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71화 (71/211)
  • 폭풍의 눈(1)

    "정신차려! 여기서 다 죽을 거야?!"

    정원석은 길거리 한복판에 널브러진 부하들을 일으켜 세우거나, 광증에서 막 벗어난 이들을 다그치면서 격려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다방면에서의 기습을 받은 탓에 정원석은 압도적인 광량으로 우선 주변을 밝힌다는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보통 손전등이나 헤드램프의 불빛을 집중시키는 건 나이트워커의 움직임이 사전에 감지되었을 때 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습격 도중에 부하들이 가진 손전등 불빛은 각기 다른 장소를 비추고 있었고, 도중에 불빛 속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부하들은 광증에 빠져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뻗어온 긴 팔이 부하들을 무력화시킬 때도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이 최소한의 방어만을 하며 뒤로 물러나고 있던 형국이었다. 모두가 반쯤 패닉에 빠져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때, 하늘에서 구세주와 같은 압도적인 빛줄기가 강림했다.

    그러자 자신들을 습격하던 존재들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놈들이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말고 눈대중으로 조준해서 쏴!!"

    정원석의 지시에 화력이 집중되었고, 아파트 외벽이나 길거리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놈들이 무수한 탄환 세례에 찢겨나갔다. 일반적인 나이트워커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내구도였다.

    "저 팔!"

    저 팔이!!

    정원석은 엑소스켈레톤의 출력을 순간적으로 높여 어둠 속에서 뻗어나온 기괴한 팔을 붙잡아 단숨에 바깥으로 끌어냈다.

    엑소스켈레톤의 자비없는 힘에 끌려나온 놈이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허우적대자, 쓸데없이 크기만한 머리통을 주먹으로 두들겨 터뜨렸다. 수박을 깨는 것보다 훨씬 더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타앙! 타앙!

    '우리가 쓰는 총기와는 총성이 다르다.'

    정원석은 비교적 먼 곳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총성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띄엄띄엄 끊어 쏘는 듯한 단발 사격이 아파트 외벽을 열심히 기어다니는 놈들을 노리고 있었다.

    특전사 출신인 그는 직감적으로 K14 저격총을 사용하는 저격수가 근방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들을 이 사지로 몰아넣은 군대 소속 저격수일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 같았다.

    '그쪽 소속이었다면 우릴 도울 이유가 없어.'

    무엇보다 조금 전에 하늘로 쏘아올린 신호탄은 지저 도시에서 나눠주는 물건이다. 물론 군대에서 지급해준 것이니까 당연히 저쪽 군인들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필 지금 사용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정원석은 다른 밀수조직의 행동대장급 인물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릴 도와줬으니 적대할 필요는 없겠지.'

    정원석도 신호탄 하나 때문에 끔찍한 피해를 낳았던 '그날'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 전에도 신호탄을 사용한다는 생각은 아예 배제해두고 있었다. 그것밖에 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야! 빨리 애들 챙겨! 굼벵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면 다 죽는다!!"

    "형님 말 들었지?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은 부상자부터 챙겨! 나머지는 주변 경계해!!"

    역시 자신이 훈련시킨 부하들답게 척하면 척이었다. 패닉에 빠져있을 때는 일반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었으나, 상황이 호전되자마자 자신감을 되찾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정원석이 노리고 있던 마지막 한 놈이 아파트로 숨어들기 직전, 어디선가 날아온 저격에 머리통이 터졌다. 그렇게나 빗나가던 탄환이 드디어 명중한 것이다.

    '이런 악천후 속에서 기어이 한 발을 명중시키는군. 저격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거지?'

    다른 조직의 행동대장급 중에서 그런 인물이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정원석은 문득 어떤 인물을 떠올렸다.

    지저 도시에서 자신보다 더 대단한 인물 취급받으며, 실제로 실적 하나만큼은 타 조직의 행동대장들을 압도하고 있는 한 남자.

    유일한 특전사 출신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일한 비전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이름은 박한성이었다.

    "...천호야."

    "예, 형님!"

    "야광봉으로 표시 만들어 놔라. 우린 삼각산중학교로 간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히 꼬리를 붙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꼬리보다 더 필요한 걸 붙이려고 그러는 거야. 잔말말고 표시 만들어놓기나 해."

