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64화 (64/211)
  • 지하에서(8)

    "괜찮으십니까?"

    "어우 씨발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내 어깨를 잡는 거친 손길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야삽을 들고 내려칠 듯한 자세로 뒤를 돌아보자, 밝은 불빛이 내게 쇄도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그보다 주변이 이렇게 밝았던가?

    "진정하십시오. 이미 상황 종료됐습니다. 전력은 정상적으로 복구되었고, 피해 현황을 확인중입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당신이 이 건물로 들어가셨다는 얘기를 들어서 확인하러 온겁니다."

    "그, 그래요?"

    "예. 듣자하니 사람들을 모아서 가까운 건물로 피신시키는 일을 하고 계셨다던데, 매우 용감하고 올바른 행동이었습니다. 다만 무장도 하지 않은 일반인은 함부로 나서기보다 적절한 장소에서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숨어지내는 게 맞습니다. 옳은 행동을 하셨다는 건 알겠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 그게...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럼 이제 신분 확인 절차를 밟은 후에 자택 귀가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고 있는 중장갑보병들이 내게 직급 카드 제출을 요구했다.

    일시적으로 지저 도시의 모든 불빛이 사라졌던 만큼, 염치없는 인간들이 사소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한 절차였다.

    내가 직급 카드를 제시하자 그들은 직급 카드 인식기로 위조 여부를 확인한 뒤, 나를 건물 바깥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을 나가기 직전,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새하얀 벽을 돌아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말끔한 모던풍 인테리어의 새하얀 벽에는 누군가가 붓으로 먹물을 찍어 바른 것처럼 검은 점이 여럿 찍혀 있었다. 복도에 쭉 이어져있던 검은 체액은 말끔하게 사라진 뒤였다.

    ⠈⠕⠹⠚⠗

    "...요즘 제대로 쉬질 못 해서 기가 허해졌나?"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불러도 벽만 보고 계셨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걸 보신데다 어둠 속에서 홀로 계셨으니...그 일시적으로 패닉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푹 쉬고 맛있는 걸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좋지 않은 거라면...아."

    군인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밖으로 나온 나는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바이오해저드 마크가 찍힌 바디백에 무언가를 담아서 이송하는 광경을 보았다.

    "...피해 현황이 정확하게 집계된 것은 아니지만 사상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오늘부터 저희 중장갑보병이 모든 거리와 구역마다 배치되어 24시간 교대 순찰을 할 예정이니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아마도 그들은 내가 남부 지구에서 거주하는 상류층 집안의 자식이라고 생각해서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 같지만, 나는 당혹감만 느꼈다.

    '입주 첫날에도 습격이 있었는데, 두 번째 습격에서도 갈피를 못 잡았다고?'

    만약 어둠을 틈타 무엇이 지저 도시에 침투했고, 죄없는 사람들을 습격했는지 알아냈다면 정부와 군대는 좀 더 체계적이고 확실한 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원흉'에 대해 파악했으니 놈들을 즉시 제거하겠다며 타격대를 꾸린다던가, 놈들의 침입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겠다던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부족한 군 인력을 그냥 도시 전체에 촘촘하게 배치한다는 임시 방편을 꺼내들었다. 원흉을 파악하지도 못 했고, 해결책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였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건 정부나 군이 딱히 무능해서 벌어진 사태는 아니다. 내가 평소에 정부와 군대를 좋지 않게 보고는 있지만, 그래도 명색이 정부와 군대다.

    한 번 당해주는 것은 실수라고 쳐도, 두 번 당하고도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 했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던가, 내부의 소요 사태로 인해 중요한 결정들이 지연되고 있다던가, 혹은 작정하고 그들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던가.

    '나이트워커...라고 단정짓기엔 좀 이상했지.'

    일단 나이트워커 특유의 기괴한 비명소리는 일절 없었다.

    또한 나이트워커가 저질렀다고 보기엔 경비업체 직원들의 시체가 너무나도 기괴하게 망가져 있었다. 나이트워커는 힘이 아니라 스피드와 기습으로 승부하는 영악한 놈들이니까.

    '그럼 나이트워치일 가능성은?'

    그것도 희박하다.

    약간 판타지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경험상 나이트워치는 기본적으로 걸어다니는 저주덩어리나 다름없다. 직접적으로 교전하기보단 상대에게 자신을 인식시키는 것으로 무력화하는 게 특기인 놈이다.

    물론 나이트워커처럼 긴 촉수같은 혀를 내뻗어 공격을 하긴 한다. 나이트워커보다 위력이 더 대단한 것도 이미 확인했고.

    그렇기 때문에 경비업체 직원 두 명을 무참히 으깨버린 것은 나이트워커나 나이트워치가 아니다. 확신할 수 있다.

