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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인사이드 아웃-62화 (62/211)
  • 지하에서(6)

    힘든 일을 끝마치고 나면 긴장이 탁 풀린다.

    아! 이제 쉴 수 있어! 이런 생각때문에 긴장의 끈이 뚝 끊어지면서 육체와 정신이 나른해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새로운 일감을 가져다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스마트폰 시간 알람 기능 덕분에 아직 스케줄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부 지구 주둔군 지휘관과 밀수에 대해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로 했던 것이다.

    "아, 뇌와 뼈가 녹는 느낌이다."

    만약 이 가엾은 어린양을 보는 신들이 존재한다면, 부디 제게 공감해주시고 연대해주시고 지지도 해주십시오.

    남부 지구로 돌아가는 버스가 도착하자 나처럼 지친 사람들도 몇 명인가 탑승했다. 친절한 버스 기사님이 없는 무인셔틀버스는 딱 필요한 만큼 승객을 태워서 천천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지저 도시는 조금씩이지만 안정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장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식량 배급이었다.

    서부 지구 곡창지대에서 빠르게 출하한 식량을 가공해서 가정 배급 및 판매 목적으로 시장에 풀기 시작했는데, 이게 허약한 내수시장에 약간이지만 동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빠르게 짓고 있는 다세대주택이다.

    일일노역을 위해 몰려든 노동자들과 건설업체가 합심해서 중장비와 넘쳐나는 원자재를 팍팍 쓰고있다보니, 지저 도시에 입주한지 20일도 지나지 않아 벌써 새로운 건물의 뼈대가 완성되고 있었다.

    지상에 있을 때는 꿈도 못 꿀 내집마련이, 서울 12km 지하에서 실현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조금씩이지만 체계가 잡히고 있어.'

    여전히 허술하다는 내 생각은 바뀌지 않지만, 지금까지는 탁상공론만 떠들고 있던 정부가 대대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는 거다.

    2주라는 시간은 지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지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당장 어떤 문제가 있고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떠들기는 충분했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그 사람들은 VIP 대접받으며 좋은 곳에서 편히 쉬겠지만 나는 아니라는 거다!

    서로 알 거 다 아는 정치인은 큰 안건을 처리한다음 다들 수고했다면서 벌써 술 한잔씩 걸치고 있을 것 같다. 술하니까 삼겹살에 소주 생각이 난다.

    "진짜 존나 부럽다."

    물론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남부럽지 않게 편히 쉴 수 있다.

    지상 작전 한 두번쯤 빼먹을 수도 있고, 내가 꿍쳐둔 물자를 혼자 까먹으면서 부르주아 생활을 만끽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그런데 지금 내 입장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입장이라는 게 문제다.

    마치 보이지 않는 상관이 끝없이 내게 채찍질을 하면서 '일해라 핫산!'을 외치고 있는 기분이다. 도비는 자유가 되고 싶어요!

    "인생 진짜......"

    남부 지구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무인셔틀버스에서 내려, 남쪽 엘리베이터 통로가 우뚝 서있는 곳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통로는 내구도 향상을 위해 외벽 마감을 철저하게 했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면 그냥 거대한 흑색 기둥처럼 보인다.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초고층 빌딩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엘리베이터 통로 외벽 마감이 철저한 덕분에 엘리베이터 사용을 들키지 않았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하는 건가?'

    저런 흉물이 거주지 근처에 떡하니 자리잡은 건 미관상 영 좋지 않지만,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밀수조직들에겐 저만한 것도 없었다.

    다시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수십 분을 걸어, 비교적 남부 지구 외곽에 위치한 군 부대에 다다르자 군인들이 내게 다가왔다. 서로 얘기가 다 끝난 상황이었던 터라 스스럼없이 직급 카드를 보여주었다.

    알게모르게 남부 지구 주둔군으로 흘러들어간 뇌물도 제법 있고, 무엇보다 북부 지구 주둔군이 밀수 덕분에 한탕 크게 해먹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진 상황이다.