    정원석의 의미모를 명령에도 천호라 불린 남자는 일단 야광봉을 꺼내 표시를 만들었다. 야광봉은 탄약만큼이나 밀수범들에게 중요한 물자중 하나였다.

    특히 차도식파가 공유한 정보 덕분에 야광봉으로 나이트워커들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부터, 다른 밀수조직들은 반드시 일정량의 야광봉을 확보해두고 조직원들을 지상으로 내보내게끔 노력했다.

    "부상자는 챙기고, 사망자는...신분증과 장비만 챙겨."

    의외로 부상자가 많고 사망자는 적었지만, 정원석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 했다.

    일반적으로 전장에서 사망자의 시신까지 수습하는 건 저 위대한 나라 미국이나 가능한 일이다. 밀수조직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행방불명, 사망자들의 시신을 따로 수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여유도 없거니와, 시신을 확보한다고 해서 지저도시에 묻어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땅 밑에 잠드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 잠들어야 한다.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기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고립되기 전에 도구봉파는 서둘러 움직였다.

    * * *

    나는 도구봉파가 남기고 간 야광봉 표시를 통해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갔는지 짐작했다.

    일부러 야광봉 표시를 남긴 걸 보니 자신들과 같은 밀수범이 근처에 있다는 걸 눈치챘던 모양이다.

    반쯤 눈에 파묻혀 있던 야광봉을 완전히 눈으로 덮어 빛을 지운다음, 그들이 나아갔을 방향으로 힘차게 움직였다. 이제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만큼 눈보라가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것도 고역이었다.

    '기상 상태가 완전히 뒤죽박죽이야.'

    까딱 잘못했다간 그대로 지상에서 고립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추위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나이트워커나 나이트워치는 지금쯤 신호탄에 반응해서 열심히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것이다.

    그 수가 얼마일지, 또 놈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생존자들을 찾아다닐지 예상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삼각산동에 있는 나와 도구봉파, 그리고 도구봉파를 통수쳤던 군대는 좆됐다는 거다.

    '모처럼 귀중한 정보를 얻었는데 여기서 허무하게 쓰러질 순 없지.'

    기억해라. 나는 가치있는 정보로 먹고 사는 놈이다. 2년 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 방향은...삼각산중학교 방향이군.'

    저 멀리, 야투경 렌즈 너머로 희미하게 네모네모 모던풍 학교가 눈에 보인다.

    양팔의 외골격파츠로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더미를 미친놈처럼 헤쳐나가며 어거지로 전진해서 간신히 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학교 디자인을 결정한 사람은 네모에 죽고 못사는 사람이었는지 온통 네모였다. 창문도 네모, 벽도 네모, 건물 구조도 네모, 심지어 학교 부지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조차 네모였다!

    '무슨 네모 선장도 아니고.'

    이 이상 네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까지 네모의 꿈을 꿀 것 같아서 얼른 학교 부지로 진입했다.

    딱히 적들의 매복 여부 같은 건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학교 1층 현관에서부터 손전등 불빛을 깜빡이고 있는 도구봉파를 발견했으니까.

    "역시 당신이었군요."

    덜덜 떨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온 내게 다가온 남자가 직접 눈을 털어주면서 말했다. 그는 첫 지상 작전에서 나와 우스꽝스러운 대립각을 잠깐 세웠던 특전사 출신 남자였다. 분명 이름이......

    "정원석, 당연히 제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겠죠?"

    "박한성, 그쪽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습니다."

    가볍게 통성명을 하며 악수를 한 우리는 현관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이놈의 학교는 특이하게도 지하에 급식실이 있었기 때문에 도구봉파 대부분은 최소한의 경계병만 건물 곳곳에 배치해둔 채 지하 급식실에 모여 있었다.

