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72화 (72/211)
  • 폭풍의 눈(2)

    "빨리빨리 움직여!"

    "비품실에 테이프랑 접착제 많이 있어! 전부 갖다 써!"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막아!"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는 여기 대형 테이블좀 들어서 옮겨줘!"

    나와 정원석이 합심해서 세운 작전의 의거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발에 불이 나도록 움직였다.

    교실에 한가득 있는 책상과 의자를 빼와서 얼기설기 엮고, 노끈으로 꽉 묶었다. 책상과 의자 다리는 모두 금속이기 때문에 일단 엮어두기만 하면 튼튼한 고정쇠 역할을 해주었다.

    1층의 넓은 중앙 홀에는 급식실의 긴 테이블과 밀가루 포대를 쌓아서 임시 방벽을 만들고, 중앙에 자그마한 모닥불을 만들어서 원형으로 부상자들을 둘러앉게 했다. 수도관이 완전히 얼어버렸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스프링쿨러가 작동할 일은 없었다.

    "이정도면 얼추 준비가 됐겠죠?"

    정원석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들의 호전적인 성향과 인간에 대한 집착은 집요합니다. 한 번 포착한 인간은 추적할 수 없을 때까지 추적하는데, 하물며 건물 안에 가만히 짱박혀있는 인간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뭐가 막고 있든, 제 몸을 깎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건물 내부에 침투하여 우리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다.

    창문마다 테이프와 접착제를 바르고, 의자나 책상을 엮어서 바리게이트를 세웠다고 해도 무식하게 들이박겠지. 마지막으로 나는 모든 조직원들에게 급식실에서 찾은 대형 세제가 담긴 병을 하나씩 나눠줬다.

    최소 수백명 이상을 먹이는 학교의 급식실 특성상, 식자재든 주방도구든 무조건 대용량, 대형으로 갖추고 있는 편이다. 스위트콘 10kg 대용량 캔을 본 적 있는가? 주걱으로 퍼먹어도 끝이없다.

    "지금 각자에게 나눠준 세제는 자신의 목숨줄이라 생각하고 소중하게 보관하십시오. 기본적으로 놈들은 우리를 빛과 소음을 통해서 감지하지만, 인간이 가진 특유의 체취(냄새)로도 감지합니다. 제가 그것때문에 5km 이상 집요하게 추적을 당한 경험이 있으니 믿어도 됩니다."

    "처음 듣는 정보네요."

    "차도식파 내에서도 기밀 정보 취급이라서 아직 타 조직과는 공유하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지금 공유했다는 건 우리를 믿고 있다는 증거겠죠? 하하, 이거 기대받고 있는 것 같아서 쑥스러운데요?"

    "도구봉파의 도움을 못 받으면 저 혼자 살아나갈 방법이 없고, 도구봉파 역시 제 정보가 없다면 여기서 살아나가기 힘들 것 아닙니까. 서로 상부상조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

    바깥에서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일 만큼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 지금, 나이트워커와 나이트워치가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 학교 근처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 보초를 서고 있던 도구봉파 조직원들의 다급한 보고, 짐작컨대 학교를 둘러싼 놈들의 숫자만 해도 가볍게 세자리수는 넘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도구봉파를 돕지 않고, 어느 수상쩍은 군 부대의 위치만 확인한 채 빠졌더라면 지금쯤 무사히 노원역에 도착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기어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뛰어들었고, 그 결과가 이거다. 라이벌 관계인 사람들과의 불편한 동맹.

    물론 목숨부터 건지는 것이 중요하니까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선 나도 이의가 없다. 정원석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

    "놈들은 우리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제 몸 가리지 않고 덤벼들 겁니다. 바리게이트가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까지 우리는 방어자라는 이점을 적극적으로 살려서 놈들을 처리하고,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찾아내야 합니다."

    눈이 내리니까, 이곳이 방어하기 용이한 장소니까 무작정 이곳에서 버티기만 해야 한다고? 그건 우리의 전력이 온전할 때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어느 시점에서 저와 정원석 씨가 탈출 신호를 내릴 겁니다. 그때가 되면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은 부상자를 이송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그들을 호위하면서 일점 돌파를 강행할 겁니다. 물론 그 전에!"

    나는 주방세제가 들어있는 생수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방세제로 자신의 몸에 묻은 체취와 땀을 씻어내고 움직이는 걸 잊지마십시오.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라면 놈들 역시 빛과 소음만으로 우리를 분간하기 힘들 겁니다. 그럼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체취로 추적을 하려들텐데, 그걸 이 세제로 방지하는 겁니다. 낙오자가 생길지언정, 세제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선 안 됩니다."

    친환경이다 뭐다 해서 주방세제는 인체에 무해한 성분으로 만들어져서 나온다. 직접 마시거나, 눈에 퍼붓지 않는 한 적당히 피부에 좀 바른다고 해서 '당장' 문제될 건 없겠지.

