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66화 (66/211)
  • 화이트아웃(2)

    대한민국 군필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두 가지 있다고 말하면 보통 다들 황천의 뒤틀린 조순튀와 냄새만 맡아도 돌아버릴 것 같은 해빔소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경기도와 강원도 위쪽, 최전방에서 근무해본 사람들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번 사람이 부족해서 쉬지 않고 나가야 하는 야간 경계 근무, 그리고 겨울마다 잊지 않고 하늘에서 주륵주륵 쏟아지는 흰 똥덩어리를 더 싫어한다.

    그래. 지금 하늘에서 탄환세례처럼 쏟아져내리고 있는 저 흰 똥무더기는 다른 의미로 우리의 PTSD를 자극하는 무언가였다.

    "오늘 지상 작전은 포기할까?"

    "이거 인증샷 찍어가면 우리 보스도 한 번쯤은 봐주지 않을까?"

    "격벽 앞에 눈 쌓인거 봐라 시발. 제설 작업 안 하냐고!!!!"

    "빠, 빨리...빨리 내게 초록색 제설삽을 가져다 줘! 당장 이 눈을 치워버리지 않으면 난, 난...버틸 수가 없어!"

    "그냥 나다 싶으면 뛰쳐나와 새끼들아! 눈을 치워야 내려가든 말든 할 거 아냐!!"

    다들 형용할 수 없는 공포에 기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격벽 앞에 한가득 쌓인 눈은 엑소스켈레톤 탑승자들이 어거지로 치워냈다.

    차도식파 역시 신형 엑소스켈레톤의 높은 출력을 앞세워 길을 정리했다. 엑소스켈레톤이 없는 사람은 무인 화물 수송 차량에 태워서 움직였다. 아직 물자를 확보하지 않은 지금, 저만한 이동 수단도 없었으니까.

    "어우씨, 우리가 지하에 있던 3일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발이 푹푹 빠지는 걸 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눈이 대충 10cm는 쌓인 듯 했다. 벌렁 드러누워서 사지를 버둥대면 꽤 멋진 천사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밀수조직들이 격벽을 완전히 떠나기 전, 격벽 관리자인 대위가 확성기로 크게 말했다.

    "오늘은 기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으므로 시간내에 복귀가 어려우신 분들은 무리하게 복귀하지 마시고 외부에서 임시 거점을 만들어 하루 정도 머무르다 오셔도 됩니다! 예외적으로 내일 한 번 더 같은 시각에 격벽을 열겠습니다!"

    눈이 이만큼 쌓인 마당에도 꿋꿋하게 물자를 찾으러 나서는 밀수조직들을 위해, 격벽 관리자 역시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했다.

    하기야 다들 무리하게 복귀하려다 도중에 얼어죽느니, 차라리 하루 정도 안전한 장소에서 머무르다 복귀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노원역이라는 전초기지가 있는 우리에겐 더 좋은 조건이기도 했다.

    '문제는 눈발 때문에 시계가 한층 더 나빠졌다는 건데...이건 어쩔 도리가 없네."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것보다야 좀 낫지만, 폭설의 진짜 치명적인 점은 방향 감각을 상실케 한다는 점이다.

    빗물이야 그냥 흘러내릴 뿐이지만, 눈은 누가 치워주지 않으면 계속 쌓이기만 한다. 그렇게 사방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이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몰라서 이리저리 헤매는 거다.

    거기에 발은 진창을 걷고 있는 것처럼 푹푹 빠져서 체력을 더 갉아먹지, 지속적인 추위 때문에 체온을 보존하려고 몸은 끝없이 열량을 가져다 쓰지. 모든 것이 얼어붙는 온도에서 땀을 뻘뻘 흘리게 될 테니 갈증을 해결하는 것도 꼼꼼하게 신경써야 한다.

    "빨리빨리 움직여! 꾸물대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 얻는다!"

    "공구리파! 공구리파는 계속 무전기로 각자 위치랑 인원 수 보고해!"

    "라이트 전부 다 켜!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여러 조직의 행동대장들이 휘몰아치는 바람과 눈발 속에서 악을 써댔다. 저러고도 목소리가 묻히는 탓에 오히려 나이트워커에게 소음으로 발각당할 일은 적어보였다.

    나는 쌍문역 근처에서 김명호와 헤어지기로 했다.

    김명호에게는 조직원들을 이끌고 노원역에 방문해서 그곳의 생존자 그룹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식으로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잘 설명해두라고 일렀다.

    노원역도 지금쯤이면 갑작스러운 폭설과 한파탓에 적은 인원으로 버티기만 하고 있을 터. 차도식파가 그들을 대신해 주변 물자를 습득하고 도움을 준다면 고마운 손님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저쪽에서 우릴 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땐 어떡합니까?!"

