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75화 (75/211)
  • 폭풍의 눈(5)

    "쉽게 가자고."

    최연호는 철제 의자에 사지가 결박된 채 망신창이가 된 남자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국정원 현장 요원이 하는 일의 대다수는 쓰레기같은 일이다. 누군가를 속이는 건 기본이고, 납치해서 고문하거나 죽이고, 심지어 시신을 유기하거나 적당히 꾸며서 공작하는 일까지 한다.

    물론 그또한 베테랑 요원이라는 전제하에서 주어지는 임무지만, 중요한 건 그런 종류의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부터 더이상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현장 요원들 중에서도 정보 수집이나 요인 보호 같은 임무만 전문적으로 맡는다고 해서 순진하게 '좋은 사람 아닌가?' 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설령 근본부터 정상인이었을지라도, 현장 요원이 되기 위해 성격부터 가치관까지 비틀어버리는 비인도적인 훈련과 교육을 받게 되는데, 덜 거친 일만 맡는다고 좋은 사람일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 이번에도 최연호가 맡은 일은 으레 '그런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보자고. 이름 심전학, 나이 35세, 직업은 지저 도시 원자력발전소 보안팀장, 친인척과 함께 하지 않고 홀로 지저 도시 입주. 맞나?"

    "......"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던 사실이니까 굳이 대답할 필요도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지. 이거 다 녹화중이라고."

    빠악!

    나름 복근이 단단한 복부에 최연호의 날카로운 주먹이 박히자 크윽! 하는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곧 심전학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최연호는 다음 서류를 넘겼다.

    질문을 여러번 했던 만큼 서류 또한 많이 넘긴 탓에 뻣뻣한 A4 용지의 질감이 많이 구겨진 상태였다.

    "이미 수차례 언급했지만 네 자택과 네 업무용 사무실은 모두 조사를 끝마쳤다.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서 샅샅이 뒤졌지. 그래서 뭘 발견했을 것 같아?"

    최연호는 푸른색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금속 증거보관함에서 밀봉된 에어백 하나를 꺼내들었다.

    에어백 안에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통짜 금속 주사기와 검은색 액체가 소량 담긴 앰플이 나왔다. 마약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터.

    하지만 샘플로 보낸 또다른 앰플을 국과수에 보내서 조사를 부탁한 결과, 굉장히 기괴한 내용물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기괴함이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 조사를 담당했던 국과수 직원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당시 최연호와 통화하던 그가 말하길 이것은 지금껏 인류가 마주한 적 없는 생체 데이터의 집약체라고 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DNA의 일종이라고 단정짓기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한다.

    "막말로 이런 수상쩍은 것을 네 팔뚝에 꽂았든 말든 사실 우린 그다지 신경 안써. 평범한 마약사범이었다면 그냥 사법부에 넘겨서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네 직업, 사태 당일의 네 알리바이, 그리고 네 집에서 발견한 다른 흔적을 조합하면 그냥 사법부로 넘길 수는 없겠더라고."

    "흐으...흐으......"

    "그래, 계속 숨쉬어. 아직 할 말도 많을 텐데 벌써부터 숨이 차면 안 되지. 물도 좀 줄까?"

    최연호가 자기 옆에 놔둔 물 양동이를 들어올려 심전학의 얼굴에 천을 덮은 뒤 확 쏟아부었다. 사지가 결박된 심전학은 열심히 몸부림치는 게 고작일 뿐, 필사적으로 산소를 갈구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흠뻑 젖은 천을 걷어낸 최연호는 자신의 정장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내며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심전학의 동공이 반쯤 풀린 것을 확인한 그는 때가 무르익었다 싶었다.

    사람은 극한까지 몰아세우면 죄가 있든 없든 자신이 무조건 잘못한 게 있다고 생각하는 연약한 동물이다. 고문에 대비해 고도의 정신력 강화 훈련을 받은 정예 요원이라면 또 모를까, 일반인이 이만한 압박감을 견디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최연호는 다시 한 번 앰플과 주사기가 들어있는 에어백을 흔들며 물었다.

    "이건 뭐지? 네가 직접 투여했나? 아니면 타인에게 투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입한 거냐?"

