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존(3)
나는 이곳을 총괄하고 있는 여단장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집무실을 다시 찾아갔다.
그는 내가 아침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복도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이 이상 사태에 간접적으로 휘말린 피해자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지금쯤이면 그가 부하들을 닦달하며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두지휘하고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집무실의 그는 멍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따금 '그럴리가 없어'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오는 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몇몇 군 간부나 병사들과 마주쳤지만, 그들 역시 제대로 된 명령은 전달받지 못해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최고 지휘자가 이 모양 이 꼴이니 그럴수밖에.
나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의 멱살을 붙잡아 가볍게 뺨을 갈겼다.
사태는 그만큼 심각했고, 심지어 우리는 이 사태가 정확히 어떤 연유로 발생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보다도 어려보이는 놈에게 뺨을 맞은 것이 정신을 차리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모양인지 그의 풀린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자네는......?"
"꼴에 장군이랍시고 별을 달고 있으면 부하들을 지휘할 생각부터 해야지, 방구석에 처박혀서 왜 궁상을 떨고 있는 겁니까?"
"......"
"지금 호텔 전체에 난리가 났습니다. 단체 식중독인지, 아니면 우리도 모르는 새로운 유행병이 급격하게 확산되기라도 한 건지, 호텔 인원 대다수가 이상 증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보고는 받았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조금 전에 알았고."
그는 내게 디그러쉬제 녹음기를 툭 내밀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군용 모델이었다.
"내 부하, 그러니까 어제 자네와 충돌했던 진현곤 대령의 녹음기일세."
그가 녹음 기록 재생 버튼을 눌렀고, 나는 곧 어째서 그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망하게 책상 앞에 앉아있기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뭐 이런...아니, 그보다 당신도 이걸 알고 있었던 겁니까?"
"어느정도는."
"이런 씨발 새끼가!!"
내가 그의 멱살을 붙잡아 주름진 얼굴에 권총을 들이밀었다. 뒤늦게 바깥에서 소란을 듣고 달려들어온 군인들이 내게 총을 겨누며 멈추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에 당장이라도 이 늙은이의 머리통을 터뜨리고 싶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정말로 일부만 알고 있었네. 젊은 친구. 내 밑에서 일하던 그 생명공학자는 우리도 저 바깥의 괴물들처럼 추위와 어둠, 그리고 허기에서 벗어나려면 시대에 맞게 적응하고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으니까."
"그래서 그 괴물들을...사람들에게 먹였단 말입니까?!"
"그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만약 그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가 책임지고 물러날 생각이었네."
"지랄. 사임이 아니라 사망을 했어야지. 뭣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들어줄 수 있는데."
그에게 총구를 더욱 바짝 들이대자 내 뒤에 선 군인들도 더욱 사납게 소리쳤다.
"그래, 일은 이미 터졌고, 이 발칙한 것들이 나 몰래 그런 음흉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 했으니 무능한 나는 죽어서 죄를 갚아야겠지."
그는 모든 걸 달관했다는 표정으로 몸에 힘을 뺐다.
이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나는 당장이라도 이 똥별을 쏴죽이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은 참아냈다.
"당신에 대한 처우는 이 사태가 끝난 뒤에 논의하자고. 썩어도 준치라고, 똥별이랍시고 달고 있는 그 계급장이 아니면 당신네 부하들이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사실 당초 계획은 경찰과 군인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배후에서 그들의 비리를 캐내 민간인들에게 알린 뒤 이 거점에서 특정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한쪽 세력이 축출되면 나머지 한쪽 세력과 손잡아서 자연스럽게 동맹 관계로 등극하고, 이 거점을 차도식파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 했었다.
가능한 무력을 적게 쓰고 의심받는 일 없이 편하게 거점을 접수할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이대로 가면 거점이고 나발이고 여기 있는 사람과 물자까지 전부 다 포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수상쩍은 놈들이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이곳을 접수하는 걸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봐야 한다.
