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92화 (92/211)
  • 데드존(4)

    -박뱀은 전역하면 뭐할 검까?

    -섹스.

    -농담하지 마십쇼.

    -농담같냐 씨발.

    "움직여! 이 띨빵한 새끼야!"

    나는 옆에서 얼타고 있는 이름모를 상병의 하이바를 후려갈기며 외쳤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사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엄폐물에 몸을 숨겼다.

    우리가 엄폐물에 몸을 숨긴지 얼마 되지 않아 무언가가 벽에 퍼버버벅 하고 박혔다. 계속 몸을 노출시키고 있었더라면 옛저녁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것이다.

    -여기는 솔바람, 여기는 솔바람. 현재 롯데마트 주차장으로 우회한 적들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지원바란다.

    "야! 애들 몇 명 데리고 롯데마트로 가!"

    방어조 인원 몇 명을 차출한 나는 임시방편으로 그들을 롯데마트에 붙였다.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 하겠지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

    '신호탄을 또 쏠까? 아냐. 그랬다간 여기 있는 사람들만 다 죽는다. 저 놈들은 신호탄을 보고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우린 못 도망쳐.'

    신호탄은 만능이 아니다.

    일전에 삼각산동에서 나를 엿먹인 놈들도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편하게 처리했을 뿐, 그게 만사에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사람대 사람간의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군인에게 무조건 바짝 숙이고 최대한 엄폐물의 이점을 살려서 방어하라는 말을 남긴 뒤, 나는 반파된 호텔 객실 벽을 통해 복도로 달려나왔다.

    놈들이 사신을 보낸지 정확히 10분 뒤. 우리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방어 태세만 굳히자 적들은 결국 공세에 나섰다.

    처음 등장한 것은 대체 어디서 구해왔는지도 모를 박격포였다.

    그나마 거대한 호텔이라는 튼튼한 요새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박격포가 때린 건물 외벽이나 창가는 흉하게 박살나서 찬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여기서 더 어처구니 없는 점은 그런 개지랄을 떨었음에도 소음에 반응해서 몰려드는 나이트워커들이 없었다는 거다. 대체 왜 나이트워커들이 반응하지 않은 거지?

    '놈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데...그게 뭔지 몰라서 더 빡치네!'

    나는 이 빌어먹을 호텔을 꿀꺽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설마 나말고도 다른 놈들이 이 호텔을 노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하다못해 귀띔이라도 좀 해주든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쪽의 안전한 곳에 모아뒀기 때문에 전투에 걸리적거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파괴된 호텔 내부는 온갖 잔해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흙먼지는 또 어찌나 자욱하게 꼈는지, 공업용 마스크와 고글을 착용하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다.

    "엇! 한성 형님!"

    "거기서 왜 너희들이 내려와 씨발! 고층에서 저격하라고 올려보내놨더니만!!"

    "그게...저격이 불가능합니다! 저격하려고 할 때마다 뭔가가 우리를 역으로 저격해왔습니다!"

    저격수가 역으로 저격을 당한다는 건 이미 위치와 의도가 탄로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훌륭한 엄폐물 사이를 숨어다니는 저격수라면 더더욱.

    "역 저격에 당한 놈은?"

    "두 명 당했습니다. 한 명은 어깨를 맞아서 중상이고 나머지 한 명은......"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한 명은 운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을 저격하랍시고 호텔 고층으로 올려보냈던 내 책임에 또 한 명의 목숨이 추가되었다.

    "...그래. 부상자 안쪽으로 옮겨준 다음에 너희도 방어조와 합류해. 엄폐 잘 하고, 어디가 밀린다 싶으면 소방수 역할 해주는 것도 잊지마. 뛰어!!"

    사기가 떨어진 그들의 등짝을 일일이 두들겨 주면서 다시 전장으로 돌려보낸 나는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갔다.

    다람쥐처럼 계단 난간을 붙잡고 미끄러지듯 내려가자 1층 현관에선 기둥과 벽 사이에 몸을 숨긴 아군이 보였다. 가장 격렬한 공세를 받고 있는 그들은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고 있는 차도식파 조직원들이었다.

    "1층 빠져!!"

    "예?!"

    "1층 빠지라고! 어차피 못 막으니까 폭약으로 입구만 무너뜨릴 거야!!"

