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8화 (88/211)

호텔의 왕(3)

만약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디에 있는 흔하디 흔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과연 나같은 놈이 롯데호텔에 발을 들일 일이나 있었을까?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대단한 호텔답게 화려하군요."

고급스러운 멋이 돋보이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고, 호텔에 처음 입장하는 사람을 충분히 배려하는 듯한 전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유일한 흠이 있다면 호텔 전체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조명빨을 받는 인테리어를 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가 복도마다 듬성듬성 달아둔 헤드램프나 벽에 설치해둔 촛불 덕분에 눈뜬 장님이 되지는 않았지만, 호텔 내부 인테리어를 날것 그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군인들의 안내를 받아 '여단장'이 머무르고 있다는 VIP 객실로 이동하던 중, 나는 일반 객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어린아이와 마주쳤다.

양팔에 외골격 파츠를 달고 다니는 것이 퍽이나 신기해보였는지 어린아이답게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 외관을 보아하니 있는 집 자식이라기보단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이인 것 같았다.

"흥분하면 로봇으로 변신하는 형이야."

"우와! 그럼 레이저 빔도 쏠 수 있어요?"

"그건 내가 얼마나 흥분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아이에게 초코바를 나눠준 나는 다시 방안으로 돌려보냈다.

초코바를 건네받은 아이는 내가 사실 로봇이라는 비밀을 알았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뻐하는 눈치였다.

아이가 방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나는 앞서 걷고 있던 군인들에게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총경님은 물자가 풍족한 곳이라고 했는데,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피난민들에겐 물자가 제대로 보급되고 있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게...저희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그냥 위에서 시킨대로 1가구당 정량 배식을 지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량 배식의 양은 어느 정도입니까?"

"보급병에게 전해 듣기로는 1인당 하루 1천 칼로리 선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처럼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인당 2천 칼로리입니다."

턱없이 부족하다.

일단 안락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 지저 도시라면 식량 사정이 안정화되기까지 그렇게 보급해도 상관없겠지만, 여긴 안전하지도 않고 안락하지도 않은 지상이다.

추위를 견디는 것 만으로도 칼로리를 소모하는 마당에, 바깥에서 개고생하고 돌아오는 군인이나 경찰들에게 지급하는 칼로리가 기껏해야 2천 남짓?

'어쩐지 나이트워커의 기습에 맥을 못 추는 것 같더니만.'

나이트워커와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장비 사정이 열악해서도 아니라 '먹지 못해서' 라는 이유일 줄이야.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롯데호텔 내부의 감춰진 일면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롯데호텔은 시설 규모가 규모인 만큼 상당한 숫자의 피난민들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림짐작으로 때려맞춰봐도 천명 단위는 가뿐히 넘을 것 같았다.

모두 귀중한 노동력이자 미래의 희망이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모두 물자난에 시달리며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지? 서울 중심부에 떡하니 자리잡았다면 물자 확보도, 조직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텐데?'

이게 무슨 최대 효율로 손님 숫자를 유지하기만 하는 롯데호텔 타이쿤도 아니고.

일단 물자가 확보되면 무리해서 비축하기보단 조금 여유있게 풀어서 민심을 안정화 시키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의 눈은 퀭하고 분위기는 우중충하다못해 곰팡이가 필 것 같았다.

현대에 이르러선 먹지못해 굶주리던 북한군들이나 저런 분위기를 풍길 거라 생각했건만. 굶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한국인들을 저렇게까지 내몰았다는 건 그만큼 이곳의 시스템이 빡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앞으로 쭉 가시면 여단장님의 임시 집무실입니다. 덧붙여서 경찰과 군인들의 거주 공간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 층에 방문하기 전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주의하죠."

군인들을 돌려보낸 나는 조금 뻐근한 다리를 풀었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서 10층 이상 높이를 계단으로만 움직이다보니 조금 빡셌다. 흑야 사태가 발발한지 고작 이틀만에 끊어져버린 대한민국의 전력을 복구해야할 이유가 하나 늘었다.

