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서(7)
처음 격벽을 열고 지상으로 나갔을 때의 그 기억은 아직도 잊지 못 한다.
여러 색채로 물들어있었던 세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벽지에 누군가가 검은 페인트를 끼얹은 것 같은 상실감, 허무감,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했으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던 세상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색채가 사라지고, 색채를 하나의 개성으로써 느끼게 해주는 최소한의 빛과 온도조차 존재하지 않는 절대정적의 세계.
나는 그런 세계에서 지저 도시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였다.
비록 지상의 빛은 지킬 수 없었지만 지하의 빛은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하지만 보라.
우리는 또 한 번 빛을 잃었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 비상발전기 가동 시키지 않고!!"
"이런 씨발! 대낮에 이게 무슨 난리야!"
"빨리빨리 움직여! 나보다 느린 새끼는 뒤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이 멍하게 어둠 속으로 잠식되고 있던 내 정신을 두들겨 깨웠다.
곧 그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손전등 불빛이 클럽의 화려한 조명등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눈을 부시게 했다. 그제야 나는 어둠 속에서 당연히 당황해야하는 한 명의 인간임을 깨달았다.
'지저 도시에서 대규모 정전은 위험하다!'
저 멀리 내다보니 곧 여기저기서 비상 전력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불빛이 돌아오고는 있었다. 어두컴컴했던 아파트단지가 다시 밝아지고, 길가의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물론 개중에는 불빛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많았다.
나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지저 도시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정전이 현재의 인류에게 매우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생명유지를 위한 인프라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기 때문에 치명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조금 더 본질적으로, 궁극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
위험하다는 걸 아는데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가장 먼저 어머니와 여동생의 안위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정전에 통화량이 폭증하기 시작했을 테니, 우선은 문자 메시지만 보내두었다.
만약 지금 외부라면 무조건 가장 가까운 건물에 들어가서 몸을 숨기고, 내부에 있다면 모든 출입구를 걸어잠근 채 절대로 안에서 나오지 말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군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손전등과 접이식 야삽만 하나씩 빌려서 움직였다.
이런 상황에서 멋대로 총기나 엑소스켈레톤을 반출하는 건 아무리 협력 관계라도 해도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부대가 어수선한 틈을 타 손전등과 야삽만 들고 빠져나온 나는 빛이 완전히 닿지 않는 거리를 열심히 뛰었다.
비상 전력이 공급되고 있는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간의 괴리감은 굉장히 심했다. 마치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출입구의 환한 불빛만 보고 달리는 느낌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페이스를 신경쓰지도 않고 죽어라 내달리자 금세 군 부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사람이 사는 구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전등 불빛을 비추며 최대한 바깥에서 고립된 사람들을 찾아 건물로 유도하는 것 뿐이었다.
햇빛 한점 들지 않아 완전히 인공적인 광원에만 의지하고 있던 지저 도시의 주민들에게 갑자기 불빛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눈뜬 장님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눈뜬 장님이 된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 뿐이었다.
"여기 누가 좀 도와주세요!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래......!"
도움을 청하는 건 대부분 돌발 상황에 이성적으로 대처하기 힘든 연령대의 사람들이었다. 내 동생보다 더 어리거나, 우리 부모님보다 훨씬 더 늙었거나.
하루종일 집에만 박혀있으면 심심해서 할 게 없으니 자주 산책을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하필 이 타이밍에 정전에 휩쓸린 것이다.
"자자, 괜찮으니까 여기로 모이세요!"
내가 손전등 불빛으로 한 명씩 찾아낸다음 기차놀이를 하듯 서로의 허리나 어깨를 잡게 했다. 그렇게 긁어모은 사람들을 가까운 건물로 대피시키고, 또 다시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 행동을 대충 3번쯤 했을 때, 나는 등 뒤에 여섯 명의 사람을 달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건물은 성공적으로 비상 전력을 가동시켰는지 꽤 밝았다. 우리는 칠흑같은 바다 한복판에서 등대를 발견한 것처럼 해당 건물을 이정표 삼아 걸었다.
각 건물마다 경비업체 직원들이 입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일단 건물에 접근하기만 하면 이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내 뒤를 따라오는 일행에게 얼마 남지 않았다고 격려하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던 그때였다.
타타타타타!!
"꺄아아악!"
"으악 씨발!"
갑작스러운 총성에 연인 관계로 추정되는 남녀 학생 두 명이 가장 먼저 자지러졌다. 업무차 방문했다던 동부 지구 회사원은 둘을 다독이면서 일으켜 세웠다.
자기관리를 위해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나왔던 노인 세 명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그들은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자지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지저 도시 입주 첫날에도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반쯤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총성이 들려오는 것은 상관없었다. 다 무시하고 이정표가 되어주는 저 건물로 뛰기만 하면 되니까.
문제는 총성이 그 건물 근처에서 울려퍼졌다는 점이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린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전등부터 껐다.
갑작스럽게 주변의 빛이 사라지자 일행은 더 놀라는 눈치였다.
