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99화 (99/211)
  • 엘리트(5)

    -1급 비상사태! 1급 비상사태! 연구소내의 모든 인원은 보안 절차에 따라 피난해주십시오!

    미리 녹음되어 있는 여성 AI의 경고 메시지 방송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미래테크 소속 경비원들이었다.

    "무슨 일이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선임인 자신도 모르는데 후임 경비원이 뭘 알겠느냐마는.

    선임 경비원 최준구는 즉시 보안실에 무전을 때렸다. 보안실이라면 연구소 내부의 모든 CCTV와 보안 시스템을 관장하고 있으니 그쪽 인원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최준구의 무전에 보안 직원이 다급한 어조로 충격적인 사실을 토해냈다.

    -최고 수준의 보안이 요구되는 BL3+ 연구실에서 심각한 수준의 바이오해저드(Biohazard)가 발생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생물 안전도가 BL3+ 등급인 연구실에서 어떻게 심각한 수준의 바이오해저드가 터지는데?!"

    이곳이 어떤 곳인가? 미래그룹이 BLS4 등급 연구시설을 만드려다 아쉽게도 시간과 예산, 그리고 안전성 문제에 쫓겨 BL3+ 단계로 살짝 낮춘, 지저도시내에선 최고 등급 수준의 연구시설이 아닌가?

    바이오해저드야 사실 연구원의 부주의, 혹은 불가피한 사고에 의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연구원의 방호복이 찢어진다던가, 미처 완전히 소독되지 않은 유해물질이 연구실 밖으로 빠져나왔다던가, 아니면 배기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다던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런 문제들 대부분은 이렇게나 발전된 시설이라면 얼마든지 쉽게 진압할 수 있다.

    고성능 AI가 실시간으로 바이러스, 균류, 유해물질의 유출을 감시하고 있으며, 그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시설 곳곳에는 복도나 방마다 자동으로 폐쇄되는 방호벽이 존재한다.

    배기 시스템 역시 고장날 것에 대비해 자동적으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해버리는 몇 겹의 방벽이 존재한다.

    그런 안전장치들이 무수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시설 전체에 경보가 울릴 만큼 심각한 수준의 바이오해저드(생물 재해)라니.

    최준구는 혹시 에볼라에 그대로 노출된 연구원이 아무것도 모른채 시설을 활보하기라도 했는가 싶어 다시 한 번 무전을 때렸다.

    하지만 저쪽에서도 무슨 연유인지 정신이 없어보였다. 무전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욕설과 비명, 그리고 상급자가 다급하게 무어라고 호통치는 소리였다.

    "쯧. 안되겠다. 민기야, 너랑 내가 먼저 가서 사태 파악좀 해봐야겠다."

    "비상사태가 선포됐는데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우린 향후 미래그룹을 선도할 미래테크에 선발된 엘리트 경비원들이야. 내가 말하고도 좀 쪽팔리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지저 도시에서 자기 집과 차, 그리고 돈(포인트)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일을 하라고 높으신 분들이 주는 거야. 그럼 받은 만큼 일을 해야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즉각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살균 캐비닛 열어서 방호복 입어. 바이오해저드 터졌을 때 매뉴얼 기억나지? 한 번 읊어봐."

    "A와 B 매뉴얼이 있습니다. A 매뉴얼은 경비원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었을 때 방호복 및 안전장구를 착용하고 사태진화에 직접 나서는 것, 또한 적극적으로 연구원들을 구출해서 안전한 장소까지 피난시키는 것입니다."

    "B 매뉴얼은?"

    "B 매뉴얼은 경비원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터졌을 때 시설의 주요 복도와 연결된 중앙부의 방호벽을 수동으로 조작해 폐쇄하고 탈출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설과 연구인원은 포기한다는 추가 내용도......"

    "그래. A든 B든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방금 심각한 수준의 바이오해저드가 터졌다고 해서 순간적으로 쫄아버린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얼타지는 마라."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알면 됐고."

    후임보다 훨씬 더 빨리 방호복과 안전 장구를 착용한 최준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과 손전등을 들었다.

    경비원에게 권총을 지급하는 이유는 사실 별 거 없다. 겁없이 미래그룹 산하 연구시설을 노리는 멍청이는 당연히 없을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부자를 처리하는 목적으로 지급되는 것이다.

