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6화 (86/211)
  • Photosensitive Epilepsy(3)

    '빛'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신호탄이었지만, 사실 신호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적을 끌어들이는 것,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린 지금 막 자살 시도중이라는 선전 광고를 하는 것 외엔 효과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미지의 적과 맞딱뜨린 지금, 또 다른 적을 더 불러들여야 할 이유가 없으니 당연히 신호탄 사용에 대해선 일절 논할 가치가 없다. 그럼 어떻게 빛을 이용하는가 하니......

    "거기, 장갑차에 예비로 보관해두고 있는 손전등이랑 헤드램프 몇 개만 가져와라. 덕테이프랑 남는 철사도."

    "지금 갖다 드리겠습니다!"

    내가 총기를 분해하면서 그렇게 말하자 대기중이던 조직원 한 명이 날래게 움직였다.

    김명호가 합류하기 전에 이쪽의 피해없이 적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가능하면 무력화해두고 싶었다.

    차도식파의 전매특허인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어서 놈들을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전에도 그랬듯이 차도식파 개개인의 작전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이용하는 조직원들 한 명 한 명이 고도로 훈련된 군인들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리 장비빨 믿고 나선다고 한들 피해자가 속출할 것은 뻔했다. 무작정 병력과 화력만 집중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조직원들 이끌고 우르르 나가봤자 조금 전처럼 전조도 없는 공격에 노출될 뿐이야. 아직 이렇다 할 만한 피해를 입지 않은 지금, 최대한 전력을 온존시켜두는 게 나아.'

    물론 이번에도 나 혼자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긴 하지만, 이번 만큼은 나도 상정하지 못한 적과 마주쳤으니 적어도 날 보조해줄 수 있는 인원이 두 명 정도는 필요했다.

    "여기 있습니다!"

    "어, 잘 했다. 이제 제일 빠릿빠릿한 놈 두 명만 데려와. 엑소스켈레톤 미착용자 중에서."

    "하세준과 김기호가 엑소스켈레톤 미착용자 중에선 제일 빠릿빠릿한 애들입니다. 데려올까요?"

    "데려와."

    조직원이 다시 움직일 때, 나는 분해해둔 총기 부품과 손전등, 헤드램프 부품을 얼기설기 엮기 시작했다. 이 소총은 발포 목적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무게만 잡아먹는 탄창은 빼두었다.

    '분명 집광(集光)이 놈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방법중 하나였지?'

    처음 도봉구의 한 학교에서 운동장에 엄청난 화재를 일으켜서 놈들에게 겁을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놈들이 불길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놈들은 역시 막대한 광량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던 것 같다.

    애초에 머리가 파괴되지 않으면 죽지도 않고, 이 살벌하게 추운 지상에서도 맨몸으로 잘만 돌아다니는 녀석들이다. 놈들의 몸이 불타지 않는 천연 방화 체질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몸이 불타는 것에 겁 먹을 놈들도 아니었다.

    겁을 먹는다는 행위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대부분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각인된 주입식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선천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보호자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자신의 몸에 상처 입히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고? 아프지 않으니까.

    대부분의 두렵다는 감정은 아프다는 것에서 시작하니, 놈들이 막대한 광량을 두려워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빛을 통해 어떠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전혀 다른 매커니즘일수도 있지. 예를 들어 인간이 맛있는 음식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맛있는 음식을 배가 터질 정도로 강제로 먹여진다면 고통을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따라서 또다른 가설을 세우자면 놈들에게 빛이란 인간의 음식과 같은 것일수도 있다. 조금 지나친 억측이지만.

    "크기는...이정도면 되겠네."

    소총 레일을 둥글게 감싸듯 손전등과 헤드램프 부품을 꽃송이처럼 모아서 엮었다. 그리고 개머리판에 대용량 배터리를 고정시켜서 순간적으로 많은 전구를 밝혀도 어느정도 버틸 수 있게 했다.

    이러면 자칫 과부하도 전구가 터질 수도 있고, 또 그게 아니어도 안전성을 크게 위배하는 물건이라 각 부품들의 수명이 빠르게 줄어들 거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이걸 미친놈마냥 24시간 켜고 돌아다닐 건 아니니까.

    "여기 하세준과 김기호를 데려왔습니다. 형님."

    조직원에게 이만 가서 쉬어보라고 손사래를 친 나는 하세준과 김기호를 한 번 훑어보았다.

    두 사람은 나를 본받기라도 할 작정인지, 각각 척추기립외골격과 양팔의 외골격 파츠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세준이 착용한 척추기립외골격 파츠는 하반신 외골격 파츠가 한 세트처럼 따라오기 때문에 더 오래, 더 빨리, 더 힘차게 걷거나 뛰어다닐 수 있다. 밀수조직들 사이에서 주로 기동성이 필요한 수색, 정찰 담당자가 곧잘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반면 나와 똑같은 양팔 외골격 파츠를 착용한 김기호는 딱봐도 파워 타입으로 보였는데, 덩치가 제법 있어서 그런지 효율을 위해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엑소스켈레톤 완제품은 상대적으로 신체 능력이 조금 부족한 놈들에게 양보한 것이 분명했다.

