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104화 (104/211)
  • 기생체(5)

    사람이 인생의 불합리를 느끼는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나만 SSR 캐릭터가 안 떴을 때? 아니면 나만 ‘해빔소스’에 ‘조순튀’를 먹어야 할 때? 전부 틀렸다.

    그건 바로 영하 25도 기온에서 한강 한복판의 얼음물 속에 빠졌을 때다.

    ‘타이타닉 영화는 순 구라쟁이들이 만든 영화였어!’

    대체 어떻게 얼음물 속에서 그렇게나 오래 버틴 겁니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혹시 그건가? 사기적으로 잘생긴 사람이면 특별히 얼음물 속에서 10분 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는 특수 능력이 발동하는 건가? 그런데 왜 내 특수 능력은 발동할 기미가 안 보이지?

    전신을 파고드는 맹렬한 냉기와 얼음물은 마치 수만 개의 바늘처럼 내 피부를 인정사정없이 찔러 댔다. 물에 빠지자마자 쇼크가 오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총이고 뭐고 무거운 물건은 다 풀어헤친 나는 펑퍼짐한 배낭의 부력을 이용해서 최대한 수면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두둥실 떠오르고 나니 바깥의 찬 공기가 내 명치에 추가타를 후려갈겼다.

    아예 확인 사살이라도 할 작정인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를 단숨에 잘생긴 얼음 석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악의가 느껴졌다.

    “푸흡! 크! 씻팔!”

    가장 가까운 빙판까지 열심히 헤엄쳐 가서 손에 쥔 대검을 힘껏 박아 넣었다. 거의 암벽등반을 하듯이 대검을 조금씩 찍어 가며 빙판 위로 올라왔다.

    다행히 빙판이 제법 두꺼웠기 때문에 2차 균열 같은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바다 한복판에서 꼬르륵 해 버렸지만 박한성은 살아남았다!

    “히익, 히익, 히익……!”

    물을 먹은 건 둘째치고, 몸이 빌어먹게도 무거웠다.

    피부나 옷에 묻은 물기가 빠르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여기서 몸을 녹이지 못하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것이다. 아름답게 꼬르륵한 디카프리오와 반대로 추하게 덜덜 떨면서 죽는 것이다.

    ‘지랄! 내가 디카프리오보다 못한 게 뭔데!’

    기껏해야 신체 비율이나 골격이나 피부나 오목구비가 좀 안 되는 것 빼면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수십 미터 너머, 한강 북부 방면을 바라보았다.

    압박을 강하게 해 둔 고글 내부까지 물이 차진 않아서 시야만큼은 깨끗했다.

    급격한 추위에 노출되었을 때 저체온증을 피하려면 따스한 온기 속에서 몸을 녹여야 하는데, 마땅한 온기가 없다면 자체 생산으로 가야 한다.

    잠시 제자리 팔벌려뛰기로 굳은 관절과 수축된 근육을 억지로 풀어 준 다음, 물이 차지 않은 배낭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죽어라 달렸다.

    추위 속에서 가장 보호해야 할 신체 부위는 다름 아닌 머리다. 머리에 의한 열 손실이 동사 위험을 대폭 높이기 때문이다.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추위 속에서 입이 비뚤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심히 욕지거리를 하며 빙판 위를 내달렸다. 단순히 춥고 날카롭기만 했던 바람은 정말로 칼날이 되어 내 몸을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여기서 멈추면 뭘 하든 무조건 얼어 죽을 테니까. 게다가 1분 1초라도 더 빨리 한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쿨럭! 쿨럭! 쓰읍!”

    입에서 토해낸 것은 희끄무레한 색의 물이었다. 완전히 검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투명한 것도 아닌, 조금 색이 옅은 흙탕물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폭탄을 좀 과하게 터뜨린 모양이다. 그만한 폭발과 충격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으니 한강 밑바닥 벌까지 뒤흔들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나름 계산해서 터뜨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내가 서 있던 빙판까지 무너질 줄이야.’

    진짜 불합리를 느낀 것이 바로 그때였다.

    물에 빠지기 전에 본 것은 정확히 내가 서 있던 빙판까지만 무너지는 광경이었으니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울며 겨자 먹기, 젖먹던 힘까지, 죽자사자,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도 표현이 부족할 것 같은 나의 처절한 몸부림은 강둑을 기어 올라와 한 편의점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겨우 끝났다.

    이 편의점도 이미 진즉에 누군가 털어 간 흔적이 역력했지만, 대부분은 식량과 음료만 털어 가는 데 급급했는지 세면 용품이나 도구 종류는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개중에는 가을 시즌을 맞이해 슬슬 편의점 점장들이 꺼내 두기 시작했던 핫팩 상자도 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편의점에서 핫팩 상자 하나를 소중하게 껴안고 음료 창고로 기어 들어가는 내 뒷모습은 얼마나 추해 보였을까.