    정 불안하다면 나중에 깨끗이 씻어내고 차도식 병원의 피부과 의사에게 검진을 받아보면 된다.

    모든 인원에게 세제가 돌아간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나는 정원석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는 비로소 조직의 행동대장다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1 별동대는 내 밑으로 붙고, 2 별동대는 천호 밑으로 붙어. 특이사항 있으면 각 조의 통신병 통해서 무전기로 보고해. 특이사항이 없어도 5분 단위로 현황 보고를 해라. 전투를 할 때는 사람이나 무기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현장의 정보가 중요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가르쳐줬었지? 다들 배운대로만 하자. 얼타는 새끼 있으면 돌아가서 연좌제로 다같이 뺑뺑이 돌린다."

    정원석의 특유의 카리스마로 이미 도구봉파 내부를 장악한듯, 조직원들의 눈빛에는 강렬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하기야 특전사 출신이 일반인들을 그렇게나 굴려댔는데 저정도의 독기가 생기지 않았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기 때문에 도구봉파가 차도식파의 최대 라이벌인 것이다.

    그때,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원석의 가슴팍에 달려있던 무전기로부터 초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전방에서 다수의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들었지? 다들 위치로!"

    장비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도구봉파답게 그들은 단거리 통신이 가능한 무전기도 몇 개인가 갖추고 있었는데, 차도식파도 조만간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야 항상 혼자 움직이는 편이고, 그 외에는 김명호가 아랫것들을 직접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무전기의 필요성을 못 느꼈었다. 물론 구하기 어렵다는 점도 한몫했다.

    '군대보단 미래그룹 산하의 경비업체를 통해서 무전기를 몇 개 구해봐야겠는데. 거기라면 인원에 비해 남는 장비가 제법 많을 테니까.'

    시시콜콜한 생각도 잠시, 초병의 보고대로 나이트워커가 바리게이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두꺼운 촉수같은 혓바닥을 창처럼 깊게 내질러서 유리창을 가볍게 깨부수고, 나무나 플라스틱 합판을 마구 때렸다. 공성추처럼 대단한 위력으로 바리게이트를 때려 부수는 건 아니었지만, 놈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리게이트 보강!"

    나의 외침에 엑소스켈레톤 착용자 두 명이 각각 큼지막한 가구를 들고와 문앞에 척척 쌓았다. 나는 그들 대신 소총을 들고 바리게이트 틈새로 적을 쏴갈겼다.

    트타타타타타!

    나를 포착한 몇몇 나이트워커가 촉수를 내뻗긴 했으나, 바리게이트에 허망하게 막혔다.

    하지만 좁은 틈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탄환은 정확히 놈들의 꼴통을 터뜨리고 검은 체액을 허공에 흩뿌렸다. 눈이 펑펑 쏟아져내리는 날씨에도 검은 체엑이 검은 연기로 기화하는 것을 포착했다.

    '주변 기온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검은 체액은 곧장 연기로 변하는군. 그렇다면 결국 공기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트리거인가?'

    지금쯤이라면 미래그룹 산하의 연구소도 내가 가져다준 나이트워커의 체액 샘플의 특이한 현상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는 연구환경을 조성했을 것이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똑똑한 사람들을 믿는다.

    그들이 선하느냐 악하느냐는 별개로 두고, 그들의 유능함이 곧 인류의 보배이자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살아서 지저 도시에 돌아갈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들고, 새로운 경험을 가진 채, 새로운 인간으로서.

    새로운 탄창을 갈아끼우려는 순간, 바리게이트를 단번에 뚫고 들어온 무식한 크기의 촉수에 나는 고개를 뒤로 뺐다. 조금만 더 반응이 늦었다면 코뼈가 부러질 뻔 했다.

    "현관 앞에 나이트워치!!"

    "여기 받으십쇼!"

    자재를 들고 나르던 한 조직원이 엑소스켈레톤 등짝에 메여 있던 샷건을 하나 뽑아서 던져주었다. 정말 놀랍게도 내 손에 들어온 것은 Kel-Tec KSG 샷건이었다.

    산탄총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로 유명한 국가가 대한민국인데, 그런 대한민국에서도 귀한 이 KSG 샷건을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지저 도시로 입주하기 전에 어느 겁대가리 없는 군 장교가 몰래 빼돌렸든, 아니면 지상에서 경찰특공대가 사용하던 것을 도구봉파가 운좋게 노획했든, 지금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야투경을 쓴 채 뻥 뚫린 구멍 너머로 바깥을 주시했다. 그러자 기괴하게 얼굴이 뒤틀린 나이트워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가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구멍 너머로 총구를 밀어넣어 방아쇠를 당겼다.

    투캉!

