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3화 (83/211)

지저에서 독식(5)

지상에서 고생 깨나 한 탓에 피로가 많이 쌓였던 것일까.

저녁도 먹지 않고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어느 순간 눈이 뜨이길래 스마트폰을 확인해봤다. 시간은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상 반나절은 골아떨어진 것이다.

여동생과 어머니는 각자 외출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내 식사는 냉장고에 있으니 일어나면 챙겨먹으라는 걱정까지 덧붙였다. 아버지는 두사람보다 훨씬 더 빨리, 소리소문없이 출퇴근했을 것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얼마나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는 가지만 여전히 생리적인 거부감이 드는 것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 거리낌없는 말투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짙은 혐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 섞여있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혐오를 감지하고, 반목해버리는 상(像). 어쩌면 나는 반골 기질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받은 만큼 그대로 되갚아준다는 논리 또한 커가면서 배운 것이니까.

"이게 그럴듯한 SF 영화라면 지저에도 인공 태양이 있었을 텐데. 하여간 이과놈들 게으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2030년에 인공태양 하나 떡하니 만들지 못한다면 대체 이과놈들을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커튼을 열어젖혀도 햇빛 대신 건물의 인공 조명이나 마주하게되는 삶이 조금은 서글퍼졌다. 눈에서 문돌이는 절대로 성분을 알 수 없는 짠맛의 액체가 찔끔 흘러나왔다.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부엌으로 향한 나는 어머니가 차려놓고 간 반찬과 찌개를 뎁혀서 밥과 함께 먹었다.

지저 도시에서 이만한 사치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다운되어 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곧 오늘도 할 일이 산더미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내가 무슨 조울증 환자도 아니고.

아니나다를까, 스마트폰에 쌓인 메시지 보관함에는 각기 다른 이유로 나를 호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도식파에서 다음 작전에 사용할 장갑차와 엑소스켈레톤, 무인수송차량의 정비를 한 번에 맡아주기로 한 공구리파의 정비공 김씨.

차도식 병원의 운영에 대해 나와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임시 병원장 겸 순화기내과 전문의 이선욱 씨.

차도식파의 향후 행보와 조직원들의 관리, 기타 자잘한 조직내 문제에 대해 나와 논의하고 싶어하는 차도식 씨.

마지막으로 내가 미래그룹에 부탁했던 서류가방 형태의 센트리건 개발을 담당하여 시제품을 한창 제작중인 미래테크의 차세대 장비 개발부서 1팀장 이용호 씨.

아직 파릇파릇한 20대 중반인 내가 불과 하룻밤 사이에 나이 먹을대로 먹은 아저씨들의 러브콜만 44개를 받았다는 사실이 믿겨지는가? 난 안 믿겨진다. 믿고싶지 않다.

"어제 그렇게 숨을 참았는데 결국 환상적인 여친은 안 생기고 아저씨들만 나를 찾네."

솔직히 말해서 연락이고 나발이고 다 쌩까고 다시 방에 처박혀서 한숨 더 자고 싶다. 그러다 여동생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따뜻하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운 채 '왔는가 대학을 가지 못한 자여' 라고 놀려주고 싶다.

하지만 죽어도 가기 싫다는 내 정신과는 달리 너무나도 솔직한 육체는 벌써 화장실에서 찬물샤워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고 있었다.

지갑과 ID카드, 재킷 안주머니에 숨길 수 있는 컴팩트한 나이프와 권총 한 정을 챙기면 외출 준비 끝. 나는 우선 가장 급한 미래테크쪽 용무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무인셔틀버스를 타고 여느 때처럼 직장인들이 돌아다니느라 정신없는 동부 지구에 진입, 미래그룹 본사에서 개인적인 약속으로 왔다며 직원에게 스케줄 확인을 받은 다음, 미래테크가 따로 사용하고 있는 차세대 장비 개발 연구소로 안내받았다.

"ID 카드와 방문허가증을 제외한 모든 개인 소지품은 창구에 맡겨주셔야 합니다."

친절한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미래그룹 계열사에 해당하는 경비업체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연구소에 다다르자마자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내 품속에서 권총과 나이프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잔뜩 긴장한 경비원들이 홀스터에 손을 가져다댔지만, 나는 자위용 무기에 불과하며 허튼 짓을 할 생각은 없다고 몇 번이나 설명해서 겨우 넘길 수 있었다.

지저 도시가 위험하느냐 안전하느냐는 둘째치고, 오늘을 기점으로 밀수조직들이 정치인들에게 반기를 들 예정인데 무기없이 지저 도시를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나는 미래그룹의 차기 총수이자 현 미래테크 본부장인 이진형의 인증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별 탈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최고 상사가 괜찮다고 하는데 특급 보안이 유지되어야 하는 시설에 권총과 나이프좀 가지고 온 게 뭐 대수란 말인가.

"그런데 대한민국은 총기 소지 불법 국가 아닌가요......?"