    "남들 다 쉬고 있는데 저 혼자 나갈 준비하고 있는 내가 굳이 너희 둘을 불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대충 알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 전에 나랑 나갔다온 애들이 밖에서 이상한 놈들에게 기습을 당했어. 그게 적들이 의도한 매복 기습인지 아니면 우리가 어떤 트리거를 당겨서 그에 반응한 적들이 우릴 공격한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기서 뜨뜻하게 등좀 지지고 있었더니 슬슬 지루하지? 3분 줄테니 나갈 준비해."

    하세준과 김기호는 별 다른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고 즉시 자신들의 장비를 챙겨들었다.

    그들이 싫은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는 것은 내가 차도식파 내에서는 물론이고, 밀수조직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인지도나 영향력이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이리라.

    덕테이프와 철사로 마무리해서 덜렁거리는 부품들을 확실히 고정시킨 나는 집광투사기로 변신한 소총을 들어올렸다.

    "네 이름은 오늘부터 '번쩍이'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조직원들 모두 나의 오지고 지리는 작명 센스에 감탄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출입구 개방합니다!"

    만일에 대비해 닫아두었던 지하 주차장 입구 방화 셔터를 엑소스켈레톤 착용자 한 명이 힘으로 들어올렸다.

    그 틈에 밖으로 기어나온 우리는 저격포인트로 유력한 빌딩을 찾아나섰다. 또다시 이상한 검은 벌레가 날아들지 않는 걸 보니, 적이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혹은 우리가 아직 적들을 반응하게 할 만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거나.'

    내 뒤에 따라붙은 세준과 기호에게 수신호를 보내서 경북궁역 인근에 위치한, 딱봐도 주변 거리를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고층 건물 앞으로 이끌었다.

    서울경찰청 건물과 고작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뚝 서있는 한누리빌딩이었다.

    '통짜 유리로 된 외벽 일부가 꽤 손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 안에 숨어든 놈들이 바깥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저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괴물 놈들이 고작 유리창 깨지는 것을 걱정하진 않을 테니까.

    이미 누군가가 한바탕 휩쓸고 갔는지, 아니면 사태 당일에 피난민들이 워낙 많이 몰려들어 파손된 건지, 빌딩 입구는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군데군데 안 깨진 유리가 없고, 쓰레기통이나 건물 잔해가 마구 굴러다니고 있는 건 덤이었다.

    건물 앞에 있어야 할 싱그러운 느낌의 가로수나 정원은 이미 시커멓게 말라 비틀어져서 생기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삭막한 도시에 몇 안 되는 그린피스 감수성 요소였는데.

    텅 빈 탓에 음산한 느낌을 자아내는, 흡사 맹수의 은신처로 변한 동굴같은 느낌의 입구 앞에서 우리는 차례대로 움직였다.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기호가 후방 경계를, 내 뒤에 따라붙은 세준이 전방과 측면 경계를, 나는 길잡이 겸 전방 경계를 하면서 잘그락거리는 두꺼운 유리조각 위로 걸어나갔다.

    2030년대 최신식 오피스텔답게 내부 풍경은 삭막하면서도 깔끔했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정상 영업중이라고 착각해버릴 만큼 진한 모던풍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야투경을 착용한 나는 그래도 희미하게 보이는 어둠 속을 조금씩 헤쳐나가며, 미처 눈발이 들이닥치지 않은 복도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눈 대신 바닥에 내려앉은 두터운 먼지, 오랫동안 난방이 작동하지 않은 탓에 건물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냉기.

    옷을 충분히 두껍게 껴입었음에도 교활한 냉기가 어떻게든 틈을 파고들어 36.5도의 정상 체온을 빼앗아가려 했다.

    계속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손과 발끝부터 얼어붙고, 이내 허무하리만치 체온을 빼앗겨 냉동 미라가 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곳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숨어지냈던 것 같습니다."

    내 뒤에 따라붙은 세준이 휑하니 열려있는 한 사무실 안쪽을 바라보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사무실 안에서 불을 피우거나 생활한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하지만 오래된 흔적이지. 심지어 그리 오랫동안 지속되지도 않았어."

    불을 피운 흔적이나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음식 용기들을 자세히 보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생활한 흔적은 있지만 정작 잠자리를 마련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 핵심 단서였다.

    사태가 터진 이후, 잠깐 이곳에 숨어들었던 사람들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동한 것이다.

    이 혁신적인 빌딩은 아이러니하게도 냉기와 외부의 위험요소로부터 가장 취약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생존자들로부터 외면받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면 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사람도 없는 이런 건물에 그...이상한 괴물들이 숨어지낸다는 거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런 건물이 아니라 대놓고 수상쩍어보이는 서울경찰청 건물부터 뒤져봤어야 했다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형님이 이곳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건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긴. 주변 감시하기 딱 좋은 전망대로 생각하고 있지."

    계단의 위를 살피면서 한 걸음씩 올라간 나는 계단에도 먼지가 두텁게 쌓인 것을 확인했다. 우리 외에 계단을 오르내린 존재는 없었다.

    "반대로 네가 보기엔 어때? 서울경찰청 건물과 이 빌딩에 어떤 유의미한 차별점이 있는 것 같아?"

