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7화 (87/211)
  • 호텔의 왕(2)

    나는 조직원들과 함께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잠시 지켜보았다.

    한쪽에선 영관급 군 장교들이 군인들을 갈구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총경이라는 군 고위 간부가 경찰들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불똥이 튀지 않은 것은 우리처럼 윗대가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소방관들 뿐이었다.

    군인이나 경찰에 비하면 수가 적은 소방관들은 다른 이들을 눈치를 보면서도 솔선수범해서 장비를 정리하고 짐을 옮겼다. 그 모습이 꼭 강대국 사이에 불쌍하게 낀 약소국처럼 보였다.

    "한성 씨는 이 상황 어떻게 보십니까?"

    "엿같네요."

    한쪽 다리를 절면서 다가온 김명호가 그렇게 묻자 나는 짧막한 감상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군인과 경찰이 서로 화합을 하기는커녕 서로 반목하고 있어요."

    "서로간에 간섭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저렇게 대놓고 다른 조직 앞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갈구고 있는 시점에서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대한민국 경찰과 군대는 모두 제 식구 감싸길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절대로 타 조직 앞에서 자기 애들 까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감싸주면 감싸줬지."

    당장 군대만 해도 서로 부대가 다르면 장교나 간부들이 제 새끼들 감싸느라 바쁜 마당에, 경찰과 군대가 저런식으로 자기 부하들을 공개갈굼한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부하들을 갈군다는 건, 자극받아서 다른 조직보다 더 잘하라는 의미로 다그치는 거라고 봐야 해요. 조직간에 화합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죠."

    "경쟁 조직보다 공을 더 크게 세우라는 의미로 저렇게 갈군다는 겁니까?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극성맞은 부모가 다른 집 자식 앞에 두고 자기 자식을 혼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에요. 누구누구는 성적이 이렇게 잘 나왔는데 너는 그 성적으로 밥이 목에 넘어가냐느니, 게임이 재밌냐느니 같은 말로 자극하면 자식 입장에선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어요?"

    정확히는 분노가 끓어올라서 더 열심히 하게 되거나, 더 열심히 엇나가게 되는 극단적인 결과만 나오겠지만.

    "보통은 자기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아랫것들을 치하해주고 다독여주는 게 윗사람이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런데 이미지 관리도 신경쓰지 않고 저렇게 나온다는 건 대놓고 다른 조직과 경쟁중이라는 거죠. 아무래도 경찰과 군대 간에 이권 싸움이 붙은 모양이에요."

    "이 시국에도 서로 돕지는 못할 망정 싸운다는 게 참...하물며 우리같은 밀수조직도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뒤가 있잖아요. 저 사람들은 뒤가 없죠."

    뒤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극한까지 내몰리게 만드는지에 대해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줌 안 되는 권력이라도 안전하게 붙들고 싶은 것이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특히 뒤가 없는 사람일수록 불안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멸해버리니, 모든 것을 본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제 3자 입장에서 보기엔 처량하면서도 갑갑해보이는 방식이다.

    도움을 주자니 껄끄럽고, 빼앗자니 양심의 가책에 시달릴 것 같고, 완전히 파괴해서 다툼의 근원을 없애자니 이쪽의 손해만 커질 것 같다.

    나는 저렇게 세력간의 이권이 걸려있는 다툼에 끼어드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차라리 처음부터 내가 개입할 수 있는 판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망가질대로 망가진 판에 끼어든다면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길 포기하는 건 쉽지 않다.'

    눈보라 때문에 건물 전체의 윤곽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롯데호텔의 웅장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 수준도 좋은 긍정 평가 1위 호텔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 시설 전체를 장악할수만 있다면 기꺼이 더러운 판에도 끼어들 의향이 있었다.

    이 호텔은 그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쪽은 뭐하는 분들이요?"

    '슬슬 우리한테 말을 걸어올것 같더니만.'

    한창 자신의 부하들을 갈구고 있던 총경쪽이 먼저 한쪽에 모여있던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실 조금 전부터 엑소스켈레톤으로 무장한 우리가 신경쓰여서 견딜 수 없었겠지.

    이미 조직원들과는 입을 맞춰둔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모두를 대신해 앞으로 나섰다.

    "PMC 입니다."

    "PM...뭐?"

