열 수류탄이 쥐여 있었다. 핀이 뽑힌 상태로.

    “방아쇠에 손가락 갖다 대면 알지? 여기서 함께 폭사하는 거라고.”

    “그럴 배짱이 있으십니까? 저야 방아쇠만 당기고 빠르게 몸을 빼면 그만이지만, 그쪽은 수류탄을 놓치기라도 하면 혼자 터져 죽을 텐데요.”

    “멍청한 소리. 여기가 북부 지구도 아니고 VIP들이 거주하는 남부 지구인데 CCTV가 없겠어? 기존에는 원자재나 식재료가 없어서 닫혀 있던 가게들이 장사를 시작했는데 당연히 전기 아끼려고 꺼 두었던 CCTV도 잘 돌아가고 있겠지?”

    “지저 도시에서 사람을 찾는 건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듭니다. 일단 도망쳐서 숨기만 하면 절대로 찾을 수 없죠.”

    “하지만 앞으로 그쪽이 뭘 하려고 해도 일에 차질이 생기겠지. 도심 내에서, 그것도 VIP들이 거주하는 남부 지구에서 총성과 함께 수류탄이 터지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난리도 그만한 난리는 없을 테니 적어도 그쪽 전체가 5년 이상은 백수로 지내야 할걸?”

    거리 한복판에서 자연스럽게 멈춰 선 우리는 1m도 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서로를 향해 총과 수류탄으로 허세와 위협을 아낌없이 투사했다.

    어디 대기업에 들어가면 얼굴 간판으로 곧잘 쓰일 것처럼 생긴 눈앞의 기생오라비는 곧 비릿한 미소를 흘리더니, 검은 정장 안쪽에 숨겨 둔 권총을 슬그머니 내렸다.

    “이거 본의 아니게 실례한 것 같습니다.”

    “실례인 줄 알면 다음부턴 조심 좀 하지. 서로 거리 한복판에서 무연고자 시체가 되긴 싫잖아?”

    내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그리 답하자 눈앞의 청년은 여전히 알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박한화의 아들 박한성이 거리 한복판에서 테러를 자행하다 스스로 자폭했다고 알려지면 가족분들에 대한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뒤숭숭한 시국인 만큼 서로 조심해야 할 게 많습니다.”

    수류탄의 안전핀을 도로 끼워서 터지지 않게 한 다음, 서로 간에 면식도 없는 상태로 만난 지 3분이 경과한 후에야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차도식파에서 유령 회사로 세운 법인 소속의 적당한 직원 명함, 상대 쪽은 직급도, 소속 회사도 없이 ‘최연호’라는 이름만 쓰여 있는 백색 명함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나와 같은 범죄자 조직이 아닌, 정부 기관 소속 요원임을 눈치챘다.

    정부가 급하게 지저 도시에 끌고 들어온 정부 기관 소속 요원이라고 해 봤자 수는 적을 테니, 자연스럽게 범위가 좁혀진다. 게다가 이미 정황증거도 수두룩하고.

    ‘국정원이군.’

    언제 오나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