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74화 (74/211)
  • 폭풍의 눈(4)

    콰아아아아앙!

    유탄이 현관을 막고 있던 바리게이트를 아작내자 엄청난 양의 먼지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눈보라까지 삽시간에 내부로 밀려들어왔다.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부터 움직여!!"

    정원석의 지시에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이 부상자들을 업거나 양팔에 하나씩 들쳐메고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밭을 파헤치는 인간 불도저들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엑소스켈레톤은 출력면에선 고릴라도 가볍게 찍어누르는 괴물일지언정, 외골격 구조상 기동성에서 약간 아쉬운 모습을 보일수밖에 없었다. 통짜 금속 덩어리가 인간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운 것은 아니니까.

    "야광봉 던져!"

    가장 최후미에서 나오던 이들이 야광봉을 한웅큼 뽑아들어 이곳저곳에 마구 흩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손전등과 헤드램프를 모두 끈지 오래였다.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 눈보라가 적들과 우리 사이의 빛과 소음을 모두 가려주는 천연 장막이 되어줄 것이다. 그 틈에 야광봉을 주변에 마구 뿌려둔다면, 잠깐이지만 놈들의 움직임을 꼬아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부터 총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만 사용한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

    그 말을 끝으로 정원석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부터 탈출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이 책임져줄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나 역시 권총과 대검을 들고 있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사용할 의향은 없었다.

    적들은 지금 거센 눈보라 덕분에 빛과 소음, 그리고 주방 세제 덕분에 우리의 체취까지 모두 놓친 상황이다. 잘만 하면 더이상 교전하지 않고 후퇴할 수도 있는데, 굳이 총성을 내서 추적의 빌미를 줄 이유가 없었다.

    최후미에서 호위조와 함께 운반조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나는 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비명소리에 흠칫했다.

    폭풍 한복판에서 우릴 놓쳤기 때문에 어지간히도 화가 난 것일까. 우리처럼 학교밖으로 뛰쳐나온 나이트워커 수백 마리가 사방팔방을 헤집는 기척이 느껴졌다.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지만 일단 걸리기만 하면 갈기갈기 찢어주주겠다는 살의가 피부에 확 와닿았다.

    나는 눈길에 걸음걸이가 턱없이 느려진 호위조의 등을 열심히 밀면서, 주기적으로 좌우와 후방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삼각산동은 온통 아파트 천지였기 때문에 눈이 미친듯이 내려도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거대한 아파트가 일종의 표지판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길이 제한적이라는 것도 한몫 하지.'

    눈으로 뒤덮인 아파트 단지를 무작정 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석적으로 도로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후방의 적들이 금세 우리를 따라잡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불가피한 교전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를 놓쳐서 분노에 찬 나이트워커들이 도로 한복판에 고립된 우리를 찢어발기러 오겠지.

    그런 일 만큼은 피해야 한다.

    '우린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다. 고통을 알고, 피로를 느끼고, 체력의 한계가 존재하는 나약한 생물이지. 하지만 저 놈들은 머리통만 멀쩡하다면 절대로 멈추지 않아.'

    처음 나이트워커와 마주쳤을 때 놈의 배에 권총탄을 몇 발이나 박아넣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압되기는커녕 더욱 격렬하게 달려들었던 놈의 흉흉한 기세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놈들이 무려 수백 마리나 우리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이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잠깐이지만 나는 도구봉파가 가져온 버스를 이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금세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대형 버스라고 해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조금 가다가 퍼져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돌아가면 공구리파에게 차량 개조 수주를 넣어봐야겠어.'

    최소한 제설이 가능한 차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술 더 떠서 도로에 늘어선 차량들을 밀어낼 수 있는 마개조 불도저라면 더더욱 좋고.

    자칫 잘못하면 진창에 빠진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눈밭 속에서 우리는 땀을 뻘뻘 흘렸다. 엄청난 추위로부터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눈더미를 헤치고 나가기 위해 대량의 칼로리가 소모되고 있었다.