    '애초에 어떻게 지저 도시에 침투할 수 있었지?'

    지저 도시는 아직 미완성 상태이긴 하지만,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외벽이 존재한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미개척지대는 군 부대와 가깝기 때문에 그곳을 통해 침투했다고 해도 말이 안 된다. 군인이라는 먹잇감이 가까이 있는데 굳이 더 안쪽으로 침투해서 민간인을 노릴 이유가 없으니까.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외벽이 그렇게 높지도, 튼튼하지도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냥 이 외벽이 지저 도시의 제 1 국경선(보더라인)입니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설치한 거라고 들었으니까.

    아마 다른 국가의 다른 지저 도시도 그런 외벽을 쌓아서 기본적인 국경선을 그어놨을 것이다. 인류가 지상에 있을 때도 지저 세게에선 먼저 땅 먹는 놈이 주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난무했으니까.

    '군대와 경비업체도 바보가 아닐테니 기본적인 보안 시스템은 모두 돌리고 있었을 테고, 주기적으로 외벽이나 도심을 순찰하는 인원도 편성했을 거다. 그런데도 뚫렸다?'

    그것도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매우 기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

    나처럼 길거리 한복판에서, 혹은 다른 건물에서 숨어있던 사람들이 군용 수송차량에 실렸다.

    졸지에 셔틀버스가 된 군용 수송차량은 상류층 인간들을 각자의 자택으로 무사귀가 시켜주었다. 당연하지만 그곳에도 이미 군인과 경비업체 직원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부 지구의 첫 번째 정류장과 딱 붙어있는 거대 주상복합아파 단지에 도착한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귀가했다.

    불안한 분위기가 감도는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민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거주층에 도착했다. 지나가면서 슬쩍 엿들어보니 다행히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번 정전과 함께 벌어진 모종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대부분 소음이나 광원을 가지고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던 경비업체 직원들이었던 것 같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국가에서 공인하는 VIP들의 친인척들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서민들은 접할 수 없는 귀한 정보들을 얻을 것이다. 그때 나는 다시 뇌물을 뿌리면서 상류층만 접할 수 있는 정보를 몰래 뜯어내면 된다.

    그러니까 지금은...그냥 쉬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관까지 달려나온 어머니와 여동생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내게 어디 다친 곳 없냐느니,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느니, 어디서 뭘 하다 왔냐느니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나는 두 사람이 진정할 때까지 최대한 말을 맞춰주며 신변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회사에 잘 계시다고 하시더구나. 아마 오늘은 회사에서 묵고 오실 예정인 것 같아."

    "그럼 다행이네요. 바깥에서 주민들이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데, 여기서 큰 문제라도 있었나요?"

    내 질문에 어머니 대신 여동생이 답했다.

    "큰 문제는 없었는데 2주만이 또 이런 일이 발생해서 그런지 다들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아. 누구는 전력관리사무소 측에 따져보겠다고 하고, 또 누구는 원자력발전소 관리자와 아는 사이니까 닦달해보겠다고 하고, 반쯤은 인맥 자랑이나 다름없더라. 하여튼 여기 사람들은 불만을 품으면 그걸 표출하는 방식이 좀 남다른 것 같아."

    "아아, 그래서 다들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단두대에 올리고 싶어하는 분위기였구나."

    우리 남매가 자선행사 명목으로 물자를 헐값에 뿌릴 때가 아니면 그렇게 모이는 일이 별로 없는 양반들이, 오늘은 무슨 공원의 비둘기떼처럼 모여있더니만.

    상류층은 상류층만의 방식이 있다.

    서민층이 국민신문고로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나 떠들어대고 있을 때, 저들은 기업인이나 고위 정치인, 고위 장교에게 다이렉트로 자신의 의견을 알릴 수 있는 집단이었다. 여동생 시선에선 그게 상류층의 인맥 자랑처럼 보였을지라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그렇게 할 힘이 있다는 점이 진짜 무서운 거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남부 지구 거주민들을 위해 똥꼬쇼를 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박한화의 아들 박한성! 박한화의 딸 박하나! 두 남매가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여동생에게 일단 어머니를 조금 진정시킨 뒤에 내 방으로 오라고 따로 일러두었다. 이미 여동생과는 3분의 1 정도 비밀을 공유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토론할 대상이 필요했다.

    잠시 후, 어머니에게 마음이 안정되는 카모마일 차를 타드리고 온 여동생은 자신과 내 몫의 차도 한 잔씩 가져왔다.

    "오빠 몸에서 피 냄새 나는 거 알아?"

    "알아."

