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4화 (84/211)
  • Photosensitive Epilepsy(1)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모든 밀수조직이 '공식적으로' 밀수를 포기하겠노라 선언하고 각자의 흔적을 감춘 채 숨어지낸지 일주일이 흘렀다는 얘기다. 이에 가장 먼저 반발한 것은 당연히 인구 비율이 타 지구에 비해 압도적인 북부 지구였다.

    북부 지구 주민들에게 밀수가 불법이냐 아니냐, 나아가서 밀수라는 행위 자체가 지저 도시에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논리적인 주장은 먹히지 않았다. 당장 열심히 일해서 포인트를 벌어도 막상 구매할 물자가 없다면 순식간에 생활이 궁핍해지니까.

    정부에서 배급해주는 맛없고 양도 적은 식량, 공장에서 시제품으로 생산되어 나오는 생필품도 지상에서 사용하던 공산품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식료품과 마찬가지로 물량이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우리 밀수조직들은 음지에 숨어들어 그 사태를 관망하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사람을 풀어서 성난 군중들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북부 지구 서민층을 노예화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압박이라고. 그들이 당장 지저 도시 생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밀수를 대책없이 막아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어딜 어떻게봐도 잘못한 것은 밀수라는 범죄를 저지른 우리였지만, 정작 우리는 피해자, 저쪽은 가해자가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황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던 밀수조직과 접선해서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이미 모든 사업장을 정리하고 음지에 숨어든 밀수조직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밀수범들은 한명 한명 놓고 보면 그냥 일반인에 불과하고, 대부분 포인트가 아닌 현물 박치기를 해왔기 때문에 포인트 거래로 추적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 이상 사태를 뒤늦게 눈치챈 정부 고위 관료들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사에 나섰지만, 다른 세력에 비해 정보가 뒤쳐져 있는 그들은 오히려 자꾸 헛다리를 짚기만 했다.

    민중, 정부, 정치인, 3세력이 서로를 오해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억측을 일삼게 된 결과, 결국 정부가 먼저 해당 지구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으로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역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게 핵심이었어."

    차도식이 장갑차 옆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며 말했다.

    정부가 헛다리를 짚은 가장 큰 이유는 이쪽의 신속한 기록 말소 때문이었다.

    우리와 협력하고 있는 북부 주둔군은 처음부터 엘리베이터 사용 기록을 조작해왔으며, 내부 CCTV 자료도 앞서 2번이나 있었던 정전 사태 때문에 보관해두지 않았거나, 자료가 날아가버렸다는 핑계를 대면서 조사관들에게 정상적인 기록들만 제공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저 도시 내부 시스템이 엉망인 것도 맞고, 또 원인모를 대규모 정전이 2번이나 있었던 것도 팩트였기 때문에 조사관들도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모양이다.

    결국 형식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미명하에 북부 주둔군이 나섰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북부 지구 거주민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북부 지구 전체가 짜고 친 거대한 고스톱판이었던 셈이다.

    "이번 일로 지저 도시 내부에서 정보력이 크게 뒤쳐지는 정부에게 밀수조직이라는 대형 범죄자 집단이 사실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 고압적이고 건방진 정치인들에겐 우리도 들고 일어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지. 더이상 지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민중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없다는 사실도 일깨워준 건 덤이고."

    "정치인들 입장에선 속좀 타겠는데요."

    나는 차도식 옆에서 담배 대신 분말 레모네이드를 물에 타서 한 모금 마셨다. 짜릿하고 상큼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멍한 머리를 두들겨 깨워주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조만간 우리가 내걸었던 협상 조건대로 여당, 야당 국회의원들이 특정 지구 자력 개발법을 발의할 거라고 합니다. 지지부진한 지저 도시 부흥 2030 프로젝트를 활성화 하기 위한 명분으로 '자력 개발권을 주자' 라는 식으로 주장해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킬 것 같습니다."

    차도식의 반대편에 서있는 김명호가 자신의 소식통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보고했다.

    불과 일주일만에 지저 도시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는지 똑똑히 봤을 테니, 결국 저쪽에서 먼저 꼬리를 내리기로 한 것 같다.

    "용케 군대를 동원해서 우릴 싹 밀어버리지 않고 넘어갔네요."

    "밀수조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과 밀수조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정부에서 시선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 입장에선 정치인들의 말만 듣고 북부 지구 거주민들을 싹다 무력으로 진압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입니다."