    그 내부자라함은 당연히 산업 스파이나 배신자다.

    그리고 거기에 지금 같은 상황을 대입하면 한 부류가 더 늘어나는데, 그 부류만큼은 절대로 연구시설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사람이다.

    최준구는 후임과 함께 서로의 방호복과 안전 장구 착용 상태를 점검하며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소형 압축 산소통은 최대 2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

    "2시간 제한으로 타이머 맞춰. 손전등 배터리도 확인하고."

    "전부 확인했습니다."

    "좋아. 들어가자."

    보안실에서도 지금쯤 자신들이 안으로 진입하는 장면을 봤을 테니 시설 중심부로 가는 길이 막혀있진 않을 것이다.

    바로 그때, 전력이 꺼지면서 시설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몇초 지나지 않아 예비전력이 가동되면서 복도 전체에 붉은 비상등이 켜졌다.

    "...발전실에 무슨 문제가 있나?"

    "무전 해봅니까?"

    "해봐."

    후임이 발전실에 근무자에게 무전을 해봤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잡음만 흘러나오는 무전기를 꺼버린 후임은 최준구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이새끼들 일 터졌다고 비상구로 먼저 대피한 모양인데. 돈은 우리보다 더 많이 받는 새끼들이 직업 의식이라곤 없어 씨발."

    "보통 관리 직원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전력이 나가거나 합니까?"

    "이런 대규모 연구시설은 전력 관리도 굉장히 힘들다고 들었어. 전기 잡아먹는 코끼리가 이 시설을 꽉 채우고 있으니 누전, 과부하, 합선 및 단선 같은 문제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더라고."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이상했다. 후임 말마따나 사람이 갑자기 빠졌다고 해서 멀쩡히 돌아가던 시설의 전력이 확 꺼지는 일은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다.

    최근 정부측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사소한 문제로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며, 동부 지구 연구단지에도 절전 운동에 적극 동참해달라는 공문이 내려왔다던데, 혹시 그것때문인가 싶었다.

    '전력 공급이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맞춰져 있다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게 문제가 된 건가?'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평소에는 얌전히 있던 보안 시스템이 마구 작동하기 시작하니까 갑작스럽게 전력을 확 땡겨갔을 가능성은 있다. 그럴 경우 발전실 관리 직원이 자리를 비웠다는 전제하에 갑자기 정전 사태가 일어나도 이상한 건 아니다.

    하필 이 상황에서 그런 일들이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게 굉장히 인위적이고 미심쩍을 뿐이다.

    두 사람은 경보등이 붉게 빛나고 있는, 피처럼 붉은 복도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연신 주위를 살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연구원이나 시스템 오류로 폐쇄되지 않은 연구실이 있다면 그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그때, 저 멀리서 복도를 열심히 뛰어오는 흰 가운 차림의 연구원 무리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연구원 여러분! 이쪽입니다!!"

    최준구가 크게 외치자 연구원들은 살았다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방호벽이 내려와서 다른 비상구가 다 막혀버렸습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죠?! 우린 그냥 연구중이었는데......"

    "연구소장님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아 씨! 나 연구 도중이었는데 진짜......!"

    "여, 여기서 빨리! 빨리 나가야 합니다!!"

    마치 먹이 달라고 어미새를 보채는 아기새들처럼 쉴새없이 쫑알대는 연구원들의 행태에 최준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가 지키고 있던 현관 방향은 잠겨있지 않습니다. 그곳으로 가셔서 소독 절차를 밟으시고 밖으로 나가서 구조받으시면 됩니다. 아마 외부 보안실 직원들이 바깥에서 대기중일 겁니다."

    최준구가 출구를 알려주자 연구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곳으로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기야 평생 공부와 연구만 해오던 범생이들이니 이런 실제상황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평소엔 그렇게나 지적이고 쿨해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막상 일이 터지니까 다들 저렇게 변하는 게 좀 신기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원래 극한까지 내몰려봐야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야. 그렇다고 저 사람들이 잘못한 건 아니니까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라. 우리처럼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들이 패닉에 빠지는 건 당연한 거야."