    배낭 안에 핫팩을 터뜨려서 밀어 넣고, 젖은 옷은 즉시 벗어서 맨몸 체조를 시작했다. 젖었다기보단 얼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리고 한참 전에 감각이 사라진 부위부터 맨손으로 미친 듯이 문질러 가며 서서히 감각을 회복시켰다. 감각이 없을 때 섣불리 열기를 쬐면 자칫 화상을 입을 위험이 있었다.

    몸의 감각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때, 나는 핫팩을 터뜨려 둔 커다란 배낭 속에 기어 들어갔다. 남은 핫팩도 전부 터뜨려서 젖은 옷 위에 올려 두었다.

    “씨이이이이이이발.”

    지금의 내 기분을 딱 한 문장으로 설명하겠다.

    추운 날 야간 근무 끝마치고 돌아와서 육개장 하나 조질 때의 기분 500배.

    보이십니까, 꼬르륵좌? 당신은 바다 한복판에 가라앉았지만 전 살았습니다!

    ‘이걸 살았다고 하는 게 맞는지는 제쳐 두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금 내 상황은 매우 안 좋다.

    대검을 제외한 무기 및 신호탄 발사기 없음. 외골격 파츠 없음. 무전기 없음. 야간 투시경 없음. 멀쩡한 옷 없음.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소량의 식량과 식수, 전등 배터리 같은 것도 롯데호텔에서 일을 겪으면서 거의 다 써 버렸다.

    난데없이 이세계에 떨어져도 이것보단 생존하기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손전등으로 창고 내부를 살폈다.

    나는 보통 총 하단 레일에 달아 둔 조명이나 헤드램프를 사용하는 편이라 손전등은 그냥 처박아 두기만 했는데, 막상 이런 식으로 쓰일 상황이 올 거라곤 예상 못 했다.

    여느 편의점이 다 그렇듯, 이 편의점 창고 역시 잔뜩 쌓인 골판지 상자와 자잘한 도구가 전부였다. 커터칼이나 테이프, 볼펜 같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찌꺼기들.

    하지만 지금의 내겐 저것만큼 더 좋은 것도 없었다.

    노숙자들이 어째서 한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갓판지 상자 님께서 영원한 빛으로 노숙자들을 지켜 주기 때문이다.

    핫팩으로 적당히 말린 옷, 잔뜩 쌓인 골판지 상자, 커터칼, 테이프.

    나는 2030년 겨울 시즌, 서울 한복판을 강타할 새로운 패션을 떠올렸다.

    ‘서울역까지 얼어 죽지 않고 가려면 그 방법뿐이야.’

    나는 살 수만 있다면 기꺼이 패션계의 이단아가 되기로 했다.

    * * *

    “피해 보고는?”

    “그것이…….”

    “아니, 모르는 사람이 말고 아는 사람이 말해야지. 계속해, 신 부장.”

    “예, 우선 연구소 인원 중 경비원 두 명과 선임 연구원 한 명이 공식적으로 사망, 연구소 동쪽 구역 대규모 오염 그리고 향후 시설 정상화 전까지 모든 생명공학 관련 연구 스케줄이 무기한 연기됩니다. 일단 저희 측에서 파악한 사후처리 견적만 보면 그렇습니다.”

    “뼈아픈데. 이게 미래그룹 아래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어떻게 생각해?”

    “이런 자리에서 말을 조금 험하게 하게 되는 것을 미리 사죄드리겠습니다. 연구소장이라는 작자가 중요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는 건 제 목을 쳐 달라는 의미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건 사실이잖습니까.”

    “…….”

    차세대 장비 개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신형석 부장이 사형수처럼 덜덜 떨고 있는 연구소장을 흘겨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진혁 본부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전에 손님으로 이곳에 방문한 박한성 씨의 요청에 따라 차세대 장비 개발 부서에서 개발한 신소재 방호복을 착용시킨 진압부대로 내부 정리를 끝마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상자 및 부상자는 일절 없었으며, 귀중한 샘플을 취득하여 현재 별도의 보관 시설에 격리 보관 중입니다.”

    “즉 연구소 측에선 실질적으로 한 게 없다는 사실이네? 부하 관리 미흡, 시설 관리 부실, 오염 방지 실패, 거기에 사상자 발생까지? 이야, 우리 연구소장님 한 게임으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셨어―.”

    미래그룹 현 총수의 손자, 운 나쁘게 명을 달리 한 제 아비를 제치고 당당하게 미래그룹을 책임질 차세대 그룹 총수.

    대체 속에 무엇을 더 감추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인 같은 존재가 연구소장의 멘털을 손톱으로 조금씩 조금씩 파내고 있었다.

    “제, 제가 다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본부장님!”

    “무려 그랜드 슬램인데 기회라…… 그래, 한번 말해 봐요.”