    너무 추운 환경에 오랫동안 노출되어있으면 어느 순간 인간의 신경계가 맛이 가버려서 더위를 느끼다못해 결국 몸에 걸친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동사한다던데, 우리도 곧 그렇게 되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기온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눈은 언제 그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거기에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나이트워커가 우릴 뒤쫓고 있어. 정말로 죽느냐 사느냐가 걸려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대충 가까운 건물에 숨어들어가는 멍청한 짓은 하면 안 된다. 잠깐 놈들의 시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멈추는 건 우리의 손해이기 때문이다.

    멈춰서 쉬기엔 우린 너무나도 많은 열량을 잃었고, 땀을 뻘뻘 흘렸다. 체온을 보존하려면 다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100% 놈들에게 걸린다.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열심히 앞사람의 등을 밀고 있던 그때, 가장 앞에서 조직원들을 인도하고 있던 정원석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혹시 몰라 최후미에 서겠다던 내게 정원석이 무전기 하나를 맡겨둔 것이다.

    -치직, 전방 150m 쯤에 나이트워커 무리 발견. 눈에 파묻힌 대형 버스를 지나쳐 곧장 우리 쪽으로 접근중. 우회, 혹은 교전에 대한 의견이 필요함.

    "놈들의 숫자는?"

    -여섯.

    기껏 우회하자니 우리쪽 인원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 무엇보다 우릴 뒤쫓는 놈들도 있어서 섣불리 경로를 이탈하는 건 악수중의 악수였다.

    그럼 교전할까?

    둘셋 정도라면 빠른 근접전을 유도해서 어찌어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섯이라면 반드시 총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그또한 자살행위다.

    해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무릎 아래까지 푹푹 잠기는 눈밭을 내려다보았다.

    "전원 눈 속으로 파고드세요."

    -...잘 못 들었다.

    "눈 속으로 파고들어서 모습을 감추세요. 놈들은 움직임이 빠르니까 금방 지나칠 텐데, 그때 다시 일어나서 움직이면 됩니다!"

    우회도, 교전도 불가능하다면 답은 은신이다.

    우리는 눈이라는 길리슈트를 착용하고, 놈들이 우리 곁을 지나갈 때까지 짧은 시간 정도만 버티면 된다.

    곧 내 제안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정원석이 조직원들에게 똑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이윽고 밀수범들이 미친듯이 발아래의 눈을 파내서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흙과 달리 눈을 파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서, 놈들이 우리를 눈치채기 전에 조용히 눈더미 속에 숨는 것이 가능했다.

    대신 우리는 지독한 냉기 속에 포위된 채,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며 숨소리까지 죽여야 했다. 이러다 누구 한 명이 심장마비로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사박사박.

    나는 가볍게 머리 위에 덮은 눈더미 틈새로 우리 곁을 지나치는 나이트워커 무리를 확인했다.

    놈들의 창백한 피부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검붉은 피와 얼어붙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추정컨대 대형 버스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던 군인들인 것 같았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제발 그냥 지나가라.'

    지금 네놈들은 눈뜬-눈은 없지만-장님이다. 우리는 빛과 소음, 냄새까지 모두 차단하고 쥐죽은듯이 숨어있다. 따라서 절대 우리를 발견할 리 없다.

    나이트워커가 한 마리, 나이트워커가 두 마리, 나이트워커가 세 마리, 나이트워커가 네 마리, 나이트워커가 다섯 마리.

    '나이트워커가 여섯......'

    여섯 마리째가 내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분명 지척에서 움직이는 소리는 들렸는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조직원을 돌아보았다. 혹시 그에게 다른 놈을 보지 못 했느냐는 무언의 시선을 보냈으나, 그는 두눈을 부릅뜬 채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꽉 틀어막고만 있었다.

    그의 경악어린 시선은 나보다 조금 더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측면을 둘러보는 것도 아니고 위쪽을 바라볼 필요가 있나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때.

    눈을 작게 쌓아두었던 내 털모자 위로 두껍고, 살짝 물컹거리고, 아마도 축축할 것 같은 무언가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내 옆의 조직원은 연신 눈동자를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쉴새없이 움직이며 내게 무언의 경고를 내뱉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올린 뒤, 내 머리 위에 축 늘어진 혓바닥 같은 것을 꽉 붙잡았다.

