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69화 (69/211)

화이트아웃(5)

아파트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공간이다.

고작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벌집통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좁아터진 아파트에 최소 수백에서 천 명 단위까지 때려박으니 삭막한 사회에서도 사람의 정이나 온기를 쉽게 느낄 수 있다. 벽 하나를 타고 울려퍼지는 층간 소음 덕분에 싫어도 타인의 삶에 대해서 잘 알게 되니까.

옆집에서 개가 짖고, 윗집서 애들이 뛰어다니고, 아랫집에선 부부가 허구한 날 싸워대니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시며 다양한 인간군상들에 대해 연구해볼 수 있다.

혹시 본인이 이 험난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톨이처럼 느껴진다면 주저없이 아파트에 입주하자. 어느새 정겹게 주변 이웃들과 담배 냄새, 층간 소음, 애새끼 예절 교육 등으로 신나는 대화를 나누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아파트의 계단을 무식하게 10층이나 걸어올라온 나는 야투경을 착용한 채 복도를 면밀히 살폈다.

사실 20층 이상 높이를 자랑하는 고층 아파트라고 해도 전력질주하면 옥상까지 도달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한층 한층 올라갈 때마다 복도를 살피느라 움직임이 다소 더뎠다.

주기적으로 복도 바깥 창문을 통해 적들의 위치도 파악해야 했고, 높이와 거리에 따른 저격 각도 계산 해봐야 했다.

사실 그런 것들은 다 차치하고서라도 매층 복도를 살피는 이유는 이 아파트에 남겨져 있는 '일관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파트처럼 이웃들간의 생활권이 극도로 가까울수록 정보 공유가 빠르고, 대다수가 먼저 움직이는 사람의 행동을 뒤따르기 마련이지.'

우리 아파트는 무적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신이다! 아파트 거주민 전원이 이런 멍청한 생각을 품었다면 모를까, 대다수는 흑야 사태 당일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움직였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즉시 마트나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식량과 생필품부터 확보했을 것이고, 그들보다 행동력이 앞서는 사람들이라면 곧장 군대나 경찰이 관리하는 피난처로 향했을 것이다.

군중심리라는 게 원래 저 사람도 하는데 내가 안 하면 큰일나지 않을까? 같은 불안감으로부터 생성되는 무의식적 행동이다. 그게 규모가 커지면 집단 무의식이 되는 것이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평소에 아파트 시세 걱정하던 X동 XXX호 부부가 미련없이 아파트를 버리고 도망쳤네? 어? 그럼 나도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원래 규모가 큰 집단일수록 누군가의 빠른 손절이 확인되는 순간 집단 이탈은 필연적이다. 아마 너도나도 앞다투어 짐을 싸들고 비싼 돈 주고 산 아파트를 버리고 나섰겠지.

그렇기 때문에 아파트 복도는 피난민들이 피난 도중에 흘린 잡동사니나 쓰레기가 넘쳐나야 정상이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은 덤이고.

"...이상한데."

10층 아래까지는 정확히 그런 양상을 보였다.

단체로 급하게 집을 버리고 떠난 탓에 문도 닫아두지 않고 같은 아파트 주민들끼리 엎치락뒤치락 하며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점거한 광란의 흔적.

그 흔적이 정확히 10층에서부터 끊어졌다.

복도의 모든 문은 자로 잰것처럼 닫혀 있었고, 누군가가 열어둔 바깥 창문을 통해 눈보라가 밀려들어왔다. 복도에 듬성듬성 쌓인 새하얀 눈더미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봉긋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혹시 몰라 발로 눈을 밀어내봤지만 쓰레기나 잡동사니가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깨끗했다.

그말인즉슨, 굳게 닫힌 문들은 바깥 창문을 통해 들어온 거센 바람때문에 저절로 닫힌 게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닫혀있었을 테니까.

'그 유명한 삼각산동의 아파트가 10층 이상 높이의 집이 팔리지 않았을리가 없지.'

다들 알다시피 수도권 아파트는 정말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어지간해선 주인이 들어와 살고 있다. 염병할 수도권 아파트는 역세권이든 비역세권이든 존나 인기가 많으니까.

파는 사람이 없어서 못 사고, 사는 사람은 너무 많아서 못 사는 게 서울의 아파트란 말이다.

끼이이이익. 철컹!

위층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음에 나는 고개를 처들었다.

끼이이이익. 철컹!

끼이이이익. 철컹!

끼이이이익. 철컹!

하나에서 둘, 넷, 여덟, 열여섯......

이보다 더한 층간 소음도 없겠다 싶을 만큼 사방팔방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바깥 창문을 타고 들어온 눈 한덩어리를 움켜쥔 나는 마스크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차가운 눈송이가 뜨거운 숨결로 덮여진 마스크 안쪽을 식히면서 입김이 사라졌다.

입술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이빨이 뽑혀나갈 것 같은 냉기가 느껴졌지만, 그런 통증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다.

'아파트에 뭔가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실제로 작전 중에 아파트를 수색하다 나이트워커 몇 마리를 찾아서 조진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은 대부분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나 문이 열려있는 집 안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스스로 문을 열고 닫을 만큼 문명인다운 행위를 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시다발적으로 문을 열고닫은 존재들이 사실은 이 아파트에 기적적으로 남아있는 생존자 집단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전기가 끊어진 탓에 인터폰을 사용할 수 없으니, 층간소음을 이용해서 이웃들끼리 비밀스러운 암호를 주고받는 아파트의 생존자 집단. 꽤 그럴싸한 추측이다.

"...인터폰?"