    묵직한 반동이 액션 래버를 쥐고 있는 손목과 불펍식 개머리판이 맞닿아 있는 어꺠를 타고 느껴졌다.

    철컥. 투캉!

    무의식적으로 액션 래버를 당기고 한 발 더 쐈다.

    12게이지 산탄이 바리게이트 구멍 너머로 터져나가면서 나이트워치의 머리통과 산반신을 확실하게 찢어발겼다. 거대 믹서기로 수박을 통째로 갈아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최초의 총성을 터뜨린 것이 기폭제가 되었을까. 곧 다른 위치에서도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쏴! 놈들이 건물 외벽에 들러붙지 못 하게 해!"

    "씨발! 여기 유리창 깨졌어!!"

    "씨발 내 눈! 7시 방향에 나이트워치 하나!!"

    "나이트워치부터 갈겨!"

    소총, 산탄총, 기관단총, 권총.

    저마다 통일되지 않은 무기를 사용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나름대로 열심히 대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나이트워치에 대한 공략법을 알려준 것이 컸는지, 나이트워치를 최초로 인식한 조직원은 즉시 적의 위치를 알리면서 화력 집중을 유도했다.

    타다다다다다다! 탕! 탕!

    쨍그랑! 우지끈! 콰앙!

    귀마개를 따로 착용해도 귀가 먹먹해질 만큼 폭음과 총성이 사방팔방에서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라고 해서 무작정 귀를 막기만 하면 안 된다. 어느 지점에서, 어떤 총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하니까.

    '위층의 소총 사용량이 압도적이야. 건물 외벽을 기어올라오는 놈들이 생각보다 많은 건가?'

    하기야 공략하기 딱 좋은 창문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건물 외벽을 공략하는 게 1층 현관을 공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워보이긴 한다. 놈들에게도 인간의 허를 찌를 만큼 약간의 지능이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고.

    "여기 바리게이트 보강 더 하고, 혹시 뚫릴 것 같으면 부상자들과 함께 중앙에서 농성해!"

    "맡겨만 주십쇼!"

    "현관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비록 다른 조직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둘을 뒤로 한채, 나는 한 손으로 샷건을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쨍그랑! 까강!

    교실 곳곳의 유리창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놈들이 침투했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딜 씹새끼가!"

    교실에서 복도로 막 뛰쳐나온 나이트워커를 남은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아서 지면에 메다꽂았다. 외골격 파츠 덕분에 한 손으로도 나이트워커를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투캉!

    내게 촉수를 내뻗지 못하게끔 놈의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고, 그대로 안면에 산탄을 박아주었다.

    잠깐이지만 대량의 검은 체액이 어린아이가 장난치다 엎지른 페인트통처럼 확 퍼져나가는 듯 했으나, 금세 검은 연기로 기화되었다.

    머리가 사라진 시체를 한 손으로 집어들어서 다음 타자로 나온 녀석에게 집어던졌다. 자신의 동료가 내던져졌음에도 개의치 않고 촉수를 내뻗은 건 칭찬할만 했으나, 안타깝게도 촉수는 시체를 뚫기만 했을 뿐, 내게 도달하지는 못 했다.

    외골격 파츠의 튼튼한 장갑이 내 얼굴을 노리고 날아든 촉수를 허공에서 정확히 잡아챈 것이다.

    "어서 오고."

    가볍게 끌어당기자 놈이 꿰뚫린 시체와 함께 내쪽으로 힘없이 끌려 왔다. 시체가 놈의 얼굴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샷건을 쏘는 대신 촉수를 아래로 끌어내려 강제로 무릎 꿇게 했다.

    시체와 함께 얽혀있는 놈의 뒤통수가 훤히 드러날 때, 아직 인간의 검은 체모가 남아있는 그 머리통을 군화발로 힘껏 짓밟았다.

    콰직!

    두개골이 한 방에 으스러지는 것도, 단단한 두개골이 으스러지면서 물컹하고 질척거리는 내용물이 쏟아져나오는 것도, 그 감각을 느꼈을 때 비로소 또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도.

    모두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아아아악!"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지 않은 조직원이 놈들에게 붙들린 채 복도로 튕겨나왔다.

    무력한 인간을 사로잡은 놈들은 기괴하게 뒤틀린 손으로 마구 할퀴거나, 때리고, 쥐어뜯었다. 촉수를 내뱉어서 숨통을 끊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일반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한달음에 달려간 내가 주먹으로 놈들의 머리통을 으깨고, 샷건으로 상반신을 날려버리면서 조직원을 구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날카로운 손톱이나 이빨에 의해 뜯겨나간 목덜미를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그는 과다출혈을 막을 수 없어 창백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다가, 곧 숨이 멎었다. 그대로 쇼크사 해버린 것이다.

    "......"

    나는 말없이 그의 뜬 눈을 감겨주었다.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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