    어머니는 너무 경황이 없으셔서 눈치채지 못 하셨겠지만 여동생은 내게 남아있는 희미한 피 냄새를 대번에 눈치챘다. 그런 장소에 있었는데 당연히 피 냄새가 몸에 뱄겠지.

    따스한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나는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온기가 화악 퍼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치 스케줄은 어찌어찌 다 소화했지만, 마지막에 상상도 못한 일을 겪은 탓에 정신이 조금 마모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진짜 폭도나 테러리스트라도 나온 거야?"

    "당연히 아니지."

    "하긴. 고작 폭도나 테러리스트가 어찌어찌 운좋게 지저 도시에 들어왔다고 해도 극소수일 거고, 이런 일을 벌였다면 진즉에 체포당하거나 사살됐겠지. 그럼 뭔데?"

    "인류가 지하 12km 아래로 내려오기 전에 여기 살던 원주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여동생의 당돌한 질문에 나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내가 지상에 나갔을 때,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하는 놈들이 돌아다니고 있더라고. 지하에도 여전히 그런 놈들이 남아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거대하고 넓지만 햇빛 한점 들지 않아 어두컴한 지저 세계 한복판에서 갑작스럽게 엄청난 광량과 소음을 자아내는 도시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 것 같아?"

    "일반적인 생명체라면 두려워서 도망치려 하겠지. 야생 동물은 원래 그러잖아."

    "자극이 부족한 지저 세계에서 강렬한 자극을 받았는데 흥미를 느끼는 놈들도 있을 거 아냐. 박쥐처럼 천장에 붙어서 오든,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서 오든, 문어처럼 피부에 위장색을 입혀서 오든, 지저 도시 주변으로 몰려든 놈들이 꽤 될 거야."

    그 말에 여동생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지저 도시를 개발하던 사람들이 그런 생명체들의 습격을 받지 않았는데? 하다못해 접촉 사례는 아니더라도 보고 사례 정도는 있었어야 정상이잖아."

    "그래서 그게 첫 번째 가설이야. 네 말대로 전제조건에서부터 어긋나는 거니까."

    "뭐야, 난 또 진짜인 줄 알았네."

    "두 번째 가설은 초자연적 현상의 집합체인 유령이나 악마의 소행이다. 어때? 좀 더 그럴싸한 것 같지 않아? 막 두근두근 하지 않아?"

    여동생은 대답 대신 덤덤하게 카모마일 차를 마셨다. 대답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태도였다.

    "다 집어치우고 본론만 얘기해. 너도 사실 확신할 수 없으니까 나한테 그런 얘기 하는 거잖아. 그게 아니면 평소처럼 그냥 뭐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 넘겼을 테니까."

    "그래, 이 대단한 오빠도 확신하지 못 하는 게 있어. 문제는 뭘 확신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지랄병 도졌냐?"

    참다못한 여동생이 툭 쏘아붙였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아니, 진짜 모르겠어. 마치 중요한 정보가 누락된 것처럼 서로 다른 단서를 연결시켜줄 연결고리가 빠진 느낌이야."

    "기억상실이라도 걸렸다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중요한 단서를 못 찾겠다는 거야?"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네. 그럼 이참에 그냥 방향성을 새로 잡으면 되는 거 아냐? 벽에 막혔고, 벽을 뚫을 방법도 없으면 벽을 돌아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잖아."

    단순하지만 명쾌한 답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한 놈더러 병신이라고 했던 나지만, 막상 내가 그런 상황이 되자 정말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택지를 고민하게 될 줄이야. 인생은 한치 앞도 모르는 법이라더니.

    "지하에선 답을 찾기 힘들 것 같으니까 지상으로 나가봐야겠어."

    "이 시국에?"

    "킹시국이라도 결국 나가긴 나가야 해. 남부 지구 루트를 뚫긴 했지만 감시가 심해져서 당분간은 사용 금지일 테고, 하는 수 없이 북부 지구 루트를 좀 더 사용해야겠지. 어쨌든 지하에 얌전히 처박혀 있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니까."

    우리는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더 많은 물자, 더 많은 정보, 그리고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여동생의 말대로 당장 내 앞을 가로막은 벽을 돌파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돌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니까.

    "난 지상에서 조사해볼 테니까 넌 지하에서 조사해봐. 내가 없는 사이에 지저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사람과 세력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지, 지저 도시의 발전 방향성이 어느 쪽으로 잡히는지 전부."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알아봐줄게. 대신."

    "과자랑 생필품 갖다달라고? 말만 해 시발. 아예 마트 하나를 통째로 털어서라도 갖다 줄 테니까."

    "콜."

    믿겠다. 너는 내 [여동생]이 맞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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