그래. 여긴 꽤 고급 아파트니까 현관의 문이 박살난 상태가 아니었다면 나도 쉽게 들어올 순 없었겠지. 당연히 집집마다 인터폰도 있을 것이고, 또 전자도어락으로 상시 문의 보안이 지켜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 왜 전자도어락의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

아파트 복도에서 바깥을 감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 위협을 감지하고 각자 집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면, 대체 왜 문이 열렸다가 닫힌 소리가 울려퍼진 것이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온 거야.'

찰팍. 찰팍. 찰팍. 찰팍.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정면에서, 매끄럽고 딱딱한 아파트 복도를 맨발로 걸어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간혹 뽀드득 뽀드득 하는 불협화음이 섞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계단에서 멀리 떨어진 나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이 휑하니 열려있는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바깥 창문이 열려있지 않아 눈이 들어온 흔적은 없었지만, 난방이 되지 않은 탓에 냉골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마치 도둑이 든것처럼 어지러운 가정집으로 숨어들었다.

방 2개, 화장실 1개, 거실과 연결된 부엌, 그리고 베란다. 이것이 바로 K-아파트의 정석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한 낯익은 구조였다.

아이 방으로 추측되는 곳은 복도와 연결되어 있어 창문이 복도쪽으로 뚫려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커튼과 방범창이 있었다.

커튼을 쳐서 창을 완전히 가린 다음, 침대의 이불까지 걷어 커튼 위를 덮었다.

책상의 의자는 조용히 빼서 현관문에 있는 신발장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신발장 문을 열어서 의자 등받이를 받치게끔 했다. 이러면 현관문이 갑작스럽게 안쪽으로 열린다고 하더라도 신발장 문 때문에 의자가 고정되어 잠시 버텨줄 것이다.

거실 뒤쪽, 베란다 측면에 위치한 안방(추측)에는 커다란 침대와 옷장, 데스크탑이 놓여있는 책상과 화장대가 있었다. 벽 한쪽은 커다란 벽장 문이 반쯤 열린 채였다.

집주인이 피난 가기 전에 옷장을 마구 뒤졌는지, 미처 챙기지 않은 옷가지나 화장품 등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밖에도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있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벽장 안쪽에 떡하니 박혀있는 낚시가방이었다. 가방을 열어보니 꽤 큰 돈 들였을 것 같은 고급 낚싯대와 장비가 나왔다. 당연히 여분의 낚싯줄도 있었다.

'가정집이라면 공구함 하나 정도는 있겠지.'

안방에 없다면 보통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위치에 있을 터. 부엌의 구석진 선반이나 거실의 커다란 TV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는 서랍장을 망설임없이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배터리를 넣어 사용하는 전동 드릴과 못이 있었다. 남자들, 특히 한 집의 가장들은 딱히 쓸 일이 없어도 일단 공구함을 사두는 버릇이 있다.

가끔 아내가 뭐좀 손보라고 하면 자신이 맥가이버에 빙의한 양 '공구창!'을 외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철컥철컥. 쾅!

절대로 들려선 안 될 소음에 나는 전신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움직임을 멈췄다.

꽤 멀다.

하지만 워낙 조용한 아파트라 복도의 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여기까지 들리는 거다.

'손잡이를 때려 부쉈어.'

그야 다른 집의 전자도어락 패스워드 같은 건 모를 테니까. 열리지 않는다면 잠금장치를 통째로 박살내는 게 정답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선 안 되는 놈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거다.

'얼마나 남았지?'

철컥철컥. 쾅!

조금 멀다. 반대편 복도에서부터 닫힌 문을 하나씩 열고 내부를 확인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동 드릴을 사용한다면 나 여기있소 하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아니, 상관없다.'

공구함에서 망치와 못까지 꺼내든 나는 현관 앞에 위치한 벽과 기둥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기이이이잉!

저 바깥에서 뭔가가 반응하고 열심히 달려온다고 한들, 나는 한결같은 움직임으로 벽과 기둥에 구멍을 뚫고 못을 반 정도 때려박았다. 그리고 낚싯줄을 풀어 못과 못 사이를 연결했다.

한가닥만 연결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닥을, 대각선이든 직선이든 가리지 않고 마구 엮었다. 야투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봐도 현관 앞에 매우 가는 거미줄이 쳐진 것처럼 보인다.

와이어에 비하면 아무래도 기대치가 조금 떨어지지만, 여러 가닥의 낚싯줄을 거미줄처럼 쳐둔 것은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문을 뚫고 들어온다면 반드시 의자와 신발장에 1차로 막히고, 괴력으로 뚫고 들어온다면 낚싯줄 트랩에 걸린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소파는 현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거실 소파 등받이에 K14 저격총을 거치했다. 못해도 세 방, 잘만 하면 탄창 하나를 통째로 퍼부어줄 수도 있다.

대신 소음기로 총성을 가린다고 해도 내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확정적인 만큼 바로 이곳에서 벗어나야겠지. 그것도 생각해둔 것이 있다.

'문을 열고 닫을 줄 아는 놈들이잖아. 얼른 들어와.'

나이트워커라고 해도 상관없다. 사람이면 다행이고.

내가 드릴로 벽과 기둥에 구멍을 뚫고 밑작업을 하느라 소음을 꽤 냈으니 지금쯤 현관문 앞에 놈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좁은 문을 힘들게 뚫고 몇 놈이나 들어올 수 있을까? 또 몇 놈이나 내 탄환을 뚫고 들어올 수 있을까?

똑똑똑.

"......"

그건 금속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단단하고, 매끄럽고, 조금만 세게 두들겨도 쉽게 깨져버릴 것 같은.

등 뒤의 베란다 창문을 신사적으로 노크하는 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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