    "내가...직접......"

    "앰플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뭔지는 알고 투여한 건가?"

    "흑연(黑煙)의...정수......"

    "흑연의 정수? 그게 뭐지?"

    최연호가 재차 다그치듯 물었지만 심전학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지 않겠다는건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겠다는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태도는 매를 부르는 행위였다.

    "아무래도 기억이 잘 안 떠오르는 모양인데, 내가 기억나게 해주지."

    최연호는 심전학의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붙잡더니 손등을 향해 콱 내려찍었다. 그러자 우드득 하고 손가락뼈가 꺾였다.

    근육과 뼈가 함께 파열될 때, 그와 동시에 손에 위치한 섬세한 신경다발을 자극한 탓에 통증은 매 초마다 곱절로 늘어난다. 여기서 좀 더 나가려면 손톱을 뽑고 여린 속살을 거친 꼬챙이로 박박 긁어내는 방법도 있다.

    다만 그렇게까지 하면 전기고문 만큼이나 상대의 정신이 극도로 피폐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는다.

    '효과적인' 고문 행위 중에서도 인간의 신경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건 베테랑 현장 요원에게도 꽤 모험적인 일이다.

    "좋게좋게 가자고. 굳이 이런 기기괴괴한 증거품따위가 없었다고 해도 너는 현행범이야. 간 크게도 지저 도시 원자력발전소에서 뒷공작을 벌인 현행범."

    원자력발전소의 보안팀장이라 그런지 벌인 짓이 아주 깜찍했다. 경력은 참 깨끗한 인간이면서 대체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운 건지, 며칠 전 정전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최초의 대규모 정전 사태는 갑작스럽게 지저 도시에 전력을 공급하느라 발생한 기술적 문제였다면, 이번 정전 사태는 명백한 고의가 다분한 인재(人災)였다.

    보통이었다면 이 경우 즉각 현행범을 체포해서 대공용의점부터 확인하겠지만, 최연호는 굳이 대공용의점을 확인하지 않았다.

    외국인 첩자가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보안을 자랑하는 지저 도시 원자력발전소에 보안직원으로 채용되었을리가 만무하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지령을 받은 국내인이라고 하기엔 경력이 너무 깨끗했다. 지상에서 마지막까지 조사되었던 데이터베이스가 지저 도시로 넘어왔는데, 심전학이라는 인물에 대한 프로필은 정말로 평범 그 자체였다.

    친인척도 멀쩡하게 살아 있고, 계좌에서 갑작스럽게 들어오거나 나갔던 흔적이 있는 수상쩍은 자금의 흐름도 없었다.

    유일하게 수상쩍은 점이라면 친인척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는 특혜 자격이 있었음에도 혼자 지저 도시에 입주했다는 점 정도?

    "정신이 좀 들어?"

    격통에 몸을 비틀고 있던 심전학에게 최연호가 재차 물었다.

    고문이란 건 격하게 할수록 너무 잦으면 안 된다.

    고문과 질문, 심리전을 이용한 압박을 중간중간에 텀을 두고 해야 한다. 물론 이또한 패턴이 있으면 안 된다. 고도로 훈련된 상대라면 고문 패턴을 읽고 미리 정신적으로 대비하기 때문이다.

    고문을 당하는 상대로 하여금 지금 나는 네게 기회와 고통을 동시에 주고 있으며, 또한 내가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이다 라는 무언의 권위와 권력을 내보여야 한다.

    "바로 손가락 두 개째로 넘어갈까? 아니면 그럴싸하게 지어낸 이야기부터 듣고 두 개째로 넘어갈까?"

    또한 상대에게 절박함을 심어줘야 한다. 네가 진실을 얘기하든 거짓을 얘기하든 고통을 피할 수는 없을테니 적당한 시점에서 타협하라는 식으로.

    고통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하게끔. 악마가 유혹하듯 은연중에 살살 달래는 거다.

    이러면 대부분 넘어간다.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일 수 있을까 라는 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심전학 역시 그런 부류중 하나였다.

    "흑수(黑水)...선택받은 자에게...내가 직접...투여해야 하는 것."

    "네 몸에 투여할 목적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투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누구에게?"

