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68화 (68/211)
  • 화이트아웃(4)

    어둠 속에 숨어서 군인들과 도구봉파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있던 나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주변 지형을 살폈다.

    모든 입구가 장갑차로 막혀있다는 것과 경계중인 군인들의 수가 제법 된다는 점을 토대로 이곳에 자리잡은 군대의 규모가 얼추 2개 중대에서 1개 대대 안팎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민간인 생존자들에게 잡다한 노동을 시키고 군인들은 외부 작전이나 주변 경계에만 집중하는 것 같군. 노원역과는 정반대야.'

    노원역에선 군인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무장한 민간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소수의 군인들이 그들을 돕는 형태였다.

    하지만 이곳은 군대의 규모부터가 남다른 것 같으니, 민간인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군대의 수발을 들어주는 노동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도덕이나 윤리, 법따위보다 더 가까운 건 총이니까.

    '도구봉파 조직원 9할 정도가 아파트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처럼 이곳을 지상의 전초기지로 삼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앞뒤가 조금 맞지 않았다.

    도구봉파는 대형 버스를 끌고 다니는데 아직 물자를 확보하지도 않았으면서 전초기지부터 들린다는 건 이상하다. 우선 전부 가지고 갈 수 없을 만큼 많은 물자를 확보해서 저곳에 들리거나, 정보를 거래하기 위해 소수의 인원만 들어갔다 나오는 게 합리적이다.

    휴식을 취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단체로 휴식을 취한단 말인가?

    '정보 거래도 아니고, 휴식이 목적도 아니라면 저만한 인원이 우르르 들어간 이유가 뭐지? 군을 상대로 무력시위라도 하려고?'

    확실히 다수가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했고, 또 전원 무장했기 때문에 정규군에 비해서도 꿇리지 않는 전력을 자랑한다. 저쪽은 장갑차에 기관총까지 있기 때문에 화력적으로 좀 더 우세하긴 하지만.

    그렇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역시 지상의 군대와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한 어필이다.

    WA! 도구봉파 아십니까? 진.짜.겁.나.대.단.합.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지.'

    내가 저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었다고 해도 저만한 무장 조직이 용병노릇 해주겠다면 약간의 보상과 정보를 대가로 이래저래 부려먹었을 거다.

    "일단 저만한 규모의 군대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도구봉파가 저들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

    슬슬 빠져서 미아사거리역으로 움직일까 생각하던 찰나, 다시 우르르 몰려나온 도구봉파 조직원들이 발빠르게 버스에 탑승하더니 곧장 움직였다. 방향은 남쪽이었다.

    거기까지만 봤다면 도구봉파가 드디어 자기 일 하러 갔구나 하고 나도 철수했겠지만, 도구봉파를 태운 버스가 사라지자마자 아파트단지 내부의 움직임이 갑자기 활발해지는 것을 포착했다.

    '뭐지? 여기서 갑자기 군대가 움직인다고?'

    아파트단지 안쪽 주차장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갑차가 서넛 튀어나오더니, 그 뒤를 따라 중무장한 군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영락없는 출정식이라서 직감적으로 저들이 단순한 물자 탐색에 나서는 게 아님을 눈치챘다.

    뭔가 있다고 판단한 나는 비교적 느릿느릿 움직이는 약 1개 중대 규모의 군인들을 뒤따랐다.

    그리고 다소 당혹스러운 상황과 마주했다.

    '송천동을 거쳐서 미아사거리역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삼각산동으로 간다고?'

    강북구에서 가장 아파트가 많기로 유명한, 사실상 아파트전용 구역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삼각산동. 그곳에 쌓여있을 물자에 대해선 나도 짐작이 되지만, 도구봉파와 군인들이 움직이는 타이밍이 너무 기묘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삼각산동에 도착하니, 교회 앞에 쭉 늘어선 도구봉파의 버스가 보였다.

    삼각산동은 본래 산을 깎아내 만든 주거구역이기 때문에 이렇게 눈이 심하게 내리는 날은 차량 운행이 매우 힘든 장소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도구봉파가 버스에서 내려 도보로 움직인 것이리라.

    문제는 왜 군인들이 도구봉파의 뒤를 몰래 밟은데다, 그들의 버스 주변에서 전투 준비를 하기 시작했냐는 것이다.

    '버스 주변 길목에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기관총까지 거치했다. 도구봉파와 합동 작전을 하려고 뒤따른 것이라면 저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어.'