    북부 지구의 근본없는 양아치들이라면 모를까, 밀수범이면서도 유일하게 남부 지구 거주민인 내가 직접 담판을 지으러 왔다고 하니 저쪽에서는 오히려 환영하는 눈치였다.

    상류층 집안의 자식이 위험을 무릅쓰고 밀수를 할 정도라면 군인인 자신들이 엮여도 큰 문제 없겠다는 인식을 심어준 셈이다. 당연히 끌리지 않고는 못 배기지.

    군 부대 인근 지역은 감시드론의 감시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도청이나 감시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남부 지구 주둔군 지휘관 김호철 중령이 나를 살갑게 맞이해주었다. 북부 지구의 카리스마 있는 이철진 중령과는 정반대 타입이었다.

    상류층이 거주하는 남부 지구 주둔군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부자들로부터 뭐 떨어지는 콩고물이 없나 생각했을 텐데, 아직까지 그런 기미가 없어서 꽤 아쉬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모님을 통해 찔러준 뇌물과 북부 지구의 밀수 소문이 그의 탐욕을 미친듯이 자극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가려운 부위에 깃털을 살랑살랑 문질러대는 느낌이었겠지.

    "어휴, 귀하신 분이 오셨네. 얼른 안으로 드십시다!"

    대대장이라는 직책에 맞지 않게 조금 과하게 호들갑을 떤 그는 사적인 공간에 나를 안내했다.

    그와 마주보고 앉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진혁 본부장에 비하면 굉장히 쉬운 사람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냥 딱 보면 감이 오지 않는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 뭐 주워먹을 거 없나 찾고 있는 파리처럼 싹싹 비비고 있는 손, 어떤 제안이든 무조건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팔랑귀.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알기 쉬운 타입이었다.

    '사모님은 자신에게 항상 미안해하는 좋은 남편이라고 칭찬했던 것 같은데, 들었던 것과는 좀 많이 다르네.'

    역시 사람 말은 양쪽 모두 다 들어보고 실물까지 확인해봐야 하는 거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그냥저냥 지내고 있던 사람이 나때문에 뇌물의 달콤한 맛을 보고 사람이 확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쪽이든 이제와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오늘은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호철 중령님."

    "그건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할 말입니다. 저는 군대 일로 바빠서 집안일에 대한 건 아내에게 맡겨두고 있었는데, 아내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과분한 성의도 잘 받았고요. 듣자하니 북부 지구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남부 지구에서도 하고 싶으시다고......?"

    그의 본심이 훤히 드러나는 대답에 나는 무심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자리도 아부와 정치질, 그리고 기가막힌 눈치로 자기보신을 잘 해서 얻은 자리가 아닐까 싶었다.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남부 지구에서 이웃사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또 그걸 위해서 북부 지구 주둔군과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실 거라 봅니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시는 걸 원하시는 눈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간결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협조만 해주신다면 남부 지구 주둔군도 북부 지구 주둔군 못지 않은 수익 창출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신에 찬 확답에 김호철은 뭔가 씌이기라도 한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매번 전투 식량만 먹어서 지친 병사들의 불평불만을 순식간에 잠재우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대접받을 수 있으며, 윗분들에게 상납할 수 있는 뇌물과 본인의 뒷주머니까지 차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면 황홀할 만도 하지.

    하지만 그도 대책없이 대대장이라는 지위에 올라온 것만은 아니라는 듯, 곧 현실적인 얘기를 꺼내들었다. 북부 지구의 이철진 중령은 벌써 개인적으로 해결했던 문제였다.

    "군 관할 지역은 기밀이라 감시드론으로 촬영 및 녹음이 불가능하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감시망을 쉽게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아시죠? 협조를 해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위험 부담이라는 게 좀...아시잖습니까?"

    "최근 정부가 수상한 자금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고, 또 불시에 감찰이라도 나오면 대비하기 힘들다는