여단장의 집무실 앞에 서있던 군인들은 이미 연락을 받았다는 듯 별도의 몸수색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이 층에 근무하고 있는 군인들의 숫자가 제법 되는 만큼 당사자인 여단장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다.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크 몇 번을 하고 들어간 집무실에는 책상 앞에 앉아 작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남성이 내게 턱짓했다.

"민간군사기업에서 팀 하나를 맡고 있는 박한성입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진현곤 대령으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어서 조금 흥미가 생겼습니다. 경찰도, 군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만한 수준의 장비와 사람을 이끌고 돌아다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

"대부분 사태가 발발하고나서 주인없는 물건들을 노획한 겁니다."

짧게 대답한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부드러운 접객용 소파에 앉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찻잔에 커피를 따라 내 앞에 내놓았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방금 막 탄 커피가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커피에 손대지 않고 자신의 배낭에서 꺼낸 생수로 가볍게 목을 축였다.

"솔직히 저는 여단장님께서 왜 저를 부르셨는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제 얘기를 전해들으셨다면 제가 군에 장비를 반납할 의사도, 군에 종속되려는 의사도 없다는 걸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진 대령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억지로 징집을 하려들면 즉각 반발할 것 같다더군요. 그래서 일단 얘기나 나눠볼 겸 이렇게 불러들인 겁니다. 대화를 해서 타협점을 찾는 게 서로에게 득이 될 테니까요. 안 그런가요 젊은 친구?"

"그 점에는 동의합니다. 저희를 배려해주고 있으시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서로의 의견이 극과 극으로 나뉠 것 같은데 대화를 한다고 해서 쉽사리 타협점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해석하면 당장 피죽도 못 먹는 양반들이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냐는 의미다.

하지만 나의 직설적인 화법에도 여단장은 싱긋 웃으며 자신 몫의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인스턴트 믹스커피가 아닌 원두를 직접 갈아넣은 고급 커피라 은은한 향이 일품이었다.

"바깥은 위험합니다. 지금도 서울 곳곳에는, 어쩌면 대한민국을 통틀어 전세계에 온갖 끔찍하고 기괴한 괴물들이 인류의 터전을 짓밟으며 침범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박 팀장님 같은 사람들은 무작정 떠돌기보단 안정적인 정착지가 절실하지 않습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히 롯데호텔 정도면 시설도 나쁘지 않고, 또 군인과 경찰들 덕분에 안전하기도 할 겁니다. 다만 저희가 이곳에 정착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해보이더군요. 예를 들면 물자라던가."

"으음, 아무래도 보호하고 있는 사람만 2천 명이 넘어가다보니 그 부분에 대해선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롯데마트와 인근 편의점, 호텔, 아파트 단지에서 대량의 물자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먹는 입은 많으니까요."

2천 명이라. 확실히 그만한 숫자라면 하루하루 소비하는 물자의 양만 해도 천문학적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365일 일으킨다면 또 모를까.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동력이 뛰어난 원정팀이 필요합니다."

"기동력이 뛰어난 원정팀이라면...역시 물자 확보가 최우선 과제라는 겁니까."

"예. 이곳을 지키는 군인과 경찰들을 오랫동안 바깥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너무 많은 수를 빼면 호텔의 보안이 취약해지고, 소수 정예만 멀리 내보내자니 안전성이 걱정됩니다. 그 점에서 박 팀장님이 이끄는 소수 정예 집단이라면 그런 조건을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 호텔에 당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인원으로 서울을 헤집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기에 일단 침묵을 지켰다.

우리같은 밀수조직은 지저 도시라는 집과 몇몇 전초기지들을 보험으로 두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최대 이틀 이상 지상을 마음 놓고 돌아다녀본 적은 없다.

하지만 여단장은 내 침묵이 곧 긍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 앞에 프린트된 일반적인 서울 지도를 펼쳐놓았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자도 물자지만, 깨끗한 물과 생활 인프라를 복구하기 위한 전력 공급입니다. 2020년 초반, 지저 도시에 깨끗하게 정수된 지상의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한강에 대규모 정수처리시설과 발전소를 건설했다는 건 알고 있겠지요?"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 다만 실용성에 비해 돈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결국 지저 도시가 아니라 서울에 물과 전력을 '보조 공급' 하는 형태로 용도를 바꿨다고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지저 도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꽤 많은 계획들이 서울에서 우후죽손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저 도시에 부족할 물을 공급하기 위한 대규모 정수 처리 시설이었고, 또 그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발전소까지 지은 건 덤이었다.