내 사전에 남의 것을 빼앗는 문구는 있을지언정, 내 것을 남에게 빼앗긴다는 문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이 거점에 있는 민간인들이 좆되지 않도록 지휘를 잘 해야 할 겁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보지."
내가 멱살을 놔주자 그는 답답했던 목덜미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 진현곤 대령이라는 작자의 녹음기를 챙겨 품속에 갈무리 한 나는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단순히 호텔을 안정화시키기만 하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전혀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복병이 롯데호텔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 차도식파가 머무르던 층으로 돌아온 나는 다행히 조직원들의 상태가 어느정도 안정된 것을 확인했다.
녹음기에서 들려온 기분나쁜 대화 내용대로 우리 조직원들을 무력화시키는 시간은 꽤 짧았던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그 과학자라는 놈은 지금쯤 진현곤 대령 일당과 함께 호텔을 빠져나간지 오래일 거다. 어차피 제 3 세력이 이곳을 습격할테니, 그때 그들과 함께 돌아올 생각이겠지.
조금 진지 빠지긴 했지만, 어찌어찌 움직일 수 있는 조직원들에게 장비를 챙겨서 전투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명호가 내게 다짜고짜 이게 무슨 일이냐며 묻기에, 여단장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녹음기를 켜서 진실을 들려주었다.
"이미 다 게워냈는데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씨발새끼들."
"지상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하세요."
어제 콩 스프를 제외하면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았던 나와 달리, 차도식파는 환영회에서 접대받은 음식을 양껏 먹었다.
사기 유지를 위해 김명호에게만 따로 진실을 알려주긴 했지만,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맨 정신으로 그냥 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성 씨. 지금 솔직한 제 심정으로는 그냥 전초기지고 뭐고 빠르게 철수해서 우리가 살 길만 모색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지요?"
"우리가 이 거점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것으로 얻을 이익은 당장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게 전부예요. 하지만 이 거점을 포기하는 것으로 입게되는 손해는 그 이상이죠."
우선 종로구 방면에서 중구, 용산구로 이어지는 대부분의 길목이 차단될 가능성이 높다. 이만한 대규모 거점을 취한 제 3 세력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커질 테니까.
한술 더 떠서 지상을 돌아다니는 괴물만이 아닌, 인간들 역시 우리의 위협으로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남부 격벽 루트를 확보한 의미가 없어진다.
'무엇보다 한강에 있다던 정수 처리 시설과 발전소를 확보하려면 중구를 거쳐서 용산구로 가야 하는데, 이 거점이 발목을 잡을 게 뻔해.'
"이곳을 뺏긴다는 건 향후 서울의 중심부에는 발도 들이지 못 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어요. 일전에 삼각산동에서 저와 도구봉파를 엿먹였던 군 부대는 자기들 안위만을 지키느라 바빠서 주변 일대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지만, 여길 집어삼키는 놈들은 분명 종로구부터 중구, 나아가서 서울 중심부를 완전히 장악하려 들겠죠."
그만큼 가치가 높은 거점이다.
일개 지하철역 따위와 비교가 안 된다는 말이다.
"밀수로 땡길 수 있을 때 땡기고, 더이상 밀수로 땡기지 못하게 될 때를 고려한다면 여긴 지켜야 하는 거점이 맞아요."
그리고 어쩌면......
'암흑에 빠진 지상을 복구할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조직원들에게 이참에 부족한 탄약이나 무기는 호텔측에서 적극적으로 받아와 쓰라는 말을 덧붙였다.
저쪽에서 지금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적은 만큼 우리 손이 절실할 텐데, 그걸 기회삼아 부족한 군수물자를 보급할 생각이었다. 눈에 띄지않게 조금씩 빼돌리는 것도 괜찮고.
"그런데 정확히 어떤 놈들이 여길 노리는 겁니까?"
철컥철컥!
총의 노리쇠를 몇 번 당겨서 작동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김명호가 대뜸 물었다.