    "어둠 속에서도...빛을 갈구하는 자......"

    "그게 누군지 정확히 말해."

    "정전을 일으키면...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말인즉슨 심전학 본인도 그게 누군지는 모른다는 얘기였다. 다만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사고를 일으켜 정전 사태를 유발했다는 뜻이 된다.

    "그 사람을 어떻게 찾을 생각이었지? 지저 도시는 굉장히 넓고 사람이 많은데."

    "인도가...있었다."

    "누구의?"

    "■■■."

    "뭐?"

    "......"

    최연호는 드물게도 인상을 찡그리며 재차 물었으나 심전학은 묵묵부답이었다. 뺨을 툭툭 쳐봤지만 더이상 반응이 없었다. 동공은 확실하게 풀렸고,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야, 이 새끼 깨워. 이제 뭔가 토해내기 시작했으니까 자백제 투여하고, 암시 걸어. 기억을 적당히 주물러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뱉을 거야."

    "얼마나 투여합니까?"

    "성인 남성 기준으로 얼마나 투여해야 하는지 이미 몇년 전에 통계나온 게 있잖아. 그대로 하면 되지."

    "이정도로 너덜너덜한 대상에게 성인 남성 기준 1회분을 그대로 투여하면 잘못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창고 구석에 서있던 남성이 007 가방을 책상 위에 쿵 하고 얹어놓으며 반문했다.

    최연호가 가지고 다니는 연장 가방보다도 훨씬 더 무거워보이는 가방 안에는 온갖 약물과 주사기, 각종 의료도구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새끼가 최소한 뭔가 알고 있다는 건 증명했으니까 내 일은 여기서 끝이야."

    박한성을 조사하는 김에 잠깐 연락을 받고 도움을 주러왔던 최연호는 녹화 장비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특정 대목을 재생시켰다.

    -누구의?

    -■■■.

    -뭐?

    '말이 씹혔군. 일단 뭔가 뱉어내긴 뱉어냈으니 후배 놈이 적당히 약물로 버무려주면 정확히 토해내겠지.'

    최연호는 비밀 창고에서 홀로 빠져나와 다시 남부 지구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심전학이 현행범으로 잡힌 장소가 바로 이곳 남부 지구였던 것이다.

    * * *

    "어둠속에서 빛이 터지는 광경을 볼 때마다 눈이 즐겁다니까."

    우리를 엿먹인 군 부대가 있던 장소의 하늘에서 신호탄을 쏘아올린 우리는 곧장 수유시외버스 터미널까지 후퇴했다.

    그곳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의 건물 옥상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하늘을 바라보고있자니,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는 붉은 신호탄이 모 아파트 단지를 밝게 비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센 돌풍 속에서도 귓가를 자극하는 총성과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곧 기름 탱크 같은 것이 터진 모양인지 화려한 불기둥이 잠깐이지만 솟구쳤다.

    "끝났군."

    정원석의 짧막한 혼잣말에 나 역시 동감했다.

    뭐가 파괴됐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에게 끌려있던 어그로가 저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아무리 군 부대의 힘이 막강해도 뚫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애초에 저쪽은 만전의 상태도 아닐 테니까.

    오늘은 일단 터미널에서 머무르고, 내일 죽음의 기운밖에 남지 않은 저곳에 방문해 남겨져있을 군수물자와 장갑차를 징발해올 생각이다.

    그리고 특별히 기상 상태를 고려해서 내일 한 번 더 열리게 될 격벽으로 돌아가면 된다.

    "오늘 할 일은 끝난 것 같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아침에 시작했던 지상 작전이 어느덧 오후를 넘어 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고작 하루동안 겪은 일 치곤 정말 많은 일을 겪었기에 다들 심신의 피로도가 장난아니었다. 특히 부상자를 돌보는 것 만으로도 조직 전체가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폭풍이 잦아들기를 기도하며, 싸늘한 터미널에서 소수의 불침번만 세운 채 옹기종기 모여 잠들었다.

    지상에서 다시 눈을 뜨더라도 아침 햇살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더이상 우리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않았다.

    다만 머리맡에 놓아둔 헤드램프의 불빛만큼은 나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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