다만 수직 12km 길이의 대형 파이프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 또 2020년대 중반 쯤에 지저 세계에도 지하수로 구성된 호수나 '바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해당 계획은 계륵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벌려놓은 게 있어서 전면백지화는 불가능했고, 하는 수 없이 수도권에 물과 전력을 보조 공급하는 형태로 남게 된 것이 국가규모 삽질의 전말이다.

"최소한의 인프라가 유지되는 것으로 생활이 윤택해지면 물자를 확보하는 것도, 또 자체적으로 물자를 생산해내는 것도 아주 꿈은 아니게 됩니다."

"즉 집을 오래 비울 수 없는 군인과 경찰들을 대신해 우리들이 한강까지 내려가서 정수 처리 시설과 발전소를 확보해주길 원하는 겁니까. 안전한 정착지에서 살 수 있다는 것 하나로 퉁치기엔 책임이 너무 막중한데요."

누가 별 달고 있는 인간 아니랄까봐 아랫것들을 고기 방패로 내세우는 게 아주 몸에 뱄다.

내가 살짝 볼멘소리로 답하자 여단장은 손사래를 치며 오해하지 말라는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우리도 그렇게까지 염치없게 굴 생각은 없습니다.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이 호텔의 일부 영역을 그쪽에게 영구적으로 양도하겠습니다. 또한 그쪽만의 방식으로 자치권을 인정할 생각입니다."

"호오."

언뜻 들어보면 좋은 조건이지만 나는 그 말속에 숨어있는 함정을 어렵지않게 잡아냈다.

저건 쉽게 말하자면 호텔의 남는 공간을 선심쓰듯 조금 내주면서 우리의 방식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목숨 걸고 성공시킨 일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거기에 은연중에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만 2천 명이 넘으니, 인정에 호소해서라도 우리를 자발적으로 희생하게 만드려는 속내가 느껴졌다.

아마 평범한 호구였다면 좋답시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겠지. 그리고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서울 중구 아래로 내려가서 개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죽으면 자기 탓이지만, 성공하면 이 계획을 입안한 여단장의 공이 되는 어부지리 작전.

더럽다 못해 구토가 올라올 것 같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랑 취향은 잘 맞는군.'

그쪽이 부담없이 내던져서 희생시킬 고기방패를 원한다면, 이쪽도 죄책감없이 이곳을 집어삼킬 수 있다.

"그런 조건이라면 해볼만 하겠군요. 성공하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도 도움되는 일이니까요."

가볍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자 여단장은 능글맞게 웃으며 내 악수를 받아주었다.

"그럼 저희가 나서기 전에 잠시 이곳에 정착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가능하면 환영 파티도 열어주시고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우선 남의 물자로 생색이나 좀 내볼까?

호텔의 ⠥⠱⠢

-철저하게 주변을 살펴. 놈들이 얼마나 더러운 짓을 저질렀는지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내서 기록해.

-그럼 활동 가능 시간을 훌쩍 넘기게 됩니다. 작전 범주 외의 일을 하는 것은 리스크가......

-아가리 닥쳐 씨발놈아. 꼬우면 돌아가서 마편으로 찌르든가.

-......

이미 정리가 끝난 호텔 연회장 구석에서 조직원들과 함께 모여앉은 나는 입가에 가져가던 콩 스프를 그만 볼에 묻히고 말았다.

"씨발놈이."

"?"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손을 휘휘 젓자 즉각 반응한 몇몇 조직원들이 다시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 8시.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 여단장이라는 작자에게 조촐한 환영식이라도 열어달라고 했더니 정말로 사람들을 모아서 환영식을 열어주었다.