    "PMC, 민간군사기업입니다. 국제 용병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아, 용병. 그런데 용병들치곤 무장이 좀 과한데? 대한민국에서 이만한 무장이 허가된 용병이 있었나?"

    "세상이 이 지경이 됐을 때 저희가 자체적으로 수집한 장비들입니다. 살기 위해서 주인없는 장비들을 많이 가져다 쓴지라 복장에 통일성이 없어보이는 건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양해. 물론 양해해드려야지. 그런데 대한민국 경찰과 군대의 장비를 민간인이 그렇게 막 가져다 쓰면 안 되는 거 모르나? 지금이야 국가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경찰이야. 공권력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면 좀 그래."

    자기들도 경찰치곤 과무장하고 돌아다니면서 주인없는 장비나 물자를 노획하고 있는 주제에.

    물론 그렇게 대놓고 따지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은 불보듯 뻔했기에, 나는 차라리 넉살좋은 용병 컨셉을 쭉 밀고 나가기로 했다.

    "경찰도 용병도 다 똑같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 험난한 시대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한 건데 그 정도는 정상참작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이 모든 사태가 원만하게 끝나면 당연히 저희들도 무장을 반납할 생각입니다."

    이 모든 사태가 그렇게 빨리, 원만하게 끝날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유일한 흠이지만.

    하지만 우리가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총경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우리가 공권력 앞에서 맥을 못 추는 민간인 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보니까 군용 엑소스켈레톤에 총화기, 장갑차에 이상한 운반차량까지. 전부 한국에선 민간인이 소지할 수 없는 물건들 뿐인데,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공권력의 지원을 받는 게 좋지 않겠나? 우리가 당신네들 신원 보증을 해주는 대신에 당신네들이 우리 일을 임시로 도와주는 거지."

    "이미 충분히 큰 조직을 이끌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굳이 우리같은 민간인들 도움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일손이 턱없이 모자란 판국인데 민간인 여부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겠나. 그보다 우리가 점거하고 있는 호텔은 충분히 넓고 물자도 풍족하니까 당신네들 받아주는 건 어렵지 않아. 그러니까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깥을 정처없이 떠도는 것보단, 차라리 우리처럼 정착해서 제대로 된 단체 생활을 해보는 게 어때?"

    그냥 대놓고 숙식만 제공할테니 죽어라 부려먹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린 제안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부려먹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니면 우리처럼 무장을 잘 갖춘 민간인들을 부려먹는 게 더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세력을 키우려 한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당연히 경찰 세력이 커지는 것을 가만 두고볼리가 없는 군인 쪽에서도 반발이 나왔다.

    "잠깐. 전시체제에 의하면 모든 민간인과 장비에 대한 징집, 징발 권한은 군대에 있는데 경찰이 무슨 권한으로 그 사람들을 거둔다는 거요!"

    "거둔다니. 거 빡빡한 집단 아니랄까봐 표현 하고는 참...우린 그냥 협조를 부탁한 겁니다."

    "협조는 무슨. 그리고 장비를 보아하니 전부 우리 군의 장비인 것 같은데, 당연히 소유권이 이쪽에 있는 이상 군에 합류시키는 게 도리 아니요?"

    "거 말도 안되는 억지는 부리지 맙시다. 엄연히 민간군사기업이라고 하는데 왜 군대에 묶어두려고 합니까?"

    "그럼 장비들만이라도 우리가 도로 회수해 가야겠군."

    장비들을 회수해가겠다는 억지 논리에 조직원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지금이야 우리가 적당히 맞장구나 쳐주며 분위기에 어울려주고 있지만, 만약 상대가 먼저 선을 넘으면 즉시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계획에도 없는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다소 강경한 태도로 나갔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자기보호 수단은 필수인데, 그걸 빼앗아가겠다는 건 조직이 개인의 목숨을 위협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장비가 군의 물건일수는 있으나, 상황이 상황인만큼 돌려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군법대로 처리해야지. 전시상황에서 민간인이 군의 지침을 따르지 않고 군의 장비까지 노획해서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즉결처분을 해도 불만은 없을 것 아닌가?"

    철컥.

    그가 장교용 권총을 뽑아들자 다른 장교들도 권총을 뽑아들었다. 자연스럽게 군인들 역시 총에 손을 가져다댔지만, 나는 손을 들어올려 조직원들이 반발하려는 것을 막았다.