    장갑차는 사각지대로 이동해서 길목에 기관총과 무반동총을 조준하고 헤드라이트를 껐다. 군인들 역시 대로가 훤히 보이는 주변 건물로 숨어들어가서 조용히 매복했다.

    그 시끄럽던 광원과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버스 주변에 남은 것은 귀가 윙윙 울릴 정도로 휘몰아치는 폭풍 뿐이었다.

    거센 눈발이 순식간에 주변을 뒤덮으면서 자연스럽게 장갑차와 군인들이 움직인 흔적을 지워버렸다. 만약 도구봉파가 뭣모르고 버스로 복귀한다면 무조건 매복에 당하는 구도가 완성되었다.

    '엑소스켈레톤으로 무장했다고 해도 장갑차와 1개 중대의 화력을 견뎌낼 방법은 없지. 게다가 예상치 못한 매복이라 무조건 대비없이 기습을 받게될 테니 전멸은 확정이고.'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라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도구봉파는 두목인 도구봉의 전폭적인 투자와 지원덕분에 빠방한 장비 상태를 자랑한다. 차도식파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저 무장 수준은 지상의 군대 입장에서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나같아도 죽이고 빼앗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밀수조직은 나이트워커와 싸우는 방법은 알지만 인간과 싸우는 방법은 몰라.'

    하지만 군대는 처음부터 인간을 적으로 상정해두고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집단이다. 일단 실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느쪽이 더 전투력에서 우위에 설지 따질 필요도 없다.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차도식파의 강력한 경쟁 대상인 도구봉파의 주요 전력이 지상에서 전멸해버리면 간접적으로 큰 이득을 얻는 것은 맞다. 한순간에 무너진 도구봉파를 차도식파가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저 도시의 사람이 다수 죽어나간다는 점, 그들이 가진 장비와 물자, 어쩌면 정보까지 지상의 군대에게 탈취당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지저 도시에서 독보적인 이권 확보를 위해 저들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밀수조직간의 세력 안정화 및 지상 작전의 향후 안전을 위해 저들을 도울 것인가. 나는 눈밭에 엎드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지상 작전을 나갈 때마다 곧잘 마주쳐서 수다를 떨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딱 그정도의 관계인 사람들이 순식간에 전멸 당한다고 해서 슬퍼질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은 원래 죽는 법이고, 이 세상은 당하는 게 병신이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은 내 계획과 맞지 않아.'

    내 최우선 목표는 어디까지나 지저 도시의 안정화다. 그 과정에서 권력과 이권을 독차지하려는 것 뿐이지.

    지금 도구봉파를 전멸당하게 내버려뒀다간 나중에 다른 의미로, 다른 세력에 의해서 예상치 못하게 발목이 잡힐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옷 곳곳에 눈을 마구 뭉친 다음 슬금슬금 움직였다. 눈발이 거센 탓에 지금의 나는 면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설원에서 움직이는 흰 거북이처럼 보일 것이다.

    교회 근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6층 상가 건물의 옥상으로 군인 2명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조용히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행히 인원이 뿔뿔이 흩어진 탓에 별도의 보초는 세워두지 않았는지, 계단을 올라가는내내 적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혹여나 침입자에 대비해 와이어나 대인지뢰를 설치해둔 것 아닐까 싶어서 계단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흔적은 없었다.

    저들도 설마 자신들이 도구봉파를 미행했는데, 또다른 사람에게 미행을 당할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겠지.

    마침내 옥상 문앞에 도착한 나는 금속음이 들리지 않도록 살짝 문 손잡이를 비틀었다. 이런 상가 건물의 특성상 손잡이가 녹슬었다면 조금만 비틀어 당겨도 끼기기긱 하고 불쾌한 소음이 새어나온다.

    끼이이......

    예상대로 소음이 조금 새어나왔지만, 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어서 옥상에 있을 2명이 눈치채지는 못할 정도였다.

    이윽고 손목을 조금씩 돌려가며 가까스로 문을 연 나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건물 옥상으로 나왔다. 대충 10m쯤 떨어진 곳에서 옥상 난간에 기대어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2인 1조로 움직이는데다 굳이 옥상에 자리를 잡은 걸 보면 사수(저격병)와 부사수(관측병)로 구성된 저격조인 것 같았다.

    대한민국 육군은 2014년부터 일반적인 전방 부대에도 K14 저격총을 보급하면서 보병대대 저격반을 신설했는데, 저들이 보병대대 소속 군인이라면 충분히 그럴듯 했다.