    데스크 뒤쪽에서 덜덜 떨고 있는 공병에게 낚아채듯 C4를 받아들고 그를 먼저 후퇴시켰다. 그리고 나는 총탄이 빗발치는 1층 현관 로비를 필사적으로 가로질렀다.

    건물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고 특정 장소만 파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지지대 역할을 하는 기둥과 주변 천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지대가 사라진 장소에 쏟아져내린 천장의 잔해들이 자연스럽게 산처럼 쌓인다.

    "한 놈씩 뒤로 빠져! 너 먼저!!"

    가장 위태로운 기둥에 붙어있던 엑소스켈레톤 착용자 한 명을 먼저 빼내고, 그 자리를 내가 대신 들어갔다. 총성 때문에 너무 시끄러워서 주변은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으니, 수신호로 다음에 빠질 놈을 지정해주었다.

    "너! 그리고 너!!"

    내가 악을 쓰며 수신호를 보내자 바깥의 적들에게 응사하던 조직원들이 하나둘씩 뒤로 빠졌다.

    엑소스켈레톤에 추가 장갑판을 달아뒀기 때문에 어지간한 총탄 정도는 그냥 튕겨냈다.

    하지만 엑소스켈레톤도 보호해주지 못하는 신체 부위가 존재하기 때문에 착용자가 과도한 포화에 노출되면 얄짤없이 죽는다.

    무엇보다 적들이 작정하고 군수물자를 노획해서 이쪽 못지 않은 화력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신경쓰였다. 치사하게 저 새끼들만 박격포를 쓴다는 점이 특히 더.

    모든 인원이 빠진 것을 확인한 나는 야투경을 착용하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바깥을 확인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다시 고개를 내빼서 총탄이 얼굴에 박히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야투경 너머로 롯데호텔에 상당히 근접한 적들의 외관을 확인한 것이다.

    '검은 옷에 검은 면사포를 쓰고 있다. 그 새끼들이야.'

    노원역에서 반 정도는 내 손으로 직접 죽여버렸던 것 같은데, 결국 나머지 반은 죽이지 못해서 놓쳐야만 했던 기분나쁜 종자들.

    이젠 예상이 아니라 확신으로 변한 적들의 정체에 이를 빠드득 갈면서도 C4의 시한신관을 조작했다.

    기둥과 천장이 연결되어있는 접합부에 C4를 부착한 뒤, 옆에 떨어져 있는 큼지막한 콘크리트 조각을 들어 방패처럼 들었다.

    퍼버버벅!

    외골격파츠 덕분에 상당히 두껍고 큼지막한 콘크리트를 들고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내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총탄의 위압감 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콘크리트 조각이 버티지 못 하고 박살나면 어떡하지, 어디선가 날아든 대구경 탄환이 이 콘크리트 조각을 뚫어버리면 어떡하지 같은 일말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개좆같은 새끼들. 오늘 너희를 살려보내면 내가 성을 간다.'

    쩌적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콘크리트 조각을 힘껏 내던지고 계단 위로 뛰어올라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C4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호텔 입구에서 터진 C4는 절묘하게 기둥과 천장을 박살내며 대량의 잔해를 토해냈다.

    중장비라도 가져오지 않는 한 치우기 힘들 것 같은 잔해가 입구를 꽉 틀어막자 적들의 공세가 잠시 멎었다. 내가 메인 입구를 막아버린 탓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디를 공략해야할지 잠시 혼란을 겪고있는 것이다.

    여기서 적들이 얼마나 빨리 움직임을 바꾸냐에 따라 적들에게 유능한 지휘관이 있냐 없느냐를 알아낼 수 있다.

    나는 창문에서 조심스럽게 바깥의 움직임을 살폈다. 예상대로 놈들은 다른 입구를 공략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을 공략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하 주차장은 장갑차와 군용 지프가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다는 걸 아는 거야. 역시 그 배신자 새끼들이 호텔 내부 정보를 흘렸군.'

    덤으로 적들에게 상황 판단이 빠르고 결단력을 가진 유능한 지휘관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마음 같아선 지하 주차장에 있는 장갑차와 군용 지프를 빼서 적들에게 역공세를 펼치게 하고 싶었지만, 적들이 박격포까지 준비해온 마당에 대전차장비가 없을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대전차장비도 준비되어 있으니 이 호텔을 망설임없이 습격한 것이라고 봐야겠지.