    도구봉파가 건물 수색을 먼저 진행했다고 하니, 학교 내부에 위험 요소가 남아있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고작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가 지금 폭풍에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사실도, 한바탕 전투를 치른 상태라서 지쳤다는 사실도, 다른 조직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전부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건 머지않아 삼각산동을 덮칠 나이트워커 무리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급식 테이블 앞에 앉아 생수로 가볍게 목을 축인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유가 어찌됐건 그 상황에서 신호탄을 쏜 건 나였으니까. 덕분에 우리 모두 고립된 상태에서 정체나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적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원석은 생각이 조금 달랐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신호탄을 쏘지 않았으면 우리가 위험했어요. 도우려고 그랬다는 의도도 이해하고, 실제로 도움도 됐으니 그 부분에 대해선 더이상 논하지 말죠."

    특전사 출신이라 그런지 꽤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이 왜 그 양아치들에게 속아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제는 차치한다고 해도 진짜 문제는 신호탄을 보고 몰려들 놈들인데...솔직히 얼마나 몰려들지 감도 안 잡힙니다."

    "눈보라 매우 심하게 몰아치고 있었고, 덕분에 소음이나 빛이 평상시보다 훨씬 더 묻혔을 테니 '그날'에 비하면 그리 많이 몰려들지는 않겠죠. 대신 우리도 대응할 수 있는 인원이 적지만."

    그래. 그날처럼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여과없이 자랑한 신호탄과 달리, 이번에 내가 터뜨린 신호탄은 악천후 속에서 터졌다.

    따라서 삼각산동으로 몰려들 놈들이 지난 번에 비해 적을 것이라는 정원석의 예측은 꽤 그럴싸했다.

    "왜 그쪽이 차도식파와 떨어져서 홀로 삼각산동 인근을 돌아다니고 있었는지는 캐묻지 않을 게요. 도와준 빚이 있으니까. 대신 여기서 살아나가고 싶다면 우릴 좀 도와줘야하는데...거절하진 않겠죠?"

    "그러려고 여기 온겁니다."

    서로 뒤가 구리다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 굳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어조였다.

    나 역시 도구봉파의 의도에 대해 캐묻지 않았듯, 도구봉파 역시 나의 의도를 캐묻지 않기로 암묵적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일단 방어 작전이나 구상해봅시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특전사 출신인 그와 비전사 출신인 내가 지하 급식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삼각산중학교에서 방위전을 펼칠 수 있을지 서로의 의견을 피력했다.

    "부상자들 중에서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은 1층에 배치합시다. 교실에서 책상이나 의자를 싹다 긁어모은 다음 주요 입구를 틀어막고, 1층 중앙에 진지를 구축해서 부상자들 위주로 배치하는 겁니다."

    "그럼 멀쩡한 사람들은 기동성을 살려서 2층 이상을 돌아다니며 각 구역 창문으로 침투하는 놈들을 조진다는 거네요. 합리적인 배치는 맞는데 막상 1층이 너무 허무하게 뚫려버리면 부상자들도 허무하게 뚫린다는 사실은 아시죠?"

    "그러니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뚫리지 않게 어그로 관리를 잘 해줘야 하는 겁니다. 특히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사람들은 일종의 소방관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어디가 위험하다 싶으면 급히 가서 틀어막아주고,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켜야겠다 싶으면 앞장서서 어그로를 끌어주면서."

    "좋아요. 별동대 하나는 제가 맡기로 하죠. 천호, 별동대 하나는 네가 지휘해라."

    "예, 형님!"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학교에 남아있는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적들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 논의하고 또 논의했다.

    논의중에 방침이 하나씩 정해질 때마다 도구봉파 조직원들이 움직이곤 했다.

    특히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조직원들은 대부분 교실을 뒤져서 책상과 의자를 죄다 끌어낸다음 주요 입구를 철저하게 막았다.

    "방어만이 아니라 탈출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당연하죠. 우리가 백날천날 여기에 있을 것도 아닌데."

    "탈출시에는 엑소스켈레톤 착용자들이 부상자 이송을 맡기로 하고, 나머지는 호위에 전념해야 합니다. 도구봉파는 장비와 인재에 워낙 투자를 많이 하는 만큼 그 부분은 딱히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이트워치와의 교전은 좀 모자란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제가 정보를 공유해드리겠습니다."

    "그 이상한 놈들에 대한 정식 명칭인가요?"

    "제가 지은 겁니다."

    "......"

    정원석은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도 나의 오지고 지리는 네이밍 센스를 인정한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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