    저렇게 나간 인원들은 모두 보안 직원들이 붙잡아서 따로 격리하거나 필요에 따라 처분할 것이다. 겉보기엔 다들 문제없어보였으니 최준구도 일단 보내준 거다.

    그러고보니 안쪽에 남아있는 연구원이 있느냐고 미처 묻지 못 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최준구는 살짝 짜증을 내면서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부터 틈틈이 보안실이나 다른 경비원에게 무전을 보내고 있지만 무엇 하나 답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정말로 다들 자신들만 두고 몸을 내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엘리트라면 엘리트답게 받은 만큼 일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는 게 당연한 것인데. 다들 자신의 본분이나 의무따윈 내팽개치고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니 헛웃음이 나오지 않고 배길까.

    "중심부 격벽은 복도 격벽과 다르게 굉장히 크니까 수동으로 개폐해야 하는 거 알지? 너는 남쪽부터 닫아라. 내가 북쪽부터 닫을테니까."

    그들이 걸어온 방향은 서쪽이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주요 연구동이 있었다.

    별도의 연구동이 존재하지 않는 북쪽과 남쪽은 저마다 비상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아직 만나지 못한 인원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몸을 뺐을 것이다.

    방호벽을 수동으로 폐쇄한 두 사람은 동쪽 연구동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낙오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고 빠지면 된다.

    보안 시스템에 의해 '격리된' 사람은 직접 처리하고, 그렇지 않고 패닉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대피시키는 단순한 작업일 뿐이다.

    그렇게 연구실을 하나하나 뒤지던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선임 연구원 최진하가 사용하는 개인 연구실 앞에 섰다.

    보안 시스템에 의해 방호벽이 내려와있으며, 생물 재해를 억누르기 위해 살균제가 한바탕 쏟아진 흔적이 있다. 또한 연구실 입구 위쪽에 설치된 스마트글라스 액정에는 '바이오해저드'를 뜻하는 경고등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곳이 문제의 원흉이었다.

    방호벽 보안을 해제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연구원이 아니라 경비원 뿐이다. 연구원은 절대로 방호벽을 해제할 수 없다. 설령 연구소장이라고 해도.

    최준구가 자신의 ID 카드를 인증기에 갖다대자 방호벽이 다시 올라가며 입구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들어가서 생물 재해의 원인을 파악하든, 원인을 직접 처리하든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붉은 경고등만 빛나고 있는 연구실 내부에 들어선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미래그룹의 2인자로부터 내려온 지시사항을 연구소장에게 직접 전달받아 연구실에 처박혔다더니, 이곳에서 며칠내내 연구만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연구에 미쳐 사니까 사고같은 게 터지는 거지. 하여간 범생이들은 제 몸 아낄 줄을 몰라요.'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쌀 줄 알아야 하는데 이 양반들은 연구에 미쳐서 인가의 3대 욕구를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기력이 빠져서 인적 사고가 발생하면 이렇게 되는 거다.

    손전등 불빛으로 내부를 비추며 먼저 진입한 최준구는 바닥에 묻은 하얀 소독액과 섞여있는 검붉은 물질을 발견했다.

    "...피?"

    피라고 하기엔 검은색이 좀 더 짙었고 젤리처럼 끈적한 느낌이었다. 혈액이 공기중에 노출되면 응고되는 건 그도 알고 있었지만, 왠지 인간의 혈액같지는 않았다.

    "야, 너는 연구기재 보관실에 한 번 들어가봐. 최진하 연구원이 거기에 숨어있을 수도......"

    후임을 돌아본 최준구는 마지막 말을 잇지 못 했다.

    자신을 잘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던 후임의 머리는 거대한 생쥐의 얼굴을 가진 인간에게 오독오독 뜯어먹히고 있었으니까. 질긴 방호복째로.

    흰 생쥐 얼굴을 한 인간은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으며, 목 언저리에서 검은 체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또한 생쥐 특유의 똘망똘망하고 구슬처럼 둥근 눈은 온데간데 없고, 눈구멍이 검게 파여 있었다.

    그저 햄스터처럼 자신의 후임을 단단히 붙잡고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씹고 있을 뿐이었다.

    "아."

    눈이 가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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