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82화 (82/211)
  • 지저에서 독식(4)

    "하늘같은 오빠가 오셨으니 이제 미천한 여동생은 내 침대에서 내려오도록."

    "이번에도 좀 늦게 올 줄 알았더니...쯧."

    여동생은 자기 침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내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을 두들기며 과자를 먹고 있었다. 덕분에 내 침대는 과자 부스러기 천지였다.

    세상 모든 오빠들을 대표해서 감히 말하건대, 동생이란 것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주기적으로 갈궈줘야 말을 잘 듣는 종특이 있다.

    여동생에게서 과자 봉투를 빼앗은 나는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 짭조름한 감자칩을 입에 털어넣었다.

    어째서 아직도 일하고 있어야 할 여동생이 이른 저녁 시간부터 내 방에서 과자를 뜯고 있느냐고 하면, 얘는 그냥 인턴에서 잘리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중이었다.

    자고로 인턴이란 무엇인가? 돈은 쥐꼬리만큼 받으면서 항상 퇴근은 늦어야 하고, 또 남들과의 교류에도 꼭 참석해야하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사 직원이다. 목숨이 날파리같아서 직장내 눈치를 가장 심하게 보는 직종인데, 내 여동생은 빠꾸가 없었다.

    "너 또 칼퇴했냐?"

    "어. 내 일 다 끝내놨으니까 회사에 더 있어봤자 시간 낭비일 것 같아서."

    "걸크러쉬 미쳤냐고."

    자기 직장과 사회생활까지 크러쉬 해버리는 그 고고한 태도에는 나조차도 전율을 느낄 지경이다. 이것이 바로 [품격]!

    "그래서 난 칼퇴했는데 넌 왜 또 칼퇴 못하고 이틀이나 걸렸냐?"

    "지상에서 웬 미친 놈들한테 잘못 걸렸거든. 나중에 헤드캠으로 찍은 영상 파일 챙겨줄테니까 학습해둬. 지상에는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지, 앞으로 네가 뭘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는지 거기에 다 담겨있을 테니까."

    "나 아직 민증도 안 나온 민짜인 건 알지? 좋은 것만 보고 들어도 모자랄 판인데."

    "세계 종말이 민짜라고 봐주겠냐? 촉법소년도 얄짤없는 마당에."

    죽음 앞에 순서없다.

    여동생도 지금은 신성한 오빠의 침대를 과자 부스러기로 더럽히는 못난이일지언정, 언젠가는 스스로 위험을 헤쳐나가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때문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가족을 보호하면서 주기적으로 '충격'을 주고, 그에 적응시키면서 스스로 미래를 대비하게끔 만드는 것 뿐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지저 도시가 안정화되면 직접 여동생에게 장비를 맞춰주고 따로 훈련도 시킬 예정이다. 그쯤되면 여동생도 디그러쉬 인턴에서 잘리거나 하겠지.

    짭쪼름한 감자칩으로 염분을 보충한 나는 겉옷을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차도식파 아지트에서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었기 때문에 냄새는 나지 않지만, 남자는 원래 20대 중반을 넘어서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런 쪽으로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날 갑작스럽게 홀애비 냄새가 난다는 팩트 폭력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수확이 있었는데?"

    내가 지저 도시에서 자리를 비우면 여동생이 아파트에서 혼자 물자를 판매하기 때문에, 이따금 내게 어떤 물자를 확보했는지 묻곤 했다.

    "이번에는 대량의 군수물자랑 장갑차를 확보했지. 다른 상점가를 뒤질 만큼 여유가 없었거든."

    "다른 상점가를 뒤질 여유가 없었는데 그와중에 군수물자와 장갑차를 확보했다는 거네. 지상의 군대랑 싸우기라도 했어?"

    "정확히는 우리가 먼저 선빵을 맞았고, 그대로 되갚아줬지."

    "막장이네. 보통은 이런 시국일수록 다들 서로 돕는 게 정상 아니야? 왜들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전쟁도 없고 다들 먹고 사느라 바빴던 평화로운 시기에도 서로 반목하던 게 인간인데, 갑작스럽게 세상에 종말이 도래하고 준비된 물자는 한정적이라면 당연히 서로 죽일듯이 싸우지."

    상대를 죽이거나 지배해야 내가 더 많이 가지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인간은 부족 생활을 하던 고대부터 항상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것을 원했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동족상잔도 꺼리지 않았다.

    이성과 사고, 지식과 지혜가 있는 동물이면서도 합의와 양보보단 투쟁과 학살을 자행하며 제 살 깎아먹기 좋아하는 종족. 그게 바로 인간이다.

    "아, 그리고 말 나온김에 하나 더. 이제 당분간은 모든 물자 공급을 동결할 거야."