    "이 빌딩이 조금 더 높다는 것 외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전망을 비교하면 오히려 서울경찰청쪽이 더 좋긴 해. 이 빌딩은 옆을 가로막고 있는 다른 건물도 있으니까. 반면 서울경찰청 주변은 시원하게 뻥 뚫려있어서 주변을 확인하기가 참 좋아."

    "그럼 왜......?"

    "하지만 서울경찰청 건물 외벽은 통짜 유리가 아니잖아."

    그래. 서울경찰청 건물은 분명 주변이 탁 트여있어서 이곳저곳 살피기 용이한 것은 맞다.

    하지만 건물 구조상 한 번에 여러 방향, 여러 장소를 살필 수는 없다. 이 빌딩에 숨어있을 놈에겐 아마도 그런 요소가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했을 터.

    그렇다면 놈이 어떤 생태, 어떤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는 대략적이나마 추측해볼 수 있다.

    "서울경찰청 건물은 창문이 많은 만큼 일일이 열고 닫아야 하는 문과 그에 상응하는 방, 사무실의 숫자가 엄청나. 창가를 통해 특정 방향이나 상대의 움직임을 확인하려면 다른 방을 잡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지. 심지어 창문 하나의 크기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라서 세세한 저격 각을 잡는 것도, 감시도 어려워. 하지만 여긴? 죄다 통짜 유리잖아. 게다가 모던풍 양식 답게 사무실 벽도 콘크리트가 아니라 블라인드를 설치한 유리창이고. 그래서 복잡하게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돌아다니는 것 만으로도 땀이 날 것 같은 서울경찰청 건물 내부와 통짜 유리 외벽으로 이루어진 빌딩. 어느 쪽이 더 감시와 이동에 편할 것 같은가?

    "...그래서 여기였군요."

    "그저 복도를 돌아다니기만 바깥이 훤히 보여서 주변 정보를 쉽게 습득할 수 있고, 유리창이 깨지는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저격을 해도 상관없어. 이보다 더 감시에 최적화된 전망대는 없지."

    그렇지 않다면 통짜 유리창을 불편하게 가로막고 있는 블라인드가 무언가에 의해 모두 뜯겨나가 있을 이유도 없고.

    "복도와 계단에 먼지가 두텁게 쌓인 것도 굳이 걸어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계단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박살난 유리창을 통해 쉽게 건물 외벽을 오르내리며 높이만 조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려면 벽이나 천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어다닐 수 있는 타입이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처럼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다니는 놈은 아니야."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저격 각이 충분히 나올 만큼 높은 층까지 올라갔을 때, 나는 어두컴컴하고 넓은 통유리 사무실로 가득한 복도에 진입하기 전, 수신호로 둘의 야투경을 벗기고 총기의 세이프티를 해제하게끔 했다.

    '우리처럼 걸어다니지 못 한다면 신체 구조상 그리 많이 움직이지 못 하고 어딘가에 들러붙어 고정 포대 역할이나 한다는 건데, 그런 놈이 구조가 복잡하고 내부가 빡빡한 서울경찰청 건물에서 숨어지낼리가 없지.'

    확신이 있었기에, 나는 번쩍이를 들고 스위치를 눌렀다.

    눈이 따가울 만큼 전방에 막대한 광량이 쏟아졌다. 그리고 사무실 통유리를 뒤덮고 있던 검은 장막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홍해처럼 갈라졌다.

    번쩍거리는 빛을 봤더니 내가 배를 내보이며 발작을 일으킨 건에 대하여 ~내 초콜릿 복근이 섹시해서 곤란~

    대략 1시간 전쯤 박한성이 이끄는 조직원들과 나뉘어 움직이고 있던 김명호는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있었다.

    "크흡......!"

    "혀, 형님!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나도 알아 이 새끼야, 라고 윽박지르지 못한 것은 지금도 다리를 타고 전해져 오는 통렬한 고통때문이었다.

    범죄조직간의 패권다툼을 위해 우르르 몰려나가 패싸움을 벌일 때 가볍게 칼침을 맞거나 각목에 두들겨 맞은 적은 있었지만, 그까짓 고통쯤은 이를 꽉 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두꺼운 허벅지에 드릴처럼 파고든 기분나쁜 검은 벌레 때문에 고통에 대한 패러다임이 혁신적으로 바뀐 참이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박한성과는 다른 위치에서 군수물자를 찾기 위해 통의파출소를 먼저 뒤지고 청와대 인근을 한 번 훑으면서 돌아내려오던 찰나, 기습적으로 경북궁역 방향에서 날아든 저격에 당했다.

    당황하긴 했지만 가까스로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법련사 건물로 숨어드는데 성공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김명호 일행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저격이 이어졌지만 대참사는 어찌어찌 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조직이 차도식파를 배신했거나, 지상에 자리잡은 생존자 그룹이 매복 기습을 가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의 허벅지에 박힌 기괴한 벌레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크흡!"

    "거의 다 뽑아냈습니다! 조금만 더!!"

    불에 달군 대검 칼끝으로 김명호의 허벅지에 반쯤 파고든 벌레를 뽑아내는 건 엄청난 고역이었다.

    아무리 험한 일을 겪어온 자신이라지만, 총알처럼 생살에 박혀 자꾸만 파고들려는 미친 벌레와 불에 달군 칼끝이 동시에 살갗을 헤집는 감각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반란군의 위치를 불라고 한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불고 싶을 정도였다.