    "서로 선을 넘지는 맙시다. 우리가 비록 민간군사기업 소속 용병이긴 해도 인생 막 사는 양아치들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바탕 싸우면 사람은 사람대로, 장비는 장비대로 상하게 될 그쪽이 더 큰 손해 아닙니까?"

    "그게 싫으면 순순히 군의 지침에 따라야지."

    "이쪽은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만 20명이 넘어가는데 진지하게 한판 붙어보자는 겁니까?"

    "민간인들이 군용 엑소스켈레톤을 잘 다루면 얼마나 잘 다루겠나. 괜히 허세부리지말고 좋게좋게 넘어가지?"

    그 말에 조직원들이 낮게 코웃음쳤다.

    지금 밀수조직은 중장갑보병들보다 훨씬 더 엑소스켈레톤을 잘 다룬다.

    온갖 악천후 속에서 목숨 걸고 지상 작전을 강행하며 엑소스켈레톤 실전 운용법을 배웠는데, 기껏해야 훈련만 받은 게 고작인 중장갑보병들보다 엑소스켈레톤을 못 다룬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용병도 엑소스켈레톤에는 익숙합니다. 오히려 훈련만 받는 군인들과 달리 실전에서 사용하는 일이 많아, 엑소스켈레톤을 자기 몸처럼 다루는 건 일도 아닙니다. 아니면 여기서 단체로 엑소스켈레톤 곡예단이라도 선보여야 믿으시겠습니까?"

    내가 굽히지 않고 강짜를 놓자 대령 계급을 가진 중년 사내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무전기를 꺼내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용산에는 국방부가 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이만한 규모의 군인들을 이끄는 장성급도 있겠군.'

    아마 끈이 떨어졌거나 수방사 소속이 아니라서 지저 도시에 입주하지 못한 장성일 텐데, 급한 마음에 부하들과 일부 병력을 이끌고 서울 한복판에 숨어들었다고 해도 딱히 이상하진 않다.

    "여단장님께서 일단 보자고 하시는군. 원한다면 호텔에 합류해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즉시 떠나라."

    일단 저쪽의 윗대가리가 우리와 대화할 의향이 있다고 밝힌 이상 군인들도 어찌할 도리는 없는지, 험악했던 분위기를 다시 거둬들였다.

    "그럼 일단 대화부터 해보겠습니다."

    "쯧."

    대령이 혀를 차며 부관들과 함께 떠나고, 남겨진 군인들은 우리 편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총경도 다 된 밥에 군대가 재를 뿌렸다고 생각했는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면서 결국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일단 호텔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우리는 짐과 차량을 정리해서 안쪽으로 들였다. 특히 장갑차는 군대 쪽에서 건드리지 못하도록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을 보초로 세웠다.

    "그런데 왜 한성 씨는 중장갑수색대라고 밝히지 않은 겁니까? 정원석 씨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완전한 독립부대라 군의 지휘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들었습니다만."

    "중장갑수색대 출신이 이 시국에 무장한 사람들을 대거 이끌고 돌아다닌 게 밝혀지면 군대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니까요. 아마 중장갑수색대 출신이 변절해서 무법자나 국가전복을 꾀하는 테러리스트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이유불문하고 즉각 사살하려고 했을 걸요."

    "보통은 저기 총경처럼 유능한 인재를 포섭하려 시도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중장갑수색대 출신한테는 안 그래요. 변절하면 답이 없거든요."

    "...그렇군요."

    반쯤 농담을 섞긴 했지만, 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보다 이 호텔을 어떻게 집어삼킬지나 고민해보죠."

    "아, 역시 여기도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겁니까?"

    "삼아야죠. 우리가 남부 격벽 루트를 뚫었는데 서울 중심에 전초기지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이곳에 자리잡은 군대나 경찰의 규모가 우리 조직보다는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는 분위기를 좀 잡긴 했지만, 막상 무력으로 맞붙는다고 하면 승산이 없어보입니다."

    "단합된 세력도 아니잖아요. 각개격파를 하든가, 이간질을 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문제가 되는 놈들만 처리해서 나머지를 꿀꺽 해야죠."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망가뜨릴 생각을 하면 어찌나 즐거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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