정작 집단의 주요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는 민간인들은 온데간데없고, 군인과 경찰들만 참석했다는 게 유머였지만,

우린 아직 객실을 배정받지 못 했기 때문에 일단 오늘 하루는 넓직한 연회장을 숙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롯데호텔은 객실이 무려 1천 개가 넘어가는데 어째서 객실을 배정받지 못 했느냐고? 대부분은 2천명이 넘는 민간인들에게 배정되었을 뿐더러, 아예 객실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중인 객실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 기분이 언짢은 건 우리가 귀한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객실을 배정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새끼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봤어요?"

"......"

나는 희멀건한 콩 스프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김명호에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반응을 묻는 질문이었다.

맞은 편에서 탄창에 탄약을 한발 한발 끼워넣고 있던 김명호가 내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치켜떴다. 그 역시 나 못지 않게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이런 상황에도 환영식을 열어달라고 억지를 부렸던 건 이 호텔의 실질적 권력자들이 얼마나 아랫사람을 챙기는지 보고싶어서 였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정말로 물자가 부족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 부족할 걸요."

땡그랑.

내가 손을 내려놓자 그릇에 부딪친 숟가락이 맑고 청아한 소음을 자아냈다.

"환영식이 진행중일 때 돌아다니면서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몰래 돌려봤어요. 그 사람들이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선에서. 덧붙여서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다함께 모여서 식사할 일이 많냐는 질문이었어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공통된 대답들 중 하나가 좀 특이했는데, 한 번에 많은 인원을 대상으로 식사 추진을 하지 않는다더군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아랫것들끼리 서로 비교하고, 불만을 품고, 그 불만을 토대로 공감대를 형성해서 윗사람들에게 반발하지 못 하게 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눈 뜨고 코 베였다는 얘기다.

"제가 알아보니 외부 작전을 나가는 인원들은 하루 평균 2천 칼로리 배식을 받고, 그렇지 않은 민간인들은 1천 칼로리로 제한되어 있다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 배급하는 양을 속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예를 들어 라면이나 과자 같은 칼로리가 표시된 식료품을 그대로 지급하면 속이기 힘들지만, 미리 조리해서 양을 나눈다음 따로따로 배식을 하는 형태라면 어떨까요? 라면 한 그릇이 라면 반쪽만 넣은 한 그릇일수도 있고, 주먹밥 한 덩어리도 밥 한공기에 못 미치는 양일 수도 있겠죠. 당장 이 콩 스프만 봐도 답이 나오잖아요?"

나는 맛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는 콩 스프를 내보이면서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소금 간이나 후추 간도 되어 있지 않아서 내가 먹는 게 콩 스프인지 콩맛이 나는 걸쭉한 물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웃긴 건 경찰, 군인, 소방관들은 또 이걸 맛있게 먹어치웠다는 거다. 마치 피죽도 못 먹고 쫄쫄 굶다 진수성찬을 대접받은 거지들처럼.

"환영식에는 소량이긴 해도 냉동육이나 국, 면 요리도 제법 나왔었죠. 그런데 그중에 음식을 가려먹는 건 대부분 장교나 간부들 뿐이었고, 휘하의 부하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막 먹어대더군요. 딱 보면 알잖아요? 평상시에도 식량 배급에 차이를 두고 있어요."

"폭로라도 하실 겁니까?"

"설마요. 그냥 좋게좋게 넘겨야죠. 고작 그런 걸로 꼬투리를 잡는 것보다 확실한 한 방을 찔러넣는 게 더 낫잖아요?"

애초에 내가 그걸 폭로하고 싶다고 해서 폭로할 수는 없다.

식량을 관리하는 보급계와 보급병들이 사전에 매수되어 고위직에게는 문자 그대로 정량 배식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 판국에 작동하지도 않는 CCTV를 까보자고 할 수도 없고.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물자 횡령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당장 지저 도시만 해도 서로 횡령하려고 안달난 놈들 천지 아니던가. 나도 그중 한 명이니까 횡령의 기쁨과 쾌락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다만 횡령범일지라도 마음씀씀이에 따라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힘 내야 하는 부하들을 위해 기록을 속여서라도 조금 더 많은 식량을 배급해주는 횡령범이었다면 눈물을 머금고 박수라도 쳤겠지.