    "하긴. 우리가 처음 정부의 감찰을 눈치채고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견된 미래이긴 했죠."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정부가 가장 적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사실 지저 도시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정부가 굳이 일반인들까지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며(민간인 사찰) 정보를 수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도 했다. 그럴 인력도 없거니와, 그래야할 이유를 찾지도 못 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 입장에선 밀수조직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그럴싸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증거를 제시할 경우 그들 역시 범죄(뇌물수수)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만 한다.

    그걸 먼저 밝히지 않고서 밀수조직을 정부에 고발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결국 정치인들도 우리 뒤를 봐주며 조용히 뇌물이나 받는 선택지를 택한 것이다.

    '사실 자기들 위신까지 걸고 우릴 고발할 줄 알았는데, 모두가 어려운 이 시국이라서 정치인들이 몸을 사린 게 컸어.'

    그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몇몇 정치인들을 고기방패로 내세우며 우릴 어떻게든 양지로 끄집어내려 했다면 더 추잡한 진흙탕 싸움으로 번졌을 것이다.

    전체적인 상황이 계획대로 잘 굴러간 것도 있지만, 그만큼 운이 따라주었기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다.

    "엘리베이터 탑승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한 병사의 목소리에 우리는 각자 피던 담배와 마시던 음료를 정리했다.

    "사실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동생이 미리 남부 지구 루트를 뚫어놨기 때문이야. 그게 아니었으면 당장 뒤가 없는 다른 밀수조직과 북부 주둔군도, 우리를 위해 정치인들을 비난해준 북부 지구 거주민들도 이 계획에 동참하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

    "뒤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만큼 크죠. 저도 제가 잘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자화자찬하면 안 부끄러워?"

    "제가 잘난 건 팩트니까요."

    누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 미리 뒤를 마련해두었겠으며, 누가 이런 대담한 계획을 세웠겠으며, 또 누가 이 거대한 판을 쥐고 흔들 수 있었겠나?

    정말로 공교롭게도 그건 바로 나다. 내가 그렇게 했다. 나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재수없긴 하네.'

    자화자찬은 여기까지.

    드디어 일주일만에 지상 작전을 나가게 되었는지라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우리가 어떻게 정부나 기업들의 감시망을 피해 북부 지구에서 남부 지구까지 내려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느냐고?

    최근 있었던 2번째 정전 사태 때문에 정부가 군의 24시간 교대 근무 감시체제를 선언했기 때문에 군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군인들을 대신해서 위장천막을 덮은 두돈반 트럭과 장갑차에 밀수범들을 대량으로 싣고 어두컴컴한 새벽에 북부 지구와 남부 지구를 오간 것이다.

    겉으로 보면 24시간 감시체제를 지키느라 불철주야 지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군인들처럼 보였겠지만, 실상은 지저 도시를 지킬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우리들이었던 거다.

    이또한 남부 주둔군과 북부 주둔군이 동시에 장갑차와 트럭을 운용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상 작전에 쓸 장갑차와 화물 수송 차량부터 엘리베이터에 먼저 실어! 사람은 그 다음에 들어가!!"

    도구봉파가 확보한 장갑차 2대, 차도식파가 확보한 장갑차 1대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려지고, 그 뒤를 이어서 차도식파의 자율주행 화물 수송 차량이 들어갔다.

    모두 공구리파에서 확실하게 정비를 받았고, 추가 부품이나 연료, 탄약 같은 건 군 부대로부터 사들여서 일시적인 보급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밀수조직내에서 장갑차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100중 99가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었으니까.

    마침내 육중한 장갑차와 화물 수송 차량이 엘리베이터에 모두 실리고, 밀수조직까지 탑승을 끝마쳤다.

    이제 자신도 당당하게 뇌물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해맑게 웃고 있는 남부 주둔군 지휘관, 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인내의 시간이 끝났다며 안도하는 각 조직의 장들.

    우리는 그들을 뒤로한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 격벽으로 올라갔다.

    남쪽 격벽은 북쪽 격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우리를 처음 보는 격벽 초병들이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마치 고인물이 파릇파릇한 뉴비를 보는 기분이랄까.

    "아래에서부터 연락은 받았습니다! 북쪽 격벽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루에 총 3번 격벽을 열고 닫겠습니다! 격벽이 열고 닫히는 시간은 각자 준수하고 계실테니 따로 설명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모두 무사복귀하시기를 바라곘습니다! 격벽 개방!!"

    북쪽 격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한 이름 모를 대위가 확성기를 들고 간단한 설명을 해준다음, 지체없이 격벽 개방을 알렸다.

    우리는 도봉구 인근 산기슭에서 봤던 서울의 풍경과는 또다른 풍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온통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어 풍경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었지만.

    "서둘러 움직이죠."