나를 시설 안쪽으로 안내하던 여직원이 참다못해 질문을 건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유일 휴전(전쟁중)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총기는 일반인들에게 가장 낯선 물건이었다.

"불법 맞죠. 하지만 여긴 대한민국이 아니잖아요? 대한민국 영토로부터 12km나 떨어진 지하의 어딘가죠."

"......"

"저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건 아는데, 그냥 그런갑다 하고 생각해주세요. 요즘같이 뒤숭숭한 시국에 맨몸으로 돌아다니면 저같은 사람은 많이 위험하거든요."

"하기야 이 연구소에 단독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지상에 있을 때도 인재나 정보를 빼가기 위해 높은 직급의 직원들에게 접근해서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사례도 있었어요. 지저라고 해서 다를 건 없겠죠."

"이제야 말이 좀 통하시네. 여긴 서울처럼 CCTV가 쫙 깔려있지도, 신고하면 5분 안에 튀어오는 경찰도 없잖아요? 결국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하니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꼭 미리 말씀해주세요. 솔직히 저도 깜짝 놀랐거든요."

가슴팍에 민지혜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ID 카드를 달고 있는 여직원이 프로답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대기업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직원 정도 되면 이런 일도 가볍게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일까. 새삼 미래그룹에 취직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나도 취직만 했으면 썸 정도는 탈 수 있지 않았을까?'

벌써 그녀와 커다란 주택에서 개 한 마리를 기르고 노후를 보내는 상상까지 하고 있던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연상 누님 타입, 커리어우먼, 사교적인 성격, 바쁜 와중에도 자연스럽게 중요한 손님을 맞이해서 안내할 수 있는 멘탈까지. 썸도 타고 싶고 본도 받고 싶은 인물이긴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센트리건 문제가 있었다.

'갓직히 킹트리건은 못 참지.'

그녀와 함께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매끄러운 복도를 걸어 몇 개의 보안 창구를 더 지나쳤을 즈음, 마침내 목적지인 시제품 제작 및 실험실에 당도했다.

이제 민지혜 씨 대신 센트리건 시제품과 썸을 탈 차례다.

먼저 그녀를 떠나보낸 나는 방문허가증을 이용해 접근 승인을 받아 실험실 내부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투명하고 두꺼운 보안경을 착용한 채 열심히 뭔가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이용호 팀장과 동료 직원들이 있었다.

"9mm, 구경은 무조건 9mm로 가야 합니다. 솔직히 9mm 아니면 들고다닐 수 있는 탄약이 200발도 채 안 될 겁니다!"

"야! 넌 성능이랑 호환성은 고려 안 하냐?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는 탄약 구경이 뭐야? 5.56mm 아니냐? 게다가 9mm면 탄약을 넉넉하게 챙길 수는 있겠지만 위력적인 면에선 살짝 불안하다고!"

"소총탄이 호환 문제도 그렇고 위력적인 면에서도 괜찮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지상작전을 하는 사람들이 직접 들고다닐 물건이니까 범용성이 넓은 9mm가 가장 무난하지 않겠습니까?"

"무난하면 안 되지! 너도 영상 자료 봐서 알잖아. 지상에 잔뜩 있는 그...이상한 괴물 놈들은 권총탄 따위 박혀도 씨알도 안 먹힌다니까?"

"괴물 배때지에 권총탄 때려박고도 별 피해없는 영상 자료는 저도 봤습니다. 하지만 이런 휴대용 센트리건은 순간적인 화력을 쏟아부어서 일종의 화망을 형성하는 게 목적 아닙니까? 탄약을 흩뿌려서 괴물 놈들의 접근을 막고, 처리는 인간이 직접 하는 것이 궁극적인 개발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야 이 답답아! 기껏해야 접근만 막는 것과 확실하게 놈들을 제거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고객이 어느쪽을 원하시겠냐? 당연히 후자지!"

"화력만능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어딜 어떻게봐도 9mm가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응 아니야~ 5.56mm가 더 합리적이야~."

저게 정말 나이 먹을대로 먹은 어른들 맞단 말인가.

"서류 가방 형태를 지키기만 한다면 9mm든 5.56mm든 딱히 상관없는데요."

보다못한 내가 뒤에서 한 마디 거들자 그제야 공돌이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항상 부려먹혀지는 진정한 수드라 계급에 속한 호구들.

하지만 이들의 똑똑한 머리와 연구에 대한 욕심, 자신의 몸과 삶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일을 시켜주면 좋아라 하고 받아드는 순진한 성향 덕분에 인류는 여기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러나온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센트리건이 먼저였다.

나는 불과 며칠만에 제작된, 시제품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골격' 앞에 섰다.

일단 서류가방 안에 들어가는 크기의 총기 부품과 자동 장전 장치, 탄창, 그리고 자동적으로 적을 분간하고 발포 명령을 내릴 AI 시스템을 탑재할 추가 공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부탁했던 센트리건은 2030년의 눈부신 공학 기술로도 실현하는데 애를 먹이는 부분이 몇 개인가 있었던 모양이다.