    "공격조 집합!"

    상황이 워낙 급박해져서 일단 호텔 1층 현관을 틀어막게 했던 공격조,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을 불러들였다.

    괴물들과는 목숨 걸고 숱하게 싸워봤지만, 같은 인간들과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는 건 이들도 이번이 처음인지라 하나같이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만약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이들 역시 어딘가에 처박혀 덜덜 떨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괴물보다 눈깜짝할 사이에 날아드는 총알이 더 무서운 건 이해한다. 괴물은 잡아서 찢을 수도 있지만 멀리서 깔짝깔짝 총이나 쏴대는 놈들은 그렇게 할 수도 없지.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너희들이라고 해도 무서운 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저새끼들이 우릴 조지기로 한 이상 싸우든 안 싸우든 죽을 놈들은 죽어. 그러니까 난 이왕 병신이 될 거라면 승리한 병신이 되고 싶다. 너희도 그래야할 거야!"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건 패배한 병신이 되는 거다.

    그냥 병신도 아니고 패배한 병신!

    나는 다시 한 번 복도에 지도를 펼쳐서 나의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놈들은 을지로입구역에서 튀어나왔거나, 을지로입구역 인근 길목을 통해 롯데호텔로 접근해왔을 거다. 사실 어느쪽이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놈들이 병력을 분산하고 있다는 거지. 여기 롯데호텔과 아래쪽에 붙어있는 롯데마트...나 계속 롯데마트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롯데백화점인 건 다들 알지? 마트든 백화점이든 뭔가를 존나 많이 파는 건 똑같으니까 그냥 적당히 알아들어!"

    현재 적들은 을지로와 남대문로에 각각 병력을 나눠둔 상태다.

    상대적으로 방어 병력이 적은 우리를 상대로 양면전선을 형성해서 소모전을 걸고, 결국 우리가 혼이 쏙 빠질 즈음에 단번에 치고들어와서 머리를 따고 거점을 점령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너무 뻔히 보이는 의도였지만 지금 우리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적절한 작전도 없다. 해서, 나는 아예 적들이 양면전선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허리를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계획은 심플하다. 양념감자 전문점 롯데리아를 관통해서 단번에 치고 나간다. 남대문로에서 명동9길까지 우리가 먹어버리고, 양옆에 있는 KB국민은행과 SK네트웍스 빌딩을 엄폐물 삼아서 적들의 옆구리를 찌르는 거야."

    소수인 만큼 적들의 배후를 기습한다고 해도 큰 타격을 주지는 못 하겠지만, 양면전선의 허리를 끊어서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적들을 계속 신경쓰이게 만들어서 거점 진입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성공한다면 좋은 작전인 건 맞지만...만약 적들이 호텔에 대한 공세를 멈추고 역으로 우리를 포위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다. 만약 놈들이 우릴 쌈싸먹을 작정으로 포위하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측면과 배후의 기습에 취약해질 텐데, 그때 내가 호텔측 아군에게 신호를 줘서 역공세를 펼치게 할 거다."

    "과연."

    "우리가 일단 놈들의 허리를 끊기만 하면 외통수에 걸리는 거야. 우릴 처리하자니 역습을 당할 테고, 우릴 가만히 내버려두자니 양쪽 전선에서 모두 피해가 누적될 테니까."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장의 허리를 끊는 작전은 꽤 자주 사용되어 왔다.

    전장의 허리를 끊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또 끊었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들지만, 일단 성공만 하면 적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특공이었다.

    지금처럼 적들에게 머릿수와 화력으로 밀려 질질 끌려다니기만 할 바에야, 차라리 특공을 걸어서 승부를 보는 게 더 나았다.

    "객실 문짝이든 뭐든 상관없어. 총탄을 막을 수 있을만한 것들을 가져와서 몸을 가려. 때 되면 단숨에 치고 나간다."

    내가 분대를 지휘할 때만 해도 이렇게 빡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지 않아서 그런가?

    우리는 건물 안에서 총을 꼬나쥐고 적들이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난 전역하면 두 번 다시 이런 짓거리는 안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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