    도구봉파가 차량을 끌고나올 수 있게끔, 차도식파가 먼저 사람과 차를 빼서 격벽 밖으로 움직였다.

    남쪽 격벽 아래에는 사태 당일, 피난민들이 미친듯이 몰려있던 바로 그 종로구 평창동이 있었다.

    한달전쯤에 나 역시 저 아래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뒤엉켜있다가 간신히 VIP용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저 도시에 입주할 수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낯익은 아스팔트 도로에는 발목 아래까지 덮일듯 말듯한 눈이 얇게 쌓여있었다. 대신 지난 번 작전에 비해 한층 더 심한 강풍이 불어닥치며, 기껏 지면에 쌓여있던 눈을 흙먼지처럼 마구 흩뿌려댔다.

    이번에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쌓인 눈이 아니라,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심한 강풍과 시야를 가리는 엄청난 양의 싸라기눈이 우리의 움직임을 방해할 모양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단단히 준비한 보람이 있어.'

    이번에는 K-방산비리가 걱정되지 않는 최신예 고글을 착용하고서, 하관(아래턱)만 가려주는 공업용 방진마스크까지 착용했다.

    양팔에 장착한 외골격 파츠는 미래테크에서 받아온 시제품 추가 장갑판을 용접해서 내구력을 높였다. 이정도 성능이면 나이트워치의 공격을 정면에서 몇 번 정도는 더 받아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한달만에 개방된 남쪽 격벽에서 떼지어 몰려나온 밀수조직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흩어졌다.

    밀수조직은 크게 두 방향으로 찢어졌는데, A 집단은 서울시 서부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엄청난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은평구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 차도식파를 포함한 B 집단은 북한산을 내려오자마자 서울의 중심, 중구의 바로 위쪽에 위치한 종로구 평창동으로 파고들었다.

    딱히 종로구를 이잡듯이 뒤지고다니며 물자를 찾을 생각은 없었다. 피난민이 가장 많이 몰려들었던 장소중 하나라서 종로구 물자는 지난 한달 동안 거진 다 소모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평창동은 단독주택과 연립주택 비율이 너무 높아서 물자 수급처가 마땅치 않았다. 여기를 둘러봐도 주택, 저기를 둘러봐도 주택뿐인 거주지를 돌아다녀봤자 건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종로구를 수색하는 대신, 특유의 기동력을 살려서 단숨에 종로구를 관통하기로 했다.

    동남쪽으로 움직인다면 여러 국가들의 대사관저가 밀집된 성북구를 조사해볼 수도 있지만, 당장은 국가에서 다루는 기밀 정보 같은 것보다 물자가 더 중요했다. 지난 일주일간 지저 도시에 물자가 공급되지 않으면서 여러 사람들이 고생 깨나 했기 때문이다.

    자하문 터널을 꽉 막고 있는 폐차량들을 장갑차나 엑소스켈레톤으로 치워버리며 전진한 우리는 순조롭게 자하문로를 타고 번화가에 접어들었다.

    심심한 풍경이 빌딩이나 교회, 학교, 상점가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원 전체의 경계 레벨이 올라갔다.

    지난 일주일간 우리는 지저 도시에서 마냥 놀기만 하지 않았다.

    도구봉파를 이끄는 에이스 정원석의 훈련법을 본받아, 나 역시 빠릿빠릿한 조직원들 위주로 정예팀을 재편성해 알짜배기 전술교리와 지식을 가르쳤다.

    설령 조직원 개개인이 충분히 활약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에겐 장갑차와 엑소스켈레톤이 있고, 내 나름대로 전선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비장의 수단도 갖추고 있다.

    나는 커다란 배낭 달아둔 달아둔 007 가방을 돌아보았다. 비록 딱 하나뿐이지만 어찌어찌 작전 전에 시제품을 받아올 수 있었다.

    "정지. 이곳에서 1차 보급을 하고 움직인다. 브리핑했던대로 이번에는 현 위치 사수팀 1개, 수색팀 2개로 나뉘어 움직인다."

    쭉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온 우리는 정확히 경북궁역 앞에서 멈췄다.

    나는 무전기를 통해 조직원들에게 당초 기획해둔 작전 개요를 한 번 더 설명했다.

    우리는 종로구를 벗어나기 전, 종로구 일대에 위치한 청와대 경비단, 경찰서 및 파출소를 닥치는대로 털어 밀수조직의 고질적 문제였던 총기와 탄약을 대량으로 확보해야 했다.

    여기서 제대로 보급받지 못하면 이번 작전의 목적지인 중구에 도착했을 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신속하게 팀 단위로 나뉘는 조직원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소총의 세이프티를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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