"제가 보기엔 센트리건의 구경보단 자동 조립과 해제 시스템부터 건드려야할 것 같은데요. 센트리건 설치가 안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바로 그것때문에 구경을 정하고 있는 겁니다. 9mm느냐 5.56mm느냐에 따라 들어가는 부품의 크기나 수가 달라지는데, 기획 단계에서 미리 변수를 고려해두지 않으면 개발 단계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조금 전에 말씀하신대로 둘다 개발하자니 시간과 예산이 조금......"

왜 공돌이들은 항상 시간과 예산을 입버릇처럼 언급하는 걸까? 시간과 예산을 좀 더 주기라도 하면 행성 하나를 박살낼 수 있는 반물질 폭탄이라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컴팩트하게 9mm로 가죠."

깐깐해보이는 뿔테 안경을 쓴 직원 말대로 9mm는 범용성이 높다. 대부분의 기관단총과 권총에 폭넓게 사용되는 구경의 탄약이기도 하거니와, 탄약이 가볍고 작아서 휴대성도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총탄과는 달리 권총탄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교적 반동이나 소음 걱정이 덜하다. 다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대한민국 땅에선 9mm 탄약보다 5.56mm 탄약을 구하는 게 더 쉽다는 것이다.

경찰서나 군 부대 탄약고를 털어서 나오는 탄약은 5.56mm 구경이 압도적으로 많을 테니까. 그 부분은 지상에서 탄약 생산 공장을 찾든가, 아니면 지저 도시에 있는 탄약 생산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해야할 것이다.

나도 총기를 보는 눈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대충 준비된 부품들을 눈여겨보았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K-7 소음기관단총 부품이었다.

5.56mm를 사용하는 유사 기관단총인 K-1과는 달리 진짜 컴팩트하면서 소음 기능까지 제대로 챙긴 국산 기관단총이었다. 내가 이걸 알고 있는 이유는 함께 훈련했던 특전사가 들고다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당시 중장갑수색대는 K-2C 소총을 개인화기로 사용했고, 중장갑타격대는 K-15경기관총을 개인화기로 사용한다. 그때 같이 훈련을 하면서 각 부대가 자랑하는 장비를 서로 돌려보기도 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특전사 놈들은 사제 장비를 착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보다 훨씬 더 멋지고 수준 높은 장비를 자랑했었는데, 우린 개인용 엑소스켈레톤이 있다는 식으로 정신승리를 했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지상 특유의 환경 때문에 소음 기능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모양이네요."

"예. 그 점에서 K-7 소음기관단총의 소음기일체형 총열 부품이 베이스로는 딱 좋습니다. 컴팩트하고, 반동 적고,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탄약 호환 문제도 없으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내구성이 탁월해서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문제없이 작동한다는 점이 좋습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걸 보니 만약 5.56mm 구경으로 만들자고 했으면 귀가하는 길에 내 등을 칼로 찌르지 않았을까 싶다. 덧붙여서 5.56mm용 부품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예상대로 K-1 기관단총 총열 부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서류 가방을 던져서 센트리건을 자동 조립하게 한다고 해도 큰 손상은 없을 겁니다."

"그전에 자동 조립이 정말로 가능하긴 한가요?"

"트랜스포머 영화처럼 척척 알아서 조립되는 형태의 센트리건을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반쯤은 그렇죠."

정확히는 서류 가방이 열리면서 안에 들어있던 총기 부품이 조립되며 센트리건이 완성되길 원한다. 0에서부터 10으로 만들어지는 것보다, 5에서부터 10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 훨씬 더 사용하기 편할 테니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다만 서류가방을 던지기 전에 안전장치를 해제한다던가, 스위치를 누른다던가 하는 식으로 센트리건 AI 시스템에 수동으로 신호를 줘야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이길래 절 부른 거죠? 고작 구경이나 정해달라고 부른 것 같지는 않은데."

"시제품에 대한 개발 진척도나 방향성 같은 현황 정보는 발주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정보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서 부른 겁니다. 또한 앞으로 시제품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개발이 진행되면 실사용 테스트가 많이 이루어질테니 주기적으로 부를 예정입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한가해보였다. 또한 생각보다 나를 한가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저 도시에 입주한 뒤부터 갑자기 일감이 사라져서 진행할만한 프로젝트를 찾고 있던 마당에 센트리건 개발 같은 공돌이의 로망이 담긴 프로젝트가 생기니까 다들 들러붙었구만.'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지만, 다음에 호출할 때는 좀 더 그럴듯한 이유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아, 이왕 오신 김에 엑소스켈레톤에 추가로 부착할 수 있는 차세대 장갑판 시제품도 보고 가시겠습니까? 신소재를 개발하기 전에 급하게 몇 개 만든 게 있어서 가벼운 성능 테스트 정도는 해볼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파츠별로 몇 개 가져가셔도 됩니다."

"당근빳다죠!"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이 양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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