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9화 (89/211)
  • 데드존(1)

    "후우."

    김창호 대통령은 지저 도시에 새로이 자리한 청와대 개인 관저에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앞에는 심신을 진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는 캐모마일 차가 은은한 향을 내뿜으며 조금씩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각하. 조금은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 조 실장."

    찻잔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김창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잠시 주변 사람을 물리고 방으로 들어온 조진하 비서실상이 재차 휴식을 권했다.

    선택받은 수십 만 서울 시민들과 함께 지저 도시에 입주한지도 어언 한달째. 김창호 대통령은 휘하의 고위 관료와 정책관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어려운 상황이니 만큼 지저 도시를 지탱해줄 식량과 물자 생산에는 특히 공을 들였으며,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중책들과 여러 법안의 검토하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회의를 가졌다.

    고작 한달만에 살이 10kg 가까이 빠졌을 정도이니, 안 그래도 살짝 마른 체형을 유지하고 있던 그는 수수깡 같은 노인처럼 보였다.

    조 실장의 휴식 권유에 김창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다가 마침내 찻잔을 집어들었다. 어느 장인이 수제작한 고급 찻잔은 이제 미약한 열기만이 아스라이 흘러나왔다.

    "몇 주 전에 국정원에 일을 좀 맡겼어요."

    "국정원이라면...혹시 이 지저 도시에 불순분자가 숨어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불순분자라면 불순분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깔끔하게 잘라내서 두 번 다시 마주칠 일이 없게 하고 싶었던 존재였다. 그걸 위해서 어마어마한 예산과 막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김창호는 반투명한 캐모마일 차의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대선에서 이기고 당당히 취임식에 나와 이 나라 국민들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희생하겠노라 선언했던 그때의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남겨진 것은 절대적인 진실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겁많고 옹졸한 늙은이에 불과했다.

    "지금도 종종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그것도 이제 막 사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된 청년들의 정신을 약으로 주물러서 죽음의 땅으로 내몰았던 일이? 조 실장, 난 그때 일이 아직도 꿈에 나와요."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그러했고, 자신은 그저 대한민국의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바통을 넘겨받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때 넘겨받은 바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또 그 바통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가 묻어있는지 알지 못 했다. 그저 자신 또한 숙련된 정치인처럼 행동하면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북한의 의도와 정황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러시아도 쉽사리 들어갈 수 없었던 죽음의 땅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한민국이 아니면 달리 어떤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었으며, 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일인 줄 알았더라면 안 했을 거에요. 나는 안 했을 거란 말입니다 조 실장."

    "......"

    "거기서 죽어나간 대한민국의 청년들만 몇 명이었죠? 백? 천?"

    "세간에는 완벽하게 감춰둔 사실입니다. 대부분 천애고아인 자들만 프로젝트에 기용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닌 자들도 있었어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작전을 17번이나 나가고도 살아돌아왔던 그 청년. 덕분에 17번이나 약물을 투여하지 않았던가요."

    조 실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과학기술도, 지식도, 실험 데이터도 불안정한 20세기가 아니었다.

    "MK-ULTRA 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정보가 새어나가기는커녕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세간에 알려지지 않을 겁니다."

    "모두 완벽하게 처리가 됐다면 말이죠."

    김창호가 보고서 한 장을 꺼내 넘겨주자 조 실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보고서를 넘겨받았다.

    분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보고서에 담겨있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

    "분명 그를 전역시키면서 '평생 박한화의 아들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세뇌시켜두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그 청년이 지금 지저 도시에 입주한 건지 설명을 해보세요."

    "이건...그러니까...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분명 마지막에는 약물을 한계까지 투여해서 중장갑수색대 출신이었다는 기억만 남겨두지 않았던가?

    약물을 투여한 의무관이 그에게 보고를 했었고, 혹시 몰라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기쁘게 전역하는 모습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다. 아주 작은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저 도시에 입주했다니?

    "조 실장은 내가 왜 해당 프로젝트와 관여된 사람들을 모두 지상에 두고 왔는지 알고 있겠죠."