    '이것도 한성 씨가 말했던 나이트워커인지 나이트워치인지 하는 놈의 소행인가......!'

    어떤 시대라도, 어떤 환경이라도 바퀴벌레처럼 꾸역꾸역 적응해서 기어이 살아남는 인간이 고작 한 달만에 지상에서 종적을 감추다시피 했을리가 없다.

    날이 춥다면 추운대로 따뜻한 곳에 숨어들거나, 체온을 보존할 방법을 찾아냈겠지. 무질서와 혼돈만이 자리잡은 암흑 속에서도 손에 손잡고 생존을 꾀할 인간들은 많다.

    그런데 매번 지상을 나올 때마다 생존자 그룹을 찾는 것은 힘들어지고, 활동 반경이 넓어질수록 다른 밀수조직으로부터 자주 들려오는 부고 소식에 의아함을 느꼈었다.

    의문만 품다가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암흑이 도래한 지상이 어째서 이토록 조용해졌냐고? 생존자 그룹을 찾기 힘드냐고? 밀수조직의 피해가 점점 더 증가하냐고?

    '이런 비정상적인 괴물이 지상을 뒤덮고 있다면 당연히 지상도 조용해지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지저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지상은 매일매일이 생존 경쟁일테니 생존자 그룹을 찾기 힘든 것도, 밀수조직의 피해가 나날이 증가하는 것도 이해가 돼!'

    푸욱!

    "큭!"

    "뽑아냈습니다!"

    "그거 불에 던져넣어!"

    "씨발, 대체 이게 뭐야. 나오라는 군수물자는 안 나오고 왜 이런 벌레 새끼들이......."

    김명호는 엄지 손가락이 들어갈만한 구멍이 뚫린 허벅지에 직접 소독약과 지혈제를 때려붓고, 환부 위에 거즈를 붙인 다음 압박 붕대를 칭칭 감았다. 마지막으로 군용 모르핀을 주사하자 뇌를 찌릿찌릿 자극하고 있던 고통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 기괴한 벌레가 불개미마냥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이상한 물질이라도 내뱉었는지, 총알이 박혔어도 이것보단 덜 아팠을 것 같았다.

    고통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김명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위치 사수팀에선 뭐라고 하더냐?"

    "정체불명의 적으로부터 저격을 받을 수 있으니 빙 돌아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성 형님께서 세준 형님과 기호 형님들을 데리고 먼저 움직이셨다고 합니다."

    "행동력 하나는 참 빠른 사람이라니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난 김명호는 자신을 만류하는 부하들의 움직임도 뿌리치고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거리를 가만히 살폈다.

    기후가 지랄맞게 변했으니 눈보라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건 바보같은 짓이다. 최대한 빨리 위치 사수팀과 합류해서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종로구는 차도식파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건질 것이 없는 텅 빈 깡통이었다.

    "편의점이나 마트, 파출소나 경비단 숙소까지 전부 깔끔하게 털려 있었지. 이 구역을 기준으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물자를 싹쓸어간 조직이 있을 거다."

    "밀수조직들이 종로구 쪽으로 진출한 건 오늘이 처음 아닙니까?"

    "그래. 지저 도시에 입주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겨졌던 이들 중 누군가가 사람을 규합해서 우리 못지 않은 조직을 만든 게 틀림없다. 물자가 쌓여있을만한 장소만 깔끔하게 털려 있었으니까."

    폭동이 일어나서 수많은 시민들이 구역 전체를 휩쓸었다면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어야 정상이다.

    물론 박살난 건물이나 공공기물이 아주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것치곤 비교적 멀쩡해보였다. 그말인즉슨 누군가가 사태 초기부터 사람들을 이끌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일반인과는 다르게 체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신속정확하게 물자를 쓸어간 것으로 보건대 경찰이나 군대처럼 무력을 갖춘 세력이 시민들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눈앞에 위기가 닥친 힘없고 나약한 일반인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보호받길 원한다. 자신들또한 그랬던 경험이 있는데 지상에 남겨진 인간들이라고 오죽했을까.

    '중구에 진입하려면 군수물자나 정보, 최소한 둘중 하나는 필요하다.'

    박한성이 브리핑 시간에 지적했던 것처럼 현재 밀수조직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만성적인 군수물자 부족 현상이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경찰서나 파출소를 털면서 보급해왔지만 사용하는 것에 비해 보급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지상의 군 시설을 직접 털자나 리스크가 너무 심해서 가능한 지상군과의 교전은 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작정하고 주인없는 군수물자를 확보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지역 정보라도 얻어서 위험 요소를 최대한 피해다닐 작정으로 종로구 중심부로 뛰어들었건만. 무엇 하나 성공하지 못 했다.

    차도식파 창립 이래 최대의 난관에 봉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님."

    "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으십니까?"

    "무슨 소리라니...음?"

    창가에 기대어 서있던 김명호는 곧 저 멀리서 들려오는 낯선 배기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한창 시끄럽게 재정비를 하고 있던 조직원들도 분위기를 눈치채고 숨을 죽였다.

    "차량이다."

    그것도 꽤 크고 묵직하다.