하지만 이 집단을 이끌고 있는 윗대가리들은 근본부터 썩어빠진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이 구상하고 있는 미래 계획에 부하들은 그저 고기방패 취급일 뿐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이 호텔의 왕이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수상한 점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

나는 희멀건 콩 스프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불어터지다 못해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하는 콩 쪼가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이 스프는 유통기한이 지난 것처럼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정수가 덜 된 물을 사용했나? 썩은 콩을 사용했나? 아니면 양을 속이기 위해 그럴듯한 단백질 덩어리를 섞어넣었나?

혹시 몰라 조직원들에겐 콩 스프를 먹지 말라고 주의해뒀지만, 나는 조촐한 환영식이 끝나고 모든 인원이 연회장을 벗어나기 전까지 이 콩 스프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호텔측 노동력이 이 콩 스프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으니 꽤 자주, 많이 먹어봤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들 덕분에 이 음식이 안전하다는 게 증명된 것 아닌가?

-역겨운 새끼들.

"으음......"

숟가락을 휘적휘적 젓던 나는 마지못해 한 숟갈 퍼서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나 맛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식감조차 0점인 콩 스프였다. 말랑말랑하게 씹히는 듯 하다가도 퍼석하게 바스러지는 콩 쪼가리들은 내가 지금 6.25 전쟁을 겪고 있는 피난민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들이 먹었던 꿀꿀이죽도 이 콩 스프보단 퀄리티가 높지 않았을까?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이런 걸......

"쿨럭! 흐읍! 더럽게 맛이 없어서 그런가, 몸에서 받아주지도 않네."

추위에 오래 시달렸기 때문인지 괜스레 시큰거리는 오른손으로 적당히 그릇을 밀어냈다. 저 빌어먹을 콩 스프는 두 번 다시 먹지 않으리라.

내일 아침은 콩 스프에 대신 개인 휴대식량이라도 까먹을 생각으로 푹신한 연회장 카펫 위에 몸을 뉘였다.

주변이 조용하다.

조용하면 잠이 잘 온다던데 나는 오히려 생활 소음이 조금 있는 것을 좋아한다.

후임들과 함께 병상에 누워 눈을 감기 전 시답잖은 잡담을 떠들면서 자연스럽게 잠드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전역하면 일본 여행 가서 밀리애니 극장판을 보고 오겠다던 놈, 나가자마자 여자친구를 사귀고 모텔에 직행해서 루삥뽕을 하겠다던 놈, 경력을 살려서 몸 쓰는 직장에 취직해보겠다던 놈 등등.

우리는 입만 열면 '전역하면 XX 할 거다' 라는 주제로 떠들어댔다.

그러다 하나둘씩 잠들고, 마지막까지 깨어있던 나는 숨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광경을 봐야 하는 거지?'

항상 모두가 잠들고 나만 깨어있을 때 되뇌였던 질문이다.

나 외에 그 누구도 듣지 못 했던 비운의 질문이기도 하다.

'이런 몽롱한 기분을 몇 번이나 더 느껴야 하는 거지?'

돌아오면 주사를 맞고, 잠들고, 깨어나면 다시 작전을 나가고.

그 과정에서 후임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도, 내가 알던 후임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내 후임 행세를 해도.

나는 언제나처럼 후임들을 갈구면서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다.

"......"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렇지만 완전한 정적은 아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헤드램프를 끄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들어 있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어찌나 곤히 자는지 이따금 코를 골거나 이를 갈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으로 이 정겨운 소음 속에서 잠드는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깬 나는 나른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디지털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새벽 3시였다. 다소 이른 저녁에 잠들었으니 이런 시간에 깨는 것도 당연했다. 누가 보면 새벽부터 지상 작전을 나가는 줄 알겠네.

어둠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내 배낭을 찾아 개인 장비를 착용하고, 다른 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진성 꼴초였다면 이대로 화장실에 가서 큰일 보며 담배 한 대 태웠겠지. 꼴초들은 그게 묘미중의 묘미라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다.

'군대에서도 피워본 적이 없는 담배맛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우드득 우드득.

연회장 내부와는 달리 다소 쌀쌀한 기온이 감돌고 있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연회장이 꽤 높은 층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층 하나를 사실상 통쨰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 층을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딱 좋은 시간대에, 딱 좋은 위치에서 나홀로 자유를 만끽하게 됐다.