    "...예."

    "그럼 내가 국정원에게 어떤 명령을 하달했는지도 예상하고 있겠군요."

    조 실장은 대답 대신 식은 땀을 흘렸다.

    김창호는 북한에서 있었던 일, 북한을 조사한 것으로 밝혀진 사실이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평생 모르길 원하고 있다.

    그저 보고를 받았을 뿐인 자신들도 그만한 내용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직접 보고했던 그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

    얼마나 진실에 접근했을까.

    조 실장은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혹시 모르니 디그러쉬의 움직임을 막아보겠습니다."

    "예, 수고해줘요."

    김창호는 이미 다 식어버린, 미약한 열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캐모마일 차를 들이켰다. 모든 일이 끝나기 전까지 그의 심신이 안정될 일은 없으리라.

    * * *

    "얼씨구."

    녹음기에 저장되어 있는 이름모를 대령의 기록을 조사할 겸, 잠시 외부 라운지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 왔더니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능구렁이 같은 인상으로 우리를 고기방패 삼으려던 작자가 복도 한복판에 널브러진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의 앞에는 낯이 익은 디그러쉬제 녹음기와 손전등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야간 순찰 중에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모양이었다.

    그의 앞에 떨어진 디그러쉬제 녹음기와 내가 가지고 있는 녹음기를 비교해보니 똑같은 군용 모델이었다. 하기야 준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개인 녹음기 하나쯤은 들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지.

    "근데 입 돌아가게 왜 이런 곳에서 주무시고 계실까."

    발로 툭툭 쳐서 깨울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나는 상식과 교양을 갖춘 문명인이라 친절하게 손으로 흔들어 깨우기로 했다.

    조금 힘을 줘서 거칠게 흔들어 깨우자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더니 곧 눈을 떴다.

    바닥에 뒤통수를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일어난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모양새가 꼭 술 퍼먹고 길거리에서 자다가 경찰이 불러서 깬 것 같은 노친네였다.

    어떻게, 해장 라면이라도 하나 맛깔나게 끓여드려야 정신을 좀 차릴까 싶던 찰나.

    대뜸 그의 시선이 내게 향하더니 화들짝 놀란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어어어어억?!"

    "뭡니까."

    "어, 어어...아아. 어제 들어온 젊은 친구였군. 갑자기 소리질러서 미안했네."

    "아니, 뭐...그 연세쯤 되시면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안 좋으니까 밤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닙니다. 너무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지른 것이리라. 200% 확신한다. 내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껄끄러운 타입의 인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웃어른인지라 손을 내밀어서 일으켜세워주었다.

    내 도움을 받아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발치에 떨어진 손전등과 디그러쉬제 녹음기를 집어들었다.

    "흠흠! 못 볼 꼴을 보였군. 그런데 자네는 이 야심한 시간에 어쩐 일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건가?"

    "도중에 잠이 깨서 잠시 혼자만의 은밀한 시간을 가질 겸 바깥 공기좀 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야심한 시각이 아니라 벌써 아침 7시입니다."

    "......"

    벌써 그렇게 됐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들, 내가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원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법이니까.

    나도 설마 몇 시간이나 야외 라운지에서 녹음기 내용을 곱씹으며 사색에 잠겨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 그럼 됐네. 이만 갈 길 가보게."

    우리가 호텔에 합류한 뒤부터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대하기 시작한 그는 내게 손을 휘휘 저었다.

    이게 정말로 위험한 부탁(한강변 조사)을 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싶다가도, 결국 한국군에서 별 달고 다니는 양반들이 다들 그런 법이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사라지는 그를 뒤로한 채, 나는 다시 조직원들이 머무르고 있는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른인 나와는 달리 조직원들 대다수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 그래도 몇몇은 찌뿌둥한 몸을 견디지 못했는지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혹한의 칼날이 불어닥치는 지상에서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받았으니 꿀잠을 자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이해는 하지만 놀러나온 게 아니란 것도 알아야지.