    "!"

    콰악! 푹!

    촉수가 내 머리통을 꿰뚫기 직전, 아래로 확 끌어당겨 내린 뒤 뻥 뚫린 눈구멍에 대검을 쑤셔박았다. 내 머리 위에서 간을 보고 있던 놈은 저항할 틈도 없이 즉사했다.

    조금 쌓여있던 눈더미가 잠깐 요란하게 폭삭 내려앉았을 뿐, 결과적으로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되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었던 거다.

    "이제 움직여도 됩니다."

    무전기를 통해 나이트워커 무리가 모두 지나갔음을 알려주자 선두 대열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옆의 조직원은 몸을 덜덜 떨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너무 추운 공간에 경직된 자세로 앉아있던 탓에 다리가 굳었다고 생각하여, 도움을 주기 위해 손을 내뻗었다.

    "히익!"

    내 도움을 받는 대신 새된 소리를 내뱉으며 벌떡 일어난 그가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

    -모두가 박뱀같은 건 아닙니다.

    나도 알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일행은 한층 더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조금 전에 나이트워커 무리를 속여넘기느라 심력을 많이 소모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눈더미 속에서 잠깐 '휴식'했던 탓에 페이스 조절이 어긋난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더이상 걷지 못 하겠다느니, 잠깐 쉬었다 가자느니 같은 철없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하다못해 눈더미에 파묻힌 대형 버스를 타고 가자는, 머리에 꽃밭이 가득한 놈조차 없었으니 말 다했다.

    "후우...후우...거의 다 왔어."

    마침내 삼각산동을 벗어난 우리는 곧장 삼양로를 따라 올라갔다. 우리를, 정확히는 도구봉파를 삼각산동으로 밀어넣은 일당이 롯데마트 바로 옆에 있었다.

    최후미에서 대열을 이탈한 나는 정원석이 이끌고 있는 선두로 향했다.

    이제 나이트워커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도구봉파는 이미 막대한 피해를 본 상황이다.

    우선 엑소스켈레톤 몇 대가 파손되었으며, 정예 조직원들중 일부는 사망, 3분의 1 정도는 부상자 신세다. 한술 더 떠서 오늘치 지상 작전 물자 회수를 싹다 날려먹었으니, 이대로 복귀하면 도구봉파는 자칫 파산할 위험도 있다.

    라이벌 조직 소속인 내 입장에선 그또한 나쁘지 않지만, 오늘 그들과 함께 하면서 느꼈다.

    무조건 타인을 짓밟거나 끌어내려서 내가 위로 올라가는 치열한 경쟁이 아닌, 서로 상부상조하는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규모가 큰 밀수조직 하나가 사라지면 밀수조직 전체의 힘이 약해질 뿐더러, 물자를 공급받아야 하는 지저 도시 거주민들에게도 타격이 들어온다. 손해밖에 없는 결과다.

    하지만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니 법이나 보험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 피해를 입으면 복구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이유도 있어서 지금까지 밀수조직들끼리 암묵적으로 서로를 건드리지 않았던 건데, 제 3자가 밀수조직을 건드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정원석에게 다가가 저 멀리 보이는 고급 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대로 놈들에게 당한 채 물러날 겁니까?"

    "...지금 우린 피해가 너무 커요. 탄약도 많이 소모했고,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인원도 적죠. 당장 물러나야 하는 건 분하지만 어쩔 수 없죠."

    "손 안대고 코푸는 방법이 있다면 어쩔 겁니까?"

    "?"

    "우릴 사지로 밀어넣은 저 놈들을 싹 다 조지고, 놈들이 가지고 있던 군수물자와 장비까지 노획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그러고는 싶지만 우린...아."

    정원석은 내 말을 몇 번 곱씹더니, 곧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품속에서 붉은색 권총을 꺼내들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조직의 행동대장 급에게만 지급되는 신호탄발사기였다.

    폭풍의 눈이 움직이면 폭풍또한 같이 움직이는 법이다.

    말하지 않았는가? 우린 기꺼이 폭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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