"전부 기록해야지."

나는 일전에 아파트 단지에서 가져온 한 이름모를 대령의 디그러쉬제 녹음기를 꺼내들었다.

손에 착착 감기는 이 그립감.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친근하다.

치익.

손에 너무 익은 녹음기라 그런지 저도 모르게 익숙한 솜씨로 재생 버튼을 눌러버린 것 같다.

-철원에 주둔중인 전방 부대로부터 정기 연락이 오지 않는다. 분명 시간 단위로 정기 연락을 돌려서 최전방 주둔군들이 서로 동요하지 않게끔 각별히 신경쓰자고 제안했던 건 저쪽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통신 문제라도 발생한 건가?

-강원도지사로부터 자신을 피신시켜 달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군이 멋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단칼에 거절했다. 이미 군을 통솔하는 대통령도, 지시를 내려줄 합참의장도 없다.

-곧 서울로 내려갈 계획이다. 최전방 주둔군은 하나둘씩 연락이 끊어지기 시작했고, 사실상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병사들의 불안감도 나날이 높아져가고 있으니 서둘러 '안전한' 서울로 후퇴해서 우리만이라도 살아날 길을 모색해야 한다.

-젠장, 설마 삼각산동에 그런 괴물들이 있을 줄이야. 너무 많은 부하들이 희생되었다.

-중장갑보병은 모두 지저 도시로 후퇴했다면 최전방에 주둔중인 중장갑수색대와 중장갑타격대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지? 그 괴물같은 놈들이라면 이런 상황에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설마 그 새끼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줄은...멍청한 새끼들! 삼각산동에서 확실하게 끝장을 냈어야지!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얼른 도망쳐야...놈들이 온다!!

-빛, 빛이 필요...아니! 필요없어! 빛은 필요없어! 이대로도 충분해! 빛은 필요없으니까 제발......

-제발 살려줘......

손상된 기록

"연구는 잘 돼가고 있나?"

"아, 여단장님. 표본이 많아서 그런지 유의미한 데이터를 다수 확보 했습니다. 이 데이터를 토대로 조금 더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조만간 결과물을 보고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군."

다른 이들이 그를 부르기를 여단장.

수도권의 높은 분들과 끈이 떨어진 탓에 사실상 준장으로 군 생활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던 김현상은 흑야 사태 이후, 완전히 뒤바뀐 세상에서 놀랄만치 빠르게 적응했다.

지저 도시에 입주하지 못한 그는 경기도권에서 제대로 된 지시 사항도 전달받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소규모 군 부대를 조금씩 규합해서 서울로 이끌고 올라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민간인 인재부터 노동력까지 닥치는대로 긁어모아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았다. 롯데호텔이라는 주인없는 요새를 때마침 발견하지 못 했더라면 애좀 먹었으리라.

"후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하겠나?"

그 나름대로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하는 파이프 담배를 꺼내 잘게 부순 담배잎을 뭉쳐서 태우며 물었다.

그러자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흰 가운 차림의 남자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곧 김현상이 원하는 대답을 내뱉었다.

"검체 표본은 지금보다 2배 이상은 더 필요합니다. 실험 표본은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2천 명이면 충분하겠지요. 2천 명 정도면 통계를 내는 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실험 방식은 지금처럼 똑같은 방식을 고수할 건가? 슬슬 식사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네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부작용은 상정했던 결과입니다. 아무래도 '영양분'이 없으니 양껏 먹어도 배는 찰지언정 알멩이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이제와서 실험을 중단하자니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자네가 전문가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마는, 역시 시간이 문제야. 외부로 돌리는 인원을 최소화하면서 사람들이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없게끔 신경쓰고 있지만, 생활 환경이 나날이 열악해지고 있어. 전기와 수도를 빨리 확보하든가, 아니면 이 실험이 성공하든가, 둘중 하나를 기원해야 하는 상황이야."

"그러고보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외부인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전기와 수도 복구를 의뢰하셨다던데...바로 옆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는 장비제작반 친구들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더군요. 아무래도 비상발전기로 전기를 나눠 쓰는 건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연구원의 말에 김현상은 파이프 담배 끝을 톡톡 두들겨서 탄맛만 나는 재를 조금 떨쳐냈다.