    더이상 그 어떤 차량도 운행되지 않는 고요한 세상의 지축을 뒤흔드는 배기음과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김명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지금껏 밀수조직이 제한적으로나마 운용하고 있던 소수의 차량과는 달리 진짜배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장갑차에 소방차, 대형화물트럭에 제설차도 있습니다!"

    "어쩐지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어야 할 차량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싶더니만."

    하나같이 유용하기 짝이 없는 저 다목적 차량들이 무려 10대나 경북궁역 인근 거리로 밀려들었다. 밀수조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규모의 행렬이었다.

    "형님, 군인들이 보입니다."

    "나도 보인다."

    군인들만이 아니라 경찰들도 제복 위에 방탄복과 방한 장비를 든든하게 껴입고서 차량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 밀수범처럼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있거나, 반대로 과할 정도로 무장한 채 사주 경계를 했다. 지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지상에서 움직일 땐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군수물자와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는 무력 집단이다. 게다가 민간이 아니라 군인과 경찰들로 이루어져 있어.'

    민간인으로 구성된 조직은 규모의 차이를 떠나 체계적이지 않고 외부자에 매우 배타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박한성이 말했었다.

    실제로 노원역에 자리잡고 있던 다수의 민간인들과 소수의 군인들은 분위기, 사상, 조직의 방향성에 휩쓸려 매우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반대로 체계적인 조직일수록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가능한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거래를 원하기 때문에, 지금 차도식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거래 상대였다.

    "형님, 저 양반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버려진 차량을 뜯어서 쓸만한 부품을 모으고 있다. 그 외에 물자가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한 빌딩이나 소규모 상점을 털고 있는 것으로 보아...메인은 기계 부품 확보가 맞는 것 같다."

    기계 부품은 하나같이 크고 무거운 것들 뿐이니까 저만한 규모의 차량을 동원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무방비하게 거리한복판에서 작업한다면 저들도 차도식파처럼 전조없는 저격에 당할 것이 분명했다. 여기선 차도식파가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적의 위협에 대해 경고해주며 말문을 트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차량 행렬의 중심부에 있던 대형 소방차가 기계식 사다리를 천천히 하늘 위로 세웠다. 그리고 사다리 끝에 달려있는 커다란 구체에 전력을 공급해서 매우 강렬한 '빛'을 만들어냈다.

    알록달록한 일곱색으로 반짝이는 빛의 향연.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엄청난 퍼포먼스를 이끌어낸 주인공은 다름아닌 디스코 볼(Disco ball)이었다.

    그래. 조금 오래된 클럽에 가면 특유의 레트로 감성을 살려주는 그 구닥다리 무지개색 디스코 볼이 맞다.

    "저 무슨......!"

    "미친 놈들 아닙니까?!"

    "저러면 나이트워커고 지랄이고 다 튀어나올 텐데!"

    창가에 들러붙은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눈부신 빛의 향연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구경을 멈추지 않았다.

    옛말에 어떤 구경이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 다 희극이라고 했으니, 저 겁없는 조직이 어떤 일을 겪게될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는 건 다들 똑같았다.

    하지만 또 한 번 차도식파의 예상이 빗나갔다.

    새하얀 어둠 속에서 소음과 빛에 이끌려 거리로 뛰쳐나온 괴물들이 제법 있었으나, 놈들이 대략 50m 내에 접근한 순간 간질환자처럼 발작을 일으키며 지면을 뒹굴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사람들을 보내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괴물들을 처리하게 했다.

    그들의 무심하고 무성의한 총성이 한 번 이어질 때마다 발작을 일으키고 있던 괴물도 하나씩 움직임을 멈췄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괴물들을 처리하는 모습에 김명호는 조직의 2인자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물론 차도식파도 막대한 광량을 집중시켜서 괴물을 무력화시킨 적은 있었다. 다만 효율이 너무 좋지 않아서 장비빨만 믿고 놈들과 싸웠는데, 설마 '빛'을 저런 방식으로 사용할 줄은 예상치 못 했다.

    "엇!"

    모두가 영롱한 일곱빛깔의 향연에 푹 빠져 있던 그때,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어디선가 우박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검은 벌레 떼가 가장 먼저 디스코 볼에 내리 꽂혀 전구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김명호가 당했던 전조없는 벌레 저격이었다.

    괴물들을 제압하고 있던 빛의 향연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차량의 헤드라이트와 사람들이 들고 있는 손전등 불빛 뿐이었다. 그런 불빛들만으로는 모든 어둠을 밝히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쏴! 놈들이 온다!"

    "대체 어디서 공격이 오는...억?!"

    "장갑차 뭐하고 있어! 빨리 제압 사격해!!"

    "아아아아아악!!"

    곧 사방팔방으로 넓게 퍼져있던 군인과 경찰들이 들고있던 손전등 불빛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명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원 전투 준비."

    자신이 알고 있는 박한성이었다면 분명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명령했을 것이다.

    ※광과민성 발작, 증후군(Photosensitive Epilepsy) : 순간적으로 번쩍거리는 빛을 보고 발작을 일으키는 뇌전증의 일종이다.

    ⠥⠱⠢

    -박뱀. 이 새끼들은 어떻게 합니까?

