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96화 (96/211)
  • 엘리트(2)

    지저 도시 프로젝트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지저 도시의 철통같은 경비와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위협, 그리고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방해하려는 북쪽의 사악한 빨갱이 괴뢰 정부.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한민국 군부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냥 인간의 전투력을 장갑차 혹은 전차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되는 것 아닌가?

    전통적인 육군 몰빵 또라이 국가답게 이 기막힌 발상을 떠올린 인간은 놀랍게도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잡설을 이쯤하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산업용 엑소스켈레톤의 본격적인 군용화 작업이었다.

    이미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은 한국보다 훨씬 더 빠르게 엑소스켈레톤 군용화 작업을 진행중이었지만, 한국은 그들과 격을 달리했다.

    철저하게 육군 중심. 육군에게 국방 예산을 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미친 생각을 가진 놈들 투성이라 중장갑보병화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처음 시도한 것은 병사를 더 오래 굴려도 덜 지치게 하는 수준의 프로토타입 엑소스켈레톤이었고, 이후 전고체 배터리가 개발되면서 본격적으로 각종 첨단 장비를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다.

    야투경, 실시간 전황 보고용 스마트글라스, 일회용 정찰 소형 드론 발사기와 조작기, 대용량 탄약박스와 세트로 딸려오는 '개인용' 미니건 등등.

    해당 프로젝트에 뛰어든 모든 화력덕후들이 자신들만의 로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갈려나갔다. 그것도 누군가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의지로.

    그렇게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 지급의 보급형 군용 엑소스켈레톤인데, 가장 먼저 생산된 물량은 수방사와 제7기동군단에 우선적으로 납품되었다.

    그 다음 순차적으로 최전방 주둔 군부대에도 물량이 풀렸는데, 7기동군단 다음으로 물량을 받은 것이 바로 내가 있던 중장갑수색대대였다고 한다.

    내 이전 기수였던 수색대원들도 전부 엑소스켈레톤을 지급받았었고, 나 역시 엑소스켈레톤 면허를 따면서 자연스럽게 전입하자마자 지급받았다.

    대한민국이 10년동안 지저 도시에 예산과 인력을 갈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완성인 이유는, 그냥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맞는 것 같단 말이지.'

    내 주변을 둘러싼 이 중장갑보병들을 보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미친 나라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사생팬도 아니고 무려 중장갑보병들에게 이렇게 둘러싸인 사람이 대통령말고 또 어디 있을까?

    그들은 나를 억압하는 건지 호위하려는 건지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빡빡하게 모여서 움직였다. 이정도면 지근거리에서 수류탄이 터져도 나는 멀쩡할 것 같다.

    나는 바로 옆을 걷고 있는 중장갑보병을 곁눈질로 살폈다.

    중요 부위마다 두터운 방호장갑을 껴입은데다 그 위에는 방수포 같은 바람막이를 덮어놨다. 그리고 얼굴에는 방독면까지 착용하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도 없었다.

    대체 어떤 부대 소속이길래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깔맞춤을 하고 움직이는 건가 궁금했는데, 마침 내 시선을 느낀 중장갑보병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화장실이 급하십니까?"

    "왜 이 상황에서 화장실이 급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날이 춥지 않습니까. 추운 날은 소변이 자주 마려운 법입니다."

    "작은 게 아니라 큰 거일 가능성도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면 여기서 싸라고 할 거잖아요. 그렇죠?"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반쯤 농담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상대방은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중장갑보병들도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진짜 나한테 길거리 한복판에서 20대 남성 무수정 노출 노상방뇨.avi 를 시킬 생각이었다고?

    '세상이 망해서 이 사람들도 미친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미친 사람들이었던 걸까.'

    어느쪽이든 그런 진실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를 애워싼 중장갑보병들이 이끄는 방향은 북한산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정확히는 한강 방면이었다.

    설마 다시 롯데호텔로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덕수궁을 그대로 지나쳐 쭈욱 남하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내가 다음 지상 작전에서 롯데호텔을 경유해 살필 생각이었던 서울역이었다.

    생각해보면 롯데호텔과 서울역은 꽤 가까웠기 때문에 도보로 이동해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금 과장해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정도였다.

    서울역은 규모가 규모인 만큼 다른 역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당연히 롯데호텔과 잘 연결하면 훌륭한 거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지상 작전에는 한강을 살피기 전에 서울역을 방문할 예정이었는데...설마 이런식으로 방문하게 될 줄이야.'

    애초에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우리가 롯데호텔에서 죽어라 싸울 때 조금 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저런 불만과 잡생각을 뒤로한 채 대망의 서울역에 입장하자, 나는 외부와 내부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롯데호텔에서도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따스한 공기였다.

    서울역은 2025년에서 2030년 사이에 곧 완성될 지저 도시를 위해 대대적인 개수 작업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설마 서울역에도 자가발전시설이 들어왔을 줄이야.

    언뜻 돈 낭비처럼 보여도 사실은 공항만큼이나 중요한 서울의 최고 역에 그만한 조치를 취한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이렇게 도움이 되고 있지 않은가?