    "뭐? 갑자기 왜?"

    다시 내 손에서 과자 봉투를 가져간 여동생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 물자 공급을 끊어버리면 아파트 주민들이 얼마나 크게 반발할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치인들이 꼴받게 하잖아. 그래서 당분간 모든 밀수조직이 지상 작전을 포기하고 물자 공급도 동결하기로 했어."

    "정치인들이 뭘 했길래?"

    "북부 지구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밀수조직을 이용해서 북부 지구 거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려 하더라고. 거부하면 밀수조직을 공개적으로 때려서 밀수를 원천봉쇄 시켜버리겠다고 협박하니, 우리도 배를 째기로 했지."

    "갑자기 물자 공급이 동결되면 일반인들의 분노가 밀수조직이 아니라 정치인들에게 향할 테니까?"

    "그렇지. 당분간은 상황 지켜보면서 분위기가 충분히 과열된다 싶으면 몰래 루트를 파둔 남부 지구에서 새롭게 밀수를 시작할 거야. 그리고 물자난에 허덕이고 있던 남부 지구의 상류층에게 원없이 팔아제끼는 거지. 그럼 남부 지구와 북부 지구의 거주민들은 모두 우리 편이 될테니 그때 준비해둔 협상안으로 정치인들과 거래할 생각이야."

    "좀 치사하긴 한데 괜찮은 전략이네. 그런데 정말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갈까?"

    여동생이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당연히 정치인들도 눈엣가시인 밀수조직의 장들을 물밑으로 압박하려 들겠지. 군대를 동원하든가,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해주는 비밀 요원들을 파견시킨다던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다들 그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의 장들은 오늘을 기점으로 모두 음지에 꼭꼭 숨어들었다. 갑자기 밀수조직이 공중분해된 것처럼 모든 흔적을 지우고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들어갔다는 얘기다.

    유일하게 표면에 드러난 건 나뿐인데, 나는 남부 지구 거주민이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과감하게 접근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만일에 대비해 자기방위용으로 권총과 나이프를 몇 자루 챙겨왔으니까.

    경비 업체 직원들이 남부 지구 거주민이라면 따로 몸수색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을 잘 지키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류층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의미없고 귀찮기만한 몸수색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 지구 거주민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몸수색부터 하기 때문에, 남부 지구에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파견 나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범죄따윈 꿈도 꿀 수 없다는 모양이다.

    "너도 당분간은 물건 팔지 말고 멀쩡하게 회사 다니는 얼빵한 인턴 연기나 해."

    "안 얼빵하거든?"

    "안 얼빵한 인턴은 칼퇴같은 거 안 해."

    여동생에게 과자 몇 봉을 더 챙겨서 밖으로 내보낸 나는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고민했다.

    여동생이 이대로 디그러쉬에서 인턴을 계속하다보면 일을 못 하든 잘 하든 결국 아버지에 의해 정직원이 될 것이다. 사실 민짜인 것 치곤 일머리가 있는 편이라 정직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여동생이 나와 어울릴수록 디그러쉬의 비밀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해 여동생에게 과한 권한은 주지 않고 적당히 부려먹기만 할 게 뻔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우리 남매는 결국 가성비 좋은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럼 차라리 여동생에게 과한 실적을 안겨서 고속 승진 시키는 건 어떨까.'

    디그러쉬는 기본적으로 건설과 관련된 전반적인 분야를 다루는 기업이다. 지저에 도시를 만들 만큼 대단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기술이나 장비 면에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기업이 지금은 지저 도시 완성을 위해 소소한 일거리나 하면서 많은 장비를 놀리고 있는 실정이다. 일을 수주받아야 먹고살 수 있는 기업인데, 당장 살림살이가 빠듯한 정부가 큼지막한 일을 수주해주지 못 하기 때문에 그런 거다.

    하다못해 전문가나 장비를 대여라도 해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정부 주도하에 일반인에게 의미없는 하청(일일노역)이나 주면서 시간과 돈을 모두 축내고 있다.

    '북부 지구가 성공적으로 자력 개발권을 가져온다면 디그러쉬에서 놀고 있는 전문 인력과 장비를 모두 대여할 수 있다. 아예 프로젝트를 맡기는 건 규모가 너무 커서 불가능하겠지만, 인력과 장비만 대여하는 거라면 북부 지구에서 어떻게든 충당할 수 있어. 그럼 여동생에게 모든 계약을 몰아줘서 엄청난 실적을 만들어주는 것도 가능해.'

    그 과정에서 거래 대금이 부족하다면 과감하게 투자를 받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북부 지구는 지저 도시에서 가장 인구 비율이 높다. 당연히 밀수조직 덕분에 경제도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라 결코 경제적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남부 지구의 상류층에게 '투자'를 받으면 된다.