    -전부 소각해. 이 새끼들 밖으로 나가면 안 돼.

    -기, 기다려주시오! 내래 아무 문제도...아아아아아아악!!

    "한성 형님. 이 새끼들은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고 흔들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발치 아래에는 척추가 반대 방향으로 접혀진, 두 다리가 전갈의 꼬리처럼 합쳐져 있는 기괴한 형태의 괴물이 완전히 박살난 상태였다.

    먼저 진입한 내가 놈에게 강렬한 빛을 들이밀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KSG 샷건으로 갈겨버린 것이 기억났다. 외골격 파츠가 아니었다면 양손에 번쩍이와 KSG 샷건을 들고 람보처럼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겠지.

    옛날에도 자주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양손에 뭔가를 하나씩 들고 움직이는 게 마냥 어색하지는 않았다.

    "...전부 소각해. 이 새끼들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벽이나 천장에 박혀있는 수많은 벌레들은 주인을 잃은 탓에 오도가도 못한 채 바글거리기만 했다. 역시 놈들의 대가리는 이 전갈 모양 괴물이었던 모양이다.

    세준과 기호는 캠프파이어를 만들기 위해 개개인이 들고다니는 신나를 곳곳에 뿌려서 즉각 불을 붙였다.

    검게 물들어있던 벽과 천장이 밝은 불길로 뒤덮이면서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고 있던 냉기를 열기로 바꿨다.

    불이 붙은 벌레들은 이윽고 검은 체액을 내뿜으며 물풍선처럼 펑펑 터지더니, 매케한 연기와 함께 산화했다. 검은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의 양이 늘었다.

    "돌아가자."

    전망이 좋은 고층 건물에서 고정 포대처럼 자리잡고 벌레들을 쏘아보내는 기괴한 괴물이 있다는 정보도, 그 괴물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에 대한 방법도 경험으로 배웠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빌딩을 빠져나온 우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장한 소음에 다른 의미로 자세를 낮췄다.

    고층 건물 최상층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보고 나이트워커들이 몰려들면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걱정을 뒤덮을 만큼 새로운 걱정거리가 경북궁역 앞에 등장한 것이다.

    "군용 장갑차에 화물 트럭, 제설차, 소방차까지 있습니다. 우리랑 같은 밀수조직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밀수조직중에 저만한 차량을 운용하는 곳은 없어."

    도구봉파가 최근 장갑차를 입수하면서 버스와 함께 운용한다면 저런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도구봉파는 일전의 작전으로 부상자가 제법 나온 탓에 지상 작전 효율이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저 차량들 사이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최신예 소방차는 대한민국에서 2040년까지 서울 전역 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던 몬스터 소방차였다.

    독일에서 군용 트럭을 개조해 만든 소방차라 엔진 마력이나 물탱크 용량, 기타 소방설비 적재량이 일반적인 소방차와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다. 2030년인 올해까지도 아직 서울 몇몇 지역구에서만 운용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얼추 10대는 될 것 같은 차량 행렬이 경북궁역 인근 도로에서 일렬로 멈추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차량 주변을 호위하면서 버려진 차량들로부터 기계 부품을 수거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저런 괴물같은 소방차가 왜 필요한 걸까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고있던 찰나, 소방차가 갑자기 거중기마냥 사다리를 하늘 높이 처들었다. 사다리 끝에는 둥근 구체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디스코 볼?'

    다음 순간, 희뿌연 안개같은 눈보라를 꿰뚫고 날아든 강렬한 빛에 우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 미친 놈들! 대체 길거리 한복판에서 왜 저 지랄이야! 여기가 무슨 클럽인줄 아나!!"

    "저런 쌍팔년도 디스코 볼을 대체 어디서 구해온 거야!!"

    차도식 아래에서 물장사좀 해본 세준과 기호는 각기 다른 이유로 욕지기를 하면서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희뿌연 안개때문에 빛이 산란되었기에 망정이지, 어두컴컴한 지상 한복판에서 다이렉트로 저런 강렬한 빛을 받았더라면 잠깐이지만 눈이 멀었을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빛과 소음에 자극받아 어둠 속에서 달려나온 나이트워커들이 차량 행렬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명백하게 움직임이나 형태가 이상한 나이트워치도 있었지만, 시계가 워낙 희뿌연 탓에 저쪽 일행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 인지해야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나이트워치도 눈먼 총알에 맞아 픽픽 쓰러지지 않을까 싶던 그때. 우리는 잘만 달려가고 있던 괴물들이 어느 지점에서 바닥을 뒹굴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다.

    "저거...발작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눈먼 총알이라도 맞았나?"

    "아니 저 놈들은 머리가 유일한 약점이라 다른 부위에 공격을 받아도 계속 움직이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번쩍이를 도로 집어넣은 나는 샷건에 산탄 쉘을 장전했다.

    희뿌연 시계가 도움이 되지 않는 근거리. 대략 50m 전후를 기준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디스코 볼 주변에서 놈들이 쓰러져 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확실히 저 디스코 볼은 무지개색으로 쉴새없이 빛나며 온갖 패턴의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한 존재들에겐 너무나도 강렬한 자극일 터. 충분히 발작을 일으킬 법 했다.