    "다수가 엑소스켈레톤에 개인화기로 무장한 우릴 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거절한다면 무력을 사용해서 협박하세요! 마음만 먹으면 노원역의 모든 인원을 갈아버리고 우리가 역을 통째로 꿀꺽할 수도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예정대로 노원역을 임시 거점으로 삼은 뒤에 중계역 인근까지 남하하여 물자를 회수하겠습니다!"

    "장비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다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 혹시 교전을 하게 된다면 제가 알려준대로 움직이면 될 거에요!"

    나이트워커, 나이트워치와 맞딱뜨렸을 때의 기본적인 교전 수칙은 정찰조가 우선적으로 놈들의 위치와 머릿수를 보고한 뒤, 타격조가 나서서 화력을 빠르게 쏟아붓는다는 형식이었다.

    대처가 불가능할 만큼 놈들의 숫자가 많거나,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을 경우엔 어느정도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후퇴를 우선시하도록 정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같은 인간들끼리 교전이 벌어질 경우, 후환이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없애두라고 말했다.

    먼저 뒤통수를 친 인간은 이유를 불문하고 처리해두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건투를 빈 나와 차도식파는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찢어졌다.

    차도식파는 쌍문역 선로를 통해 창동역까지 간 다음 지상에서 도보로 이동해 노원역 생존자 그룹과 만나기로 했다. 노원역은 선로에 지하철을 박아서 선로를 통째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지상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서남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한 밀수조직들의 뒤를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몰래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건 내 취향도 아니고 특기 분야도 아니지만, 차도식파가 무시무시하게 성장하고 있는 지금일수록 더더욱 다른 조직들의 속내를 알아내야 했다.

    차도식파가 상도덕을 잘 지키면서 상부상조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차도식파를 싫어하는 놈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사람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다.

    그냥 보기만 해도 싫고, 옆에 있어도 싫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싫은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거다.

    다행히 눈이 미친듯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이라면 소음도, 행적도 모두 어둠 속에 감춰지기 때문에 다른 조직을 미행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불을 끄고, 저들의 불빛을 쫓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곧 수유역 인근에 도착한 밀수조직들은 각자의 계획이 있는지 잘게 쪼개지기 시작했다.

    눈 위에 엎드려서 저들의 행동을 살펴보니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 것을 알 수 있었다.

    1번 유형은 아직 수색이 끝나지 않은 인근 건물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소규모로 움직이는 하이에나 무리였다. 저들은 조직을 위해 움직인다기보단,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먼저 챙기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적게는 2인 1조, 많아봤자 4~5인 1조로 움직이면서 작은 상가나 아파트, 주택을 털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수의 정찰조를 조금 더 먼 곳으로 보내서 대량의 물자를 찾아내게 하고, 나머지는 정찰조가 정보를 물고 돌아오기 전까지 주변에서 소소하게 각자의 몫을 챙기는 듯 했다. 저런 하이에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조직의 단합력이 떨어지고 내부 분란은 더욱 커질 뿐이다.

    '차도식파는 기본적으로 항상 같이 움직이는 편이라 위험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다른 조직은 위험 부담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건가?'

    소규모로 뿔뿔이 흩어질수록 기습에 취약하고 기껏 조직원들이 모아온 정보를 취합하는 것도 힘들 텐데. 아니, 애초에 전술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냥 전부 비효율적......

    '...민간인들한테 왜 그런 걸 바라는 거지?'

    우습게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역시 민간인이다.

    내가 저들의 지휘관인 것도 아니고, 하물며 위대한 신적 존재처럼 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인 것도 아닌데 저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대해 논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조직의 장들이 풀어주기가 무섭게 뿔뿔이 흩어진 하이에나들과 달리,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두더지들은 곧장 수유역으로 들어갔다. 중간역 하나 없는 긴 선로를 따라 미아역까지 쭉 내려갈 심산인 게 훤히 보였다.

    '미아역과 미아사거리역 모두 주변에 번화가가 있지. 두 역의 인근에 쌓여있는 물자들의 양은 하루이틀 걸려서 털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기적인 하이에나들과는 같이 하기 힘든 작업이기도 하지.'

    눈밭을 엉금엉금 기어서 수유역까지 좀 더 접근해보니, 곧 미어캣처럼 망을 보고 있던 후발주자도 역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조직의 움직임이 행여나 타인에게 발각될까봐 우려하는 눈치였다.

    '하이에나와 두더지의 움직임까지 확인했고...남은 건 저것들인데.'

    이렇게나 눈발이 휘몰아치는데도 불구하고 수유역에 숨어들지 않은 어느 밀수조직은 수유시외 버스터미널에 들어갔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 조직은 내가 잘 아는 조직중 하나였다.