    “제가 자리를 비웠던 것은 연구소장 스케줄상 당연히 정해져 있던 업무였습니다. 빠지고 싶다고 해서 빠질 수도 없는 것이었고,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스케줄 변경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보안 체계와 연구 체계는 모두 제대로 확립해 두었기 때문에 통상적이라면 그런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통상적이지 않은 사건은 예상도 안 했다는 거네? 그게 원자력 발전소 관리자가 멜트다운을 상정해 두지 않았다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인류 역사상 멜트다운이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생물학적 재해 사건이 터진 연구소도 분명 하나둘 쯤은 있지 않겠는가. 설령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고 업무차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업무가 아니었을 텐데. 그렇지 않나요, 신 부장?”

    “예. 보건부 차관과 그냥 식사를 하고 스파 시설에 들려서 사우나 및 마사지를 받은 게 전부였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과 업무 때문에 만난 것까지는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게 사심이 다분히 섞인 만남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

    “그렇다네.”

    신 부장이 자신의 일과를 모두 다 꿰고 있는 것도 모자라 술술 불어 대자 연구소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려 댔다.

    사실 보건부 차관과 식사를 하는 것은 정계와 재계 간의 직, 간접적인 소통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민감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정보 교환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VIP들을 위해 마련된 고급 시설에서 실컷 즐긴 탓에 연구소로 돌아오는 게 늦었던 그의 실책만큼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이진혁이 턱짓을 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연구소장의 양팔을 잡아서 끌고 나갔다.

    그는 마지막까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울부짖었지만, 그 추한 발버둥도 두꺼운 집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싹 사라졌다.

    “그래서 이번 피해로 우리가 얻게 된 소득은? 손실만 있었던 건 아닐 것 아니에요.”

    “일단 크게 보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신소재 방호복의 뛰어난 효율, 그리고 지금껏 본적 없었던 기괴한 생명체에 대한 샘플 확보, 마지막으로 그 생명체와의 전투 데이터 확보입니다.”

    “신소재 방호복만 빼면 외부에 팔아넘기기 힘든 것들뿐인데. 우리 쪽에서 감당할 수 있겠어요?”

    “검역 절차를 끝낸 연구원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이미 괴생명체의 샘플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된 놀라운 사실이 몇 가지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신 부장이 이진혁에게 태블릿 PC를 넘겨주었다.

    태블릿 PC에는 쥐의 머리를 가진 인간형 괴생명체의 두개골이 해부된 사진이 찍혀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에도 이진혁은 눈살 하나 찡그리지 않고 면밀하게 살폈다.

    “뇌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마치 나무뿌리처럼 가늘고 긴 조직 세포가 뇌 일부를 감싸고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그 말대로 검은 조직 세포가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두뇌를 반쯤 덮어씌우고 있었다.

    “이게 뭐죠?”

    “연구원들도 모르겠다고 합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박한성 씨에게 넘겨받았던 그 검은 액체처럼 미약한 전기 신호를 띠고 있다는 유사성이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뉴런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수상쩍은 조직 세포가 하필 뇌를 덮고 있다. 이거 꼭…….”

    “예. 기생체 같지요. 실제로 검은 액체 투여 실험에 사용된 것이 실험용 생쥐였던 만큼 변종 톡소포자충(Toxoplasma gondii)을 의심하기도 했답니다.”

    물론 생김새부터 구성 물질, 심지어 주 매개체인 쥐를 온순하게끔 조종하는 방식까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톡소포자충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당연히 그에 대한 자료도 첨부해두었기 때문에 이진혁은 신 부장이 준비한 것을 남김없이 읽어 내려갔다.

    “박한성 씨에게 건네받은 검은 액체는 공기 중에 노출되면 즉시 기화, 또한 무엇과도 반응하거나 섞이지 않는다는 굉장히 이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딱 하나, 생물의 체내에 들어가게 되면 급격한 변이와 기생체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나온 정보입니다.”

    “생체 무기로 활용될 가능성은?”

    “특수 주사기나 튜브, 캡슐을 이용해 직접 생물의 체내에 주입시키지 않는 한 일반적인 생체 무기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직접 변이체를 만들어서 제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워낙 미지의 경지라 감도 안 잡히고 실패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봅니다.”

    “그럼 생체 무기화는 포기하죠. 대신 철저하게 연구해서 지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저 기괴한 존재들의 정체를 밝혀내세요. 차기 연구소장이 정해지면 그 사람에게 모든 연구 자료를 넘기고, 차세대 개발 부서는 박한성 씨와 좀 더 접점을 가지도록 노력해 보세요. 그 사람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테니까요.”

    “마침 박한성 씨가 주문한 물건들이 있어서 종종 만나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선심 쓰듯이 이것저것 퍼 주세요. 그 사람에게 퍼 주는 것보다 우리가 얻을 게 더 많을 테니까. VIP 고객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략적인 지침을 내린 이진혁은 마지막 자료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기생체에 의해 지배당한 숙주의 체내에 주요 장기 대부분이 사라지고 검은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포낭(임시 명칭: 검은 알)이 대량으로 생성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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