    '건물 규모가 이전보다 훨씬 더 거대해진 걸 보니 확실히 많이 바뀌긴 한 모양이야. 발전시설은 분명 지하에 건설했겠지.'

    서울역 개수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을 때는 내가 군에 있었기 때문에 이쪽 사정에는 어두웠는데, 막상 이렇게 직접 방문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서울역 유리벽(외창)은 전부 방화 시스템에 의해서 철제 셔터가 내려가서 내부의 불빛이 외부로 일절 새어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내부는 밝은 전등 불빛과 따뜻한 난방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원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바뀐 서울역에 들어오자 입구가 굳게 닫혔다.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는 뜻인가? 내 엉덩이가 조금 위험해진 것 같다.

    "박한성 병장님을 이곳까지 모셔오는 게 저희 임무였기 때문에 저희는 다시 통상 업무에 복귀하겠습니다. 박한성 병장님은 이대로 서울역 역장실에 방문해주십시오. 그곳에서 동료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깐, 난 이미 전역했는데요? 그보다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또 무슨......"

    "가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가급적 사적인 대화는 자제하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더는 얘기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중장갑보병들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의 업무로 돌아갔다.

    경비를 서거나, 무거운 물건을 척척 들어 옮기거나, 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새롭게 조를 편성해서 어디론가 이동하거나 했다.

    신기한 것은 그들을 관리하고 명령을 내리는 군 간부나 지휘관(장교)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중장갑보병들은 기본적으로 전원 엑소스켈레톤 면허 보유자이기 때문에 A급 취급을 받는다. 일반 보병과는 확실히 짬대우가 다르다는 의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급자의 관리와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 하지 않다.

    대통령을 제외하면 그 어떤 상급자도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구조였던 중장갑수색대와 중장갑타격대가 굉장히 특이했던 케이스였을뿐, 기본적으로 중장갑보병들은 군에서 매우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인이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사용하다가 자칫 흑심을 품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곳은 병들을 관리하는 부사관과 장교들이 많아야 정상이다. 이만한 숫자의 중장갑보병들이 돌아다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들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으니까.

    심지어 서울역은 내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지상의 상업 거점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

    선로를 따라 직접 움직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서로 물자나 정보를 거래하거나, 잠시 이곳에 머무르며 여독을 달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바깥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모양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롯데호텔을 서울의 중심으로 만들겠다고 큰소리 뻥뻥쳤지만, 사실 진짜 중심은 따로 있었군.'

    새롭게 바뀐 서울역은 외부 역과 지하철 역 노선이 모두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로가 이어진 출입구만 잘 관리한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과 물자를 모두 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반대도 가능했기 때문에 서울역은 일종의 허브(Hub)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단장이 이곳의 존재를 몰랐을리가 없는데. 그렇다는 건 호텔을 습격했던 그 기분나쁜 놈들도 당연히 알았다는 거고.'

    서울역과 롯데호텔, 그리고 이상한 종교 집단을 서로 엮어서 퍼즐을 짜맞춰보니 대충 그림이 나왔다.

    서울역을 직접 습격하자니 그 사이비 놈들은 병력이나 화력면에서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고, 때마침 사람은 많지만 내부 배신자 덕분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롯데호텔을 우선 점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약 2천 명의 사람들을 모조리 자신들처럼 만들어서 수족처럼 부렸다면, 이론상 서울역을 기습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

    즉 사이비 놈들에게 있어서 롯데호텔은 서울역을 꿀꺽하기 위한 발판이었던 셈이다.

    '그걸 내가 방해해버렸으니 화가 단단히 났겠군.'

    아무래도 그놈들과는 꽤 질긴 인연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역장실로 향했다.

    이곳에 외부인이 찾아오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닌지, 이미 자리잡고 살고 있는 주민들도 무장한 나를 딱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왜냐하면 여긴 중장갑보병이 존나 많으니까. 진짜 너무 많아서 발에 치이는 게 중장갑보병이니까.

    정부가 지저 도시에 끌고 들어갔던 수방사 소속 중장갑보병을 제외하고도 이렇게나 많은 중장갑보병들이 서울역을 지키고 있는데, 끽해야 외골격파츠좀 달고 있는 놈이 뭐 대수란 말인가.

    게다가 전력이 확보된 상태였기 때문에 내부 CCTV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사소한 도둑질이나 주먹다짐조차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장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이만한 규모의 생존자 집단을 거느리고 있다면 우두머리는 못해도 별 3개 이상이다. 여단장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인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 거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들어와."

    하지만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내 또래 청년의 것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는 왠지 모르게 낯이 익는 얼굴들이 있었다.

    전부 나와 같은 20대에, 중장갑타격대 소속임을 의미하는 '알파' 견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분명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씹...간부들이 없을 때부터 눈치 깠어야 했는데."

    "간부들 따위가 우리 위에 설 수는 없지."

    넓은 방 안에 있는 청년들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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