    '도구봉파.'

    차도식과 서로 도 사장, 차 사장 하고 친근하게 불러대는 사람이 이끄는 상위권 밀수조직.

    그들은 처음부터 지하철 선로를 따라 오랜 시간 걸을 생각이 없었는지, 버스 몇 대를 끌고 나섰다.

    차도식파도 모르는 사이에 터미널을 점거하고, 그곳에 남겨져 있던 버스를 정비해서 자신들 것으로 삼은 것이다. 나는 자신의 멍청함에 이마를 탁 쳤다.

    "버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서울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버스. 특히 국산 버스는 튼튼한데다 냉난방 기능, 우수한 적재량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격벽 앞까지 버스를 끌고오는 일이 없어서 어떻게 그 많은 물자를 가져오는 건지 궁금했었는데, 우리가 노원역을 전초기지로 삼은 것처럼 저들 또한 터미널을 전초기지로 삼은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터미널에는 망을 보는 초병들이 남겨져 있고.'

    자신들의 귀중한 물자와 버스가 털릴까봐 무려 10명이나 남겨두고 갔다.

    '수유역 근처에는 충전소와 정유소가 모두 있으니 차량을 굴리는 건 식은 죽 먹기일테고, 도구봉파는 인재들을 박박 긁어모으는 조직으로 유명하니 차량을 정비할 줄 아는 사람도 몇 명인가 있겠지. 따지고보면 그쪽도 수완이 나쁘진 않다니까.'

    대형 차량을 이끌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도구봉파를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사자라고 명명한 나는 조용히 건물 사이의 어둠속으로 숨어들었다.

    곧장 남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더지들과 달리 도구봉파가 끌고나간 버스는 서쪽으로 먼저 움직였기 때문에 직감적으로 어디가 목표인지 알 수 있었다.

    수유 1동 주민센터와 삼양동 주민센터를 거쳐서 내려가면 곧장 도착하는 롯데마트. 거기가 아니라면 굳이 차량의 방향을 서쪽으로 돌릴 이유가 없었다.

    '주택가와 상점가 사이를 돌파해서 대각선으로 내려가면 저들보다 좀 더 빨리, 혹은 비슷한 타이밍에 도착할 수 있다.'

    이참에 그 유명한 도구봉파가 일을 어떻게 하는지, 또 그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봐야겠다.

    저쪽은 아직 다 치우지 못한 도로의 차량도 엑소스켈레톤으로 직접 치우고, 눈이 가득 쌓여있어서 안전운전을 하느라 거북이처럼 움직일 거다.

    그렇게 믿고 나는 주택가와 상점가 사이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점프해도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은 벽이 있다면 외골격 파츠로 찍고 올라서 타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건물을 뛰어넘고, 돌파해서 약 30분쯤 전력질주를 했을까.

    도로 하나만 건너면 곧장 롯데마트로 이어지는 한 아파트단지에 들어섰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아파트단지와는 조금 많이 달랐다.

    '장갑차에...군용 지프. 군인들까지 있다.'

    사면으로 길이 나있는 아파트단지의 주요 입구마다 드럼통이나 잡다한 차량을 모아 쌓아두고, 그 뒤에 장갑차가 한대씩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었다.

    그곳에는 방한복을 잔뜩 껴입은 군인들이 손전등과 소총을 들고 돌아다니며 보초를 서는 것은 물론, 아파트단지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음이나 광량도 제법 컸다.

    나는 첫 작전에서 만났던 방학역의 군인들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지상에 남겨둔 것은 비단 일반인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한민국 치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군대와 경찰을 내버려두고 지저 도시에 입주했다.

    '노원역의 그 중대장처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독자적으로 부대를 움직이는 놈들이 있겠지.'

    노원역과의 차이점은 역시 군의 규모였다.

    장갑차를 배치한 것도 그렇고, 다수의 군인들이 아파트단지를 사수하는 것도 그렇고, 거점 방위에 대해 뭘좀 아는 양반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게 분명했다.

    내가 이곳을 우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어느샌가 나타난 도구봉파의 버스가 나란히 아파트단지 입구 앞에 정차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입구가 열리며 안쪽에서도 군인들이 나왔다.

    '도구봉파의 에이스. 특전사 출신이었다고 했지.'

    버스에서 가장 먼저 내린 낯익은 얼굴의 특전사 출신 사내가 안쪽에서 나온 군인들과 악수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서로 꽤 긴밀한 사이인듯,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웃고 떠들며 신변잡기를 했다.

    나는 도구봉파가 지상의 군 부대와 모종의 커넥션이 있음을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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