    나는 그저 강한 빛으로 놈들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다면, 저 디스코 볼을 사용한 사람은 빛의 향연으로 놈들의 혼을 쏙 빼놓을 생각이었던 거다.

    "엇!"

    "디스코 볼이 깨졌습니다!"

    "당연히 깨지겠지. 먼 곳에서 비교적 자극을 덜 받는 놈들도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아직 우리가 처리하지 못한 고정 포대들이 주변 빌딩에 제법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정확한 벌레 저격으로 디스코 볼을 박살내고 동족들의 발작 상태를 해제시켰다.

    그러자 되레 당황한 것은 저쪽의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그들은 하나하나 쓰러져 발작하고 있던 나이트워커들을 처리하다말고, 갑작스럽게 반격을 걸어오는 놈들에게 처참할 정도로 밀리고 있었다.

    보병 장비가 출중하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 무전 때려서 지하 주차장에 있는 애들 다 나오라고 해. 지금쯤이면 명호가 이끄는 다른 팀도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거다. 다른 팀이랑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저쪽 일행과 접선한다."

    세준이 무전을 때리기가 무섭게 지하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팀이 장갑차를 이끌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장갑차가 20mm 기관포를 쏘며 나이트워치를 분쇄하고,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조직원들이 앞서나가 나이트워커를 힘으로 잡아 찢거나 뭉개버렸다. 반대편에서도 시끄러운 총성이 울려퍼지는 것으로 보아 김명호가 타이밍 좋게 움직인 것 같았다.

    "부상자부터 구해!"

    투캉! 투캉!

    KSG 샷건이 불을 뿜을 때마다 눈발을 헤치며 치타처럼 달려오고 있던 나이트워커의 머리통이 하나씩 사라졌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눈송이보다 작은 산탄이 흩뿌려지는 자리에는 반드시 검은 체액이 튀어올랐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싸우는 건 우리가 불리하다! 최대한 안쪽으로 합류하면서 외부를 경계해!"

    차량 행렬 안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든 적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한 다음, 본격적인 난장판의 시작을 알린 총성과 비명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놈들을 경계하기 위해 총부리를 바깥으로 돌렸다.

    신호탄을 쐈을 때 만큼 어그로가 심하게 끌리지는 않았지만, 종로구는 사태 당일까지 피난민이 가장 많이 몰려들었던 지역중 하나라 그런지 괴물 놈들도 상당한 머릿수를 자랑했다.

    창백하다못해 새하얀 눈같은 피부를 가진 나이트워커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길 때면, 놈들이 한때 인간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가 인간의 시체를 이용해 만든 비현실적인 괴물이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사실 전자든 후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 괴물들이 두 번 다시 우리의 이웃사촌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만은 명명백백하니까.

    그렇기에 의문을 품을지언정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따라서 아쉬움도, 슬픔도 없다. 북한군을 처리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또다른 세력에 저쪽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군인과 경찰들은 어어 하면서도 일단 우리와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다. 나는 소방차의 창문을 두들겨 안쪽의 소방관을 불렀다.

    "빨리 사다리 내리고 이동할 준비나 해요!"

    "하, 하지만 아직 위쪽에서 명령이......!"

    "명령은 무슨 얼어죽을 명령! 여기서 다같이 손잡고 뒤지기 싫으면 그냥 시키는대로 해요!"

    역시 군인과 경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인 듯, 소방관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무전기를 번갈아보더니, 결국 디스코 볼이 박살난 사다리를 조작해서 도로 내렸다.

    나는 차량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빠져나갈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 양반들이 지상에선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활동했겠지만, 너무나도 비효율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잘 훈련받은 사람과 무기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들이박으면 만사 오케이가 아니다. 어그로가 오래 끌리면 끌릴수록 더 많은 괴물들이 자극을 받고 이곳으로 몰려들 텐데, 대체 어느 세월에 기계 부품을 모두 수거하고 철수한단 말인가?

    기계 부품을 수거해서 얻는 이익보다 사람이 다치고 탄약을 낭비하는 것으로 입게 될 손해가 훨씬 더 막심할 거다.

    디스코 볼까지 사용해서 나름 획기적인 방식으로 나이트 워커를 제압하는 건 눈여겨볼만 했지만, 그또한 윗대가리가 생각한 계획은 아니었을 거다.

    아마 머리 쓰는 사람, 기계 만지는 사람, 생물학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최종적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리라. 당연히 그런 것에 대해 잘 알리가 없는 윗대가리들은 그냥 무작정 병력들을 출병시켰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밀수조직들이 괜히 작전을 쉬는 날에도 자기점검과 지상 작전에 대비한 계획 구상, 그리고 최종적으로 작전 시작 전에 브리핑을 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정보를 공유하고 행동 방침을 정하는 것만으로도 지상 작전에 큰 도움이 되는데, 이들은 그냥 머릿수와 장비만 믿고 계획없이 바깥으로 기어나온 철부지들 같았다.

    마침내 모든 차량들에게 철수를 알린 나는 차도식파를 규합해서 부상자 수습과 차량 호위에 적극 나섰다. 이들이 나중에 딴말 하지 못하도록 지금 확실하게 빚을 지워둘 생각이었다.