"스스로를 PMC, 민간군사기업이라고 소개한 친구들이었지. 이 시국에 위험한 바깥을 돌아다니며 자체적으로 장비를 노획하고 무장했던데, 대충 살펴봐도 제 몸 하나 건사할 능력은 있어보였어. 그런 친구들이라면 실험 표본으로 쓰기보단 우리가 당장 할 수 없는 일을 맡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아니면 그들도 실험 표본으로 삼길 원했나?"

"실험 표본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저도 개인적으로 전기와 수도가 정상적으로 공급되길 원합니다. 그 능력있는 친구들이 일을 대신해준다면 한시름 덜 수 있겠지요. 그리고 만약 성공한다면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겁니다."

전력 공급이 원활해지면 당장 부담스러워서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온갖 연구기기와 고성능 PC를 사용할 수 있게 되니, 김현상도 그 점에 대해선 연구원과 같은 의견이었다.

"아, 다른 연구원들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장비제작반에서 이번에 새로 만든 광과민성 발작 유발 장치는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다더군. 그 괴물 놈들이 다양한 패턴의 빛을 쬐면 버티지 못하고 무력화된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네. 다만 원거리에서 저격을 당한 탓에 장치가 박살나버렸지만."

"제 연구 결과가 좋은 쪽으로 먹힌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래. 장비제작반에서 구닥다리 클럽 디스코 볼을 활용해서 만든 광과민성 발작 유발 장치는 눈앞의 젊은 연구원이 내놓은 연구 결과의 부산물이었다.

"역시 그것들은 빛에 취약한 건가?"

"반대입니다."

"반대?"

"빛에 취약한 게 아니라, 빛에 지나칠정도로 집착하는 놈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마치 식물이 원활한 광합성을 하기 위해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줄기와 잎사귀를 뻗는 것처럼, 놈들도 가능한 많은 빛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에 따르면 놈들은 과도한 빛에 노출되면 쉽사리 무력화되거나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그런데 빛에 집착한다는 건가?"

"그거야 일개 개체가 감당할 수 있는 빛의 흡수량을 넘었기 때문이지요. 빛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각기관이 눈인데, 놈들의 눈 구멍은 뻥 뚫려서 안쪽이 검은색으로 보입니다.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이 선글라스를 쓰는 것과 비슷한 이유 아닌가?"

"아닙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모든 빛을 효율적으로 흡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시각기관이 '검은색' 인 겁니다."

우드득.

오랫동안 굽혔던 등허리를 편 연구원은 자신의 등을 주먹으로 톡톡 두들기면서 서류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어째서 놈들에게 '영양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양광 패널처럼 빛을 받아들여서 순수한 에너지로 사용하는 놈들인데 당연히 영양분이 없을수밖에 없지요."

식물처럼 에너지를 저장하지도, 다른 영양분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마치 기계처럼 빛을 흡수하고, 에너지를 사용할 뿐이다.

저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들은 모두 빛에 굶주려있는 놈들이다.

"저는 저것들이 꽤 오랫동안 빛을 흡수하지 못해 동면상태에 빠져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어떤 일을 계기로 동면 상태에서 깨어났고, 지금껏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악랄한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미친듯이 지상을 활보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뜬금없군."

"저같은 연구자 나부랭이들은 원래 뜬금없는 가설 세우기를 좋아합니다. 연구를 하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하는 무한한 굴레에 빠져사는 족속들이지요."

알콜 냄새가 나는 소독용 티슈로 손을 박박 문질러 닦은 그는 자신의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읖 뒤덮고 있는 저 검은 장막같은 것도,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무언가를 뽑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어둠 속에서 습격하는 괴물들도, 갑자기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처럼 이 세상에 뿅 하고 나타난 건 아닐 겁니다. 물론 저는 거기서 '빛'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렸을 뿐인 일개 연구자에 불과하지만요."