    아직까지 퍼질러 자고 있는 조직원들을 대충 발로 쿡쿡 찌르면서 하나씩 깨우고 있던 그때, 나는 유독 깊은 잠에 빠진 이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포착했다.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야! 일어나봐!!"

    한 두명도 아니고 누워있는 조직원들 대다수가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버린 것이, 마치 급성장염에 걸려 하루종일 화장실을 오간 사람 같았다.

    문제는 밤중에 나 이외에 이 연회장을 드나든 사람이 없다는 거다.

    "쿠흑...커헉! 오오오오옥!!"

    인상을 찡그린 채 기지개를 켜고 있던 또다른 조직원이 갑자기 벽에 기대어 서더니 거하게 토를 해댔다.

    누군가가 아침 댓바람부터 토악질을 해댄 것이 묘한 승부욕을 불러 일으키기라도 했던 걸까? 하나둘씩 일어나더니 저마다 토를 하거나 신음을 흘리며 중환자처럼 팔을 휘휘 저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일단 연회장 문을 박차서 바깥 공기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내부와 외부의 기온차가 심했기 때문에 금세 찬 공기가 연회장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정신을 차린 이들이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복도 바깥에 몸을 던졌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서늘한 곳을 찾아나서는 사람처럼.

    "이게 대체 무슨......"

    갑작스러운 이상 사태에 나는 머리부터 차갑게 식어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혹은 이런 사태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을 법한 것을 찾아나섰다.

    '공기가 통하지 않았나? 아니야. 일단 환풍구도 있고, 설령 문을 닫아뒀다고 해서 완전한 밀폐 공간이 되는 것도 아니야.'

    그럼 혹시 어젯밤에 다들 뭔가를 잘못 먹기라도 했나? 그또한 말이 안 된다. 수상쩍은 콩 스프가 요주의 대상이긴 하지만 조직원들에게는 먹이지 않았고, 조직원들이 먹었던 음식은 이곳 관계자들도 모두 함께 먹었다.

    그럼 누군가가 이들을 상대로 꺼림칙한 짓이라도 벌였나?

    "......"

    나는 분명 새벽에 깨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겸, 녹음기를 분석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돌아왔으니, 그 사이에 누군가가 이곳에 침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CCTV도 없고, 이 층을 지켜주는 군인이나 경찰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도 롯데호텔이 안전한 장소인 만큼 따로 불침번을 세워두지 않았다.

    모두 함께 쉬고, 함께 움직여서 최대한 조직원 전체의 컨디션을 맞추기 위해 불침번을 세우지 않은 내 실책이었다.

    '애초에 식사에 뭔가를 탔다면 그 여단장이라는 양반도 멀쩡했을리가...여단장?'

    내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그가 이 층 복도에 쓰러져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땐 그냥 야간 순찰을 돌다가 발이라도 헛디뎠겠거니 싶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내게 보인 반응이 정상적인 건 아니었지.'

    간밤에 심한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기겁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내가 연회장을 나선지 얼마 안 됐을 즈음, 그도 새벽에 이곳을 거닐다 침입자로부터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조직원들 중에서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있는 자들만 추려서 우선적으로 머리에 물을 뿌려 정신을 차리게 했다.

    속이 안 좋으면 우선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고, 다시 물을 뿌리거나 마시게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추려낸 사람이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도와줄 사람을 따로 올려보낼테니 너흰 우선 다른 애들부터 챙기고 있어! 특히 토하는 애들은 기도 안 막히게 고개 돌려주고!"

    "쿨럭! 쿨럭! 맡겨만 주십시오 한성 형님."

    "아오, 속이 왜 이렇게 안 좋지......"

    "야! 쟤 또 토한다! 자세좀 바로 잡아줘!"

    개인 장비와 무기를 모두 챙겨든 나는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와 메인 객실과 공용 공간이 존재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우우우욱! 우욱!!"

    "우리 애가 숨을 안 쉬어요!"

    "몸이 왜 이렇게 안 좋은...허억...허억!"

    이상 사태를 겪고있는 것은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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