    일단 동계 위장 군복까지 걸친 것을 보면 나름대로 훈련을 받은 놈들인 듯 했는데, 그런 놈들이 배후의 기습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우스웠다.

    시가전의 기본은 매복과 기습이라는 건 알지만, 정작 그런 전술을 자신들만 사용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길래 이런 똥배짱을 부리는 건지.

    이족보행을 하면 눈을 뽀득뽀득 밟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둘의 배후를 잡았다.

    "저것들 몇 명이나 살아돌아오겠습니까?"

    "글쎼. 몇 명이든 버스 타기 전에 다 조지고 장기 수거하면 그만이지. 빨리 일 끝내고 돌아가서 라면이나 끓여먹고 싶다."

    "크, 이런 날에 먹는 라면이 최고 아닙니까?"

    더 들어볼 것도 없었다.

    우직!

    야간투시경으로 전방을 관측하고 있던 관측병의 뒷목을 발로 세게 짓밟아서 단숨에 경추를 부러뜨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당황하는 저격병의 안면을 외골격파츠 주먹으로 내려찍었다.

    쾅!

    주먹 한 방에 안면이 뭉개진 저격병은 끅끅대더니 곧 숨을 거뒀다. 일격에 콘크리트 벽도 박살내는 주먹에 맞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여간 군인이라는 새끼들이 애국심이 없어요, 애국심이."

    둘의 시체를 조용히 치워낸 나는 그들중 유독 덩치가 큰 남자쪽의 동계 위장복을 벗겨 덧입었다.

    그 둘은 각각 하설준 중사와 최연진 병장이었다. 예상했던대로 전방 대대 소속 저격조였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K14 저격총과 탄약, 무전기까지 회수한 나는 옥상 문앞에 시체 둘을 비스듬하게 포개어놓았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류탄과 군화끈을 옥상문 손잡이에 연결해서 안쪽에 잘 박아두었다.

    안전핀은 미리 뽑아두고, 안전손잡이를 끈으로 묶어서 연결해두었다가 문이 열리면 조임이 느슨해지면서 수류탄이 발화할 것이다. 그럼 누군가가 다시 옥상문을 열고 나올때 수류탄이 터지는 훌륭한 부비트랩이 된다.

    북한군에게 추적당하는 상황일 때 써먹으면 좋다고 배웠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왜 이런 걸 배웠지?'

    특전사나 북파공작원도 아니고 그냥 엑소스켈레톤 착용하고 돌아다니기만 하는 수색대원들이 굳이?

    잡다한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낸 나는 부비트랩이 완성된 옥상문을 닫고 나왔다. 조만간 정기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 이들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 누군가가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K14 저격총은 조준경에 탄창까지 착용하면 가볍게 7kg을 넘어가기 때문에 부피나 무게나 일반인이 그냥 들고다니는 건 조금 빡센 감이 있다.

    다만 나는 외골격파츠를 양팔에 장착해둔 상태라 한손으로 들고 샷건처럼 쏴재껴도 문제없다.

    7.62mm 5발들이 탄창이 3개에 장전된 것까지 포함하면 총 20발.

    저격총을 써본적이 없어서 영점을 잡으려면 애좀 먹을 테니 최소한 5발 이상은 그냥 허공에 날려야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저격총을 얻은 것 만으로도 이득이지.'

    다행히 소음기도 잘 갖춰져 있어서 중장거리 저격을 한다면 적에게 위치가 발각되지 않고도 꽤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 같다.

    저들이 돌아오는 길의 도구봉파를 덮치기 위해 잘 보이는 장소에서 매복한다면, 나는 저들을 등 뒤에서 덮치기 위해 훨씬 더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기로 했다.

    바로 삼각산동의 고지대에 위치한 아파트다.

    운이 좋으면 안에서 도구봉파와 만나 경고해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직접 저격을 해서 적들의 매복을 방해해도 상관없다.

    적들이 매복한 지점에서 빙 돌아 삼각산동으로 진입한 나는, 생존자들의 생활 흔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다.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파트치곤 너무나도 조용했으며,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이 아파트도 텅 비었겠구만."

    혹한기에 대비하지 않은 민간인이 난방도 안 되는 아파트에서 버틸 수 있을리가 없으니 죄다 물자를 챙겨서 지하철역이나 대피소로 피난을 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수색해왔던 모든 아파트가 그래왔고, 이곳 역시 마찬가지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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