    사이가 좋지 않은 남부 지구와 북부 지구를 화합시킨다는 명목하에 투자를 유치하고, 지구간의 거주민 왕래와 거래를 활성화시키면 정부의 간섭이 없어도 자력으로 개발하고 발전하는 게 가능하다. 이론상으로는.

    '언젠가는 밀수만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도 한계점이 올 테니...동부 지구의 대표 기업중 하나인 미래그룹에게 투자를 받는 것도 중요해.'

    디그러쉬 못지 않은 기술과 장비를 갖춘 미래그룹. 그들또한 디그러쉬처럼 지저 도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대기업이기에 가능성만 보인다면 북부 지구에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걱정되는 것은 식량과 인프라.

    나는 아직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서부 지구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재배되고 있는 다양한 농작물과 가축들은 지저 도시의 미래 먹거리로 확정되어 있다.

    이미 거대한 공장에서 스마트 팜 시스템으로 극강의 효율로 재배되고 있는 밀과 쌀, 햇빛 한점 들지 않는 지저에도 엄청난 부지를 자랑하는 과수원, 그리고 과수원 못지 않은 목초지와 축사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가축들.

    모두 지저 도시라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별 무리없이 성장시키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한 것들이다. 빠르면 내년 초, 늦어도 내년 여름이면 일반인들에게 정상적으로 공급될 것이다. 실제로 테스트를 위해 이미 한 차례 공급된 적도 있다.

    '서부 지구에서 농작물의 종자와 가축을 좀 빼돌려서 북부 개발구에서 키우는 것도 생각해봐야겠네.'

    정부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이상 합법적으로 구하기는 힘들테니, 서부 지구에 일꾼으로 파견나가는 북부 지구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야할 것이다. 밀수처럼 불안정한 식량 확보 수단보단 안전한 식량을 확보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겠나.

    인프라 문제는 당장 나도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에, 우선 북부 지구가 최대한 지저 도시에 빌붙는 게 낫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지는 문제들 투성이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쉬지 않고 일 생각만 하다니. 진짜 미쳐버린 것인가 박한성......"

    하다못해 미래의 여자친구 상상이라도 해!

    나의 모든 것을 포용해줄 수 있는 천사같은 성격에, 청순가련한 스타일,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환상적인 몸매와 내 혼신의 아재 개그에도 해맑게 웃어줄 수 있으며, 내가 여동생을 갈구면 옆에서 같이 갈궈주는 그런 여자친구!

    내가 그런 여자친구를 가질 자격이 있느냐고? 당연하지. 나는 아직 긁지않은 복권, 밀수왕이 될 남자, 지저에서 모든 것을 독식하고 정점에 오를 사나이니까.

    "그런 여자친구 생길 때까지 숨 참는다. 흡!"

    * * *

    미래테크 소속 생명공학 부서의 선임 연구원 최진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실험 속에서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정신만은 커피를 열 잔쯤 마신 것처럼 맑았다.

    특수 밀폐 용기에 보관된 출처 불명의 검은색 액체. 연구원들 사이에선 진짜 '암흑물질' 이라느니, '물질 X'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것은 신비함이라는 표현을 함축시킨 것 같았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는 걸쭉한 액체 상태지만 일단 공기와 노출되면 즉각 기화하는 매우 특이한 성질을 띄고 있으며, 또한 어떤 물질과도 상호작용을 하지 않았다.

    온갖 반응성 시약을 섞어봐도 요지부동이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자그마한 변화조차 없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유일하게 알아낼 수 있었던 사실은 검은 액체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미약한 전기 신호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뉴런처럼.

    그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이런 물질이 지구 전역의 하늘을 뒤덮을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로 축적된다면 지상과 인공위성간의 통신이 두절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겠다고.

    '...연구를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하게 되네.'

    시약 검사는 더이상 진행할 수 없었기에 그는 이제 과감한 검사 단계로 넘어가볼 생각이었다.

    바로 살아있는 생물에게 이 수상쩍은 액체를 직접 투여해보는 것이다. 물론 그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연구용 생쥐였다.

    지저 도시에 입주한 뒤부터 연구용 생쥐를 공급받는 게 굉장히 어려워졌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한다는 연구소장의 지시가 있었지만, 이 수상쩍은 물질을 최우선적으로 연구해보라고 한 것도 그였기 때문에 최진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네녀석이 과연 살아있는 생물의 체내에 들어가도 꿋꿋하게 반응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최진하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무균상자 안에 들어있는 생쥐를 잡아 주사 바늘을 들이밀었다. 실린더 속의 검은 액체가 주사 바늘을 타고 생쥐의 혈관으로 흘러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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