노인들은 왜 내게 손전등 불빛을 끈거냐고 조곤조곤 되물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일행의 연결된 손을 붙잡고 한 명 한 명 손글씨를 써서 상황을 알려주었다.
-소음 금지
노인들과 회사원은 이해가 되지않는다는 어조로 조용히 이유를 되물었지만, 나는 상식적으로 총성이 울려퍼질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불빛과 소음을 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정론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어른들은 즉시 내 말에 따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이들쪽이 조금 문제였다.
남친 되는 녀석은 그래도 깡이 있어서 그런지 여친을 돌봐주려는 느낌이 강했지만, 여친 쪽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암흑과 총성때문에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계속 흐느끼고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재킷을 벗어 커플의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운 다음, 손전등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불안하면 잠시 불 껐다 켜도 돼. 하지만 절대 불빛이 바깥으로 새어나오게 하지는 마."
"가, 감사합니다. 형."
"훌쩍...고맙습니다."
"그래그래. 여기서 어른들이랑 잠시 기다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큰소리 내지말고, 섣불리 움직이는 것도 안돼."
한결 가벼운 복장이 된 나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맡긴 뒤, 야삽 하나만 들고 이정표가 된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지상만이 아니라 지저 세계에도 나이트워커나 그와 유사한 존재들이 있다면.
빛과 소음, 그리고 다양한 체취로 넘쳐나는 지저 도시는 바다 한복판에 떨어진 거대한 미끼통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지저 세계에 살고 있을 무언가도 달콤한 꿀처럼 유혹해서 끌어들이겠지.
애초에 인간이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지하 12km에, 대체 왜 인간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고대 문명의 흔적이 발견되긴 했지만 더이상 지적 생명체가 없으니 인류가 그 땅을 차지해도 된다고 누구에게 허락을 받았단 말인가?
지상에 있을 때도 지구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 인류가, 하물며 지저 세계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나 호들갑을 떨며 급하게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결과론만 따지면 지저 도시 프로젝트는 선구안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안일했다.
"으음......!"
건물과 가까워질수록 텁텁한 공기를 타고 날아든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손전등을 두고 왔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카메라 기능으로 불빛을 비추며 끔찍한 현장을 눈에 새겼다.
수동 개폐 장치로 반쯤 열려있는 출입구 셔터, 그 사이에 쓰러져 있는 두 명의 경비업체 직원. 그중 한 명은 머리가 없었다. 그들의 몸은 트럭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으며 출혈량 또한 상당했다.
머리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시체를 제외하면 나이트워커의 기본적인 공격인 혀 촉수에 꿰뚫린 흔적은 없었다. 문자 그대로 강력한 힘에 의해 사지가 뒤틀렸거나, 짓뭉개진 듯 했다.
'셔터를 비집고 열고 들어간 흔적이 있다.'
내부에서 새어나오는 초록색 비상등 불빛에 반사된 것은 검붉은 체액의 흔적이었다. 이 사람들의 혈액이 묻었기 때문인지, 전혀 다른 것이 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갔다는 건 분명했다.
경비업체 직원들이 들고 있던 기관단총은 모두 시체와 함께 으스러지면서 박살이 났기에 사용할 수 없었다.
'덩치가 큰 놈은 아니야.'
덩치가 컸다면 이 시체들을 들이박거나 짓뭉갰을 때 주변이 좀 더 파괴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반쯤 열린 셔터도 힘들게 비집고 들어가서 바닥에 흔적을 남기기보단, 우직하게 부수고 들어갔겠지.
딱 성인 남성 한 명을 감싸서 으깰 정도의 크기. 혹은 효율적으로 사람의 몸을 으깰 수 있는 기괴한 형태의 신체 구조를 가진 놈.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 문득 굳이 내가 이 건물을 직접 수색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군대가 곧 각 지구 전역을 순회하며 수상한 자는 잡아들이고, 적성체는 요격할 텐데.
이미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도 울리고 있었으니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한 중장갑보병이 이곳에 당도하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는 이쯤에서 빠지고 다시 길거리에 놔두고 온 사람들과 합류해서 군의 도움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확인했으면 됐어. 빠지는 게 맞아. 사람도 죽었고, 총도 없고, 장비도 없어.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도 일찌감치 방에 처박혀서 잘 숨어있겠지. 굳이 내가 오지랖을 부릴 필요는 없어.'
그렇게 되뇌이면서 슬금슬금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와 반대로 은은한 비상등 불빛만 들어온 복도의 어둠은 묘하게 나를 끌어들이는 듯 했다.
마치 싱크홀의 안쪽을 확인하기 위해 무심코 손전등 불빛을 들이밀었던 그때처럼.
기껏해야 복도의 윤곽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건물 내부의 어둠이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물러서.'
들어가야 해.
'여기까지 왔으면 충분해.'
아직 충분하지 않아.
-너희가 들어가서 확인해야 할 장소가 있다.
야삽을 쥔 오른손이 따끔거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팔에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