"이래서 전문가라는 친구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천성같은 거라서요. 하지만 이 천성 덕분에 저는 인간도 어쩌면 그 괴물들과 비슷한 성질을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만으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추위, 배고픔, 그리고 어둠이라는 근원적인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인간도 시대와 환경에 맞게 변화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빙하기에 체온과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더 많은 체모와 지방보존능력을 가지게 된 고대 생물들처럼.

지금의 인간들에겐 아주 약간의 변화만 있으면 된다.

"뭐가 됐든 난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네. 내 손으로 이 모든 사태를 종결시키고, 저들끼리만 멋대로 지저 도시에 도망친 배신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단 말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다소의 희생은...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파이프 담배를 갈무리한 김현상은 젊은 연구원을 뒤로한 채 개조된 객실을 빠져나왔다.

인간이 이 지독한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다면, 더이상 추위와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면,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자신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왕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려면 눈엣가시같은 총경과 경찰들을 솎아내야겠지만, 당장은 사람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군.'

이 층을 통째로 연구자들에게 배정한 김현상은 복도에서 경계 근무중인 군인들에게 몇 마디 격려의 말을 건넨 뒤, 조용하고 싸늘한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노쇠한 몸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만큼 짜증나고 힘든 일도 없지만, 그는 운동하는 셈 치고 하루에 두 번씩은 꼭 이렇게 연구동까지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호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지만, 객실의 반 정도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쪽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람이 추가될 때마다 객실을 하나씩 배정해준다면 이 호텔을 책임지고 있는 의미가 없다.

아랫사람들에게는 항상 엄격한 권력자처럼 보여야 한다. 무작정 친절하고 베풀기만하는 선인이 되면 금세 얕잡아보이기 때문에 권위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

결과만 놓고보면 피난민들의 삶은 더욱 각박해졌지만, 김현상을 비롯한 군 고위 간부나 라이벌인 경찰 세력의 권위를 지키는 것은 성공했다.

'이 상황도 저 껄끄러운 연구가 끝날 때까지만 유지하면 된다. 연구가 성공하면 더이상 사람들을 억압하고 무작정 제한할 이유가 없어.'

그때가 되면 자신은 선지자 대접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망해버린 서울, 나아가서 대한민국을 싹 뒤집어 엎는 거다.

지금은 치기없는 꿈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실험체 삼아 연구하는 건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처음은 아니니까.

건너다리로 전해들은 것이지만, 분명 최전방 부대를 대상으로 어떤 연구를 진행했다던 음모론 같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밤잠이 적다는 게 유일한 위안...음?"

한창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자신의 손전등 불빛에 반사광을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복도 중앙에 떡하니 놓여있는 그것은 군 장성인 그에게 제법 낯이 익는 물건이었다.

"이건...디그러쉬제 녹음기로군."

군 장성, 영관급 장교들에게 의무적으로 지급되는 디그러쉬제 녹음기다.

내구도가 튼튼하고 녹음시 음질 저하 문제도 덜 발생하기 때문에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제품중 하나였다.

당연하지만 김현상도, 그의 부관인 진현곤 대령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주로 중요한 내용을 깜빡 잊어버리지 않도록 녹음해두거나, 실제 기록물로 남길 수 없는 민감한 내용을 음성으로만 기록해서 보관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많이 쓰였다.

그런데 이 귀하다면 귀하다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왜 호텔 복도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지 당최 알 도리가 없었다.

일단 군용 물건인 만큼 자신이 맡아두기로 한 김현상은 다시 손전등을 들었다.

그 순간, 어둠속에서 날아든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크윽......!"

난데없는 기습에 권총을 뽑을 수도, 비명을 내지를 수도 없었던 그는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보는 게 고작이었다.

어둠 속에서 감히 자신을 기습한 것도 모자라 당당하게 목을 조르고 있는 이 파렴치한 괴한이 대체 뭐하는 말뼈다귀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바닥에 내팽개쳐진 손전등은 미묘하게 다른 각도로 빛을 보내고 있었기에 괴한의 모습을 완전히 눈에 담는 건 어려웠다.

"커..끄흐......!"

시야가 점차 흐려지고 몸에 힘이 빠지던 그때.

김현상은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던 단단한 손이 풀린 거을 느꼈다.

정신을 잃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누구인지도 모를 상대가 널브러진 자신을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는 뒷모습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