"짐작이 가는 놈들은 있어요. 전혀 다른 놈들일수도 있지만, 그런 짓을 생각하고 실행으로 옮길만한 건 그 더러운 종자들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노원역에서 크게 맞붙었던 역겹고 추한 존재들. 가장 깊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뒹구는 버러지들만도 못한 그 놈들이라면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총과 장비를 챙긴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위주로 새롭게 공격조와 방어조를 편성했다.
롯데호텔과 롯데마트를 포함한 이 건물은 굉장히 넓고 출입구도 많았기 때문에, 지켜야 할 장소를 배분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해서, 아예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칠 공격조와 시설에서 무한 존버를 외치며 방어할 방어조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놈들은 지금쯤 호텔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력화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크게 방심한 상태일테니, 그 점을 역으로 찌르면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거에요."
여단장이 지휘하는 임시 작전본부에서 받아온 롯데호텔의 청사진을 펼쳐놓고 방어조와 공격조 인원들에게 알맞는 포인트를 지정해주었다.
호텔의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한 수많은 객실. 그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적들의 혼을 쏙 빼놓는 히트앤런 작전이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나는 유독 사격 솜씨가 괜찮은 사람 몇몇을 뽑아 야투경을 지급해서 고층 객실로 올려보냈다. 그들은 저격수 겸 관측병이 되어줄 것이다.
"호텔에 접근하는 모든 것들을 죽여 없앤다고 생각하세요. 적들에게 부상을 입혀서 움직임을 더디게 하고, 적들이 부상자를 챙긴다면 또다른 부상자를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전투력을 깎아먹는 겁니다."
굉장히 지독한 방식의 전투 교리지만, 나는 이 전투 교리가 대인 전투에서 무엇보다 적합하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가 상대했던 북한군들에게도 같은 전투 교리로 싸워서 일망타진했던 게 무려 16번...아니, 17번이었나?
어쨌든.
"만약 적들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 항복을 받아주는 척 하면서 무방비하게 접근하도록 내버려두고, 확실한 사거리에 들어오면 그대로 쏴죽이세요."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만약 제가 생각하는 놈들이 맞다면 항복한다고 해서 진짜 항복할 놈들이 아니에요. 어차피 망한 세상인데 국제법좀 어긴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국제법도 전파가 안 터지는 땅굴 아래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더라.
모든 적에게는 손속을 두지 않고 철저하게 말살한다.
이 구역 전체를 하나의 데드존(Dead Zone)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조직원들에게 세뇌에 가깝게 주입하고 있던 그때였다.
"호텔 입구로 누군가가 접근중이라고 합니다!"
초병의 외침에 모여있던 우리는 다급히 각자 위치로 흩어졌다. 나 역시 계단 아래로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순식간에 1층 로비로 내려갔다.
호텔 입구 앞에 쌓아둔 바리게이트에는 이미 여단장을 포함한 군인들이 총을 든채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깥은 웬일로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고 거센 바람만 불어닥치고 있었기에 시계가 '비교적' 깨끗했다.
한 군인이 주차장 너머로 서치 라이트를 비추자, 그곳에는 밝은 조명을 한몸에 받으며 비틀비틀 걸어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건 무언가에 의해 안구가 적출되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허름한 차림의 민간인이었다.
그는 낡은 지팡이로 지면을 탁탁 두들기며 더듬어오고 있었다. 그의 반대쪽 손에는 군용 무전기가 쥐여진 것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저쪽에서 사자(使者)를 보낸 것 같았다.
곧 여단장이 부하들의 만류에도 직접 나서서 장님으로부터 무전기를 받아들자, 장님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더니, 생명 하나가 얼마나 덧없이 바스러지는지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여단장이 가지고 돌아온 무전기에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평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음과 믿음, 심판과 구원, 퇴보와 승천. 골라야 할 길은 명백합니다. 부디 형자자매님들께선 신중한 선택을 하시길.
철컥.
우리는 서로 불필요한 말을 나눌 것도 없이 총기의 세이프티를 해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