    부상자들은 걸리적거리니까 모두 차량에 처박아버리고, 부상자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무기나 탄약은 우리가 수거해서 대신 사용했다. 지상에서 활동한 사람들답게 군수물자 하나만큼은 차고 넘쳤는지, 예비 탄약이 제법 널널했다.

    "차량 빠질 수 있게 길 터줘! 길 터주라고 새끼야!!"

    "거기 워커 한 마리 들어간다! 잡아!"

    "이 개새끼가 어딜 들어가려고!"

    기껏해야 방탄복에 방탄모만 착용하고 있는 이들과 달리, 우리는 조직원중 절반 가까이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고 있어 근접 전투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 탄약 엥꼬!"

    "여, 여기! 이거 대신 쓰십쇼!"

    "오 땡큐!"

    군수물자에 허덕이고 있던 우리는 그들에게 실시간으로 보급받으며 철수를 도왔다.

    몇차례 습격을 걸어오는 나이트워커 무리를 분쇄하고, 우리도 차량에 하나둘씩 매달려서 조용히 철수하자 곧 놈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다.

    다행히 이들도 차량 운행시 모든 헤드라이트를 끄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나보다. 솔직히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야 했다면 자칫 꼭지가 돌아갈 뻔 했다.

    그렇게 차도식파까지 함께 태운 이름모를 조직은 종로구를 빠르게 벗어나, 당초 우리가 목표로 했던 중구 서울 광장에 진입했다.

    이대로 차량은 건물 주차장에 보관하고 사람들은 시청역으로 들어가는가 싶었는데, 그들은 지하철역 입구 대신 다른 곳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여긴...롯데호텔?"

    차량 행렬이 멈춘 곳은 서울 중구에서 특히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롯데호텔 서울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양념감자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프렌차이즈 매장과 백화점을 한 몸처럼 합쳐서 거대한 부지 위에 알박기를 해버린 대규모 호텔. 그 주변에는 무려 또다른 호텔과 약국, 병원, 그리고 수많은 편의점까지 존재하는 천혜의 요새같은 장소였다.

    하기야 이런 곳을 두고 어두컴컴한 지하철역에 처박혀 살고 싶지는 않겠지. 사실상 서울의 중요 인프라가 모두 집약된 곳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일단 생존자 그룹을 찾아서 서울 중구에 진입하는 게 주요 목적이었던 우리는 얼떨결에 모두 달성해버렸다.

    거래를 해서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형성하거나,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 대규모 생존자 그룹과 조우한 것이 과연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된다.

    나는 차량에서 내려 합류하기 전, 김명호를 비롯한 간부급 조직원들에게 몰래 수신호를 보냈다.

    만약 상황이 안 좋아질 것 같으면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을 앞세워서 모조리 제압하고 물자만 빼앗자는 수신호였다. 이는 반대로 상황이 좋아지면 그들에게 적극 협조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우리도 근본은 신사가 아니라 범죄자 집단이기 때문에 수틀리면 거래고 뭐고 다 걷어차서 난장판이 벌어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대로 침묵하며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길 기다리고 있던 그때, 호텔 현관에서부터 걸어나온 부리부리한 인상의 사내와 그 뒤를 이끄는 소수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선두에 선 부리부리한 인상의 중년 사내는 이 차량 행렬의 현장 책임자로 추정되는 군인에게 다가가더니 냅다 뺨을 후려갈기고 조인트를 걷어찼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안 그래도 부족한 기름 짜내서 내보냈더니 별 다른 수확도 없이 그냥 돌아오면 어떡해! 내가 그러라고 늬들 챙겨주는 줄 알아?!"

    "죄송합니다. 현장에서...일이 있었습니다."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하라고 무기랑 장비 바리바리 챙겨줘서 보냈잖아! 같이 딸려보낸 애들만 족히 200명인데 그걸 해결 못해?!"

    "아무래도 기후가 기후이고, 또 놈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거라던 디스코 볼이 중간에 망가져서 전투가 난잡해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른 생존자 그룹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철수하지 않고 계속 싸웠더라면......"

    "계속 싸웠더라면 결국 이기고 물자까지 두둑하게 챙겨서 돌아왔겠지! 그 썩어빠진 근성 때문에 나몰라라 하고 그냥 도망쳐 왔다는 거 아냐 이 새끼야! 너 사실 나 엿먹이려고 그러는 거지? 어?!"

    "절대 아닙니다 서장님. 현장 인원이 서로 다른 조직에 속해있다보니 아무래도 소통이 잘 안 되고 손발도 좀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변명! 변명! 변명! 네가 무슨 세살배기 코흘리개냐?! 어째 할 줄 아는 게 변명밖에 없어!!"

    나는 서른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현장 책임자에게 연신 윽박지르고 있는 사내가 경찰 총경임을 확인했다. 방한복 아래로 살짝 보인 계급장 무궁화 4송이는 분명 총경 계급장이었으니까. 그가 '서장'이라고 불린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뺨을 맞은 사람도 같은 경찰 소속일 텐데, 제 식구 감싸주기 좋아하는 경찰이나 군대 소속인 것치곤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

    '이거 벌써부터 그림이 그려지는데......'

    나는 총경 일행과 따로 걸어나온 또다른 일행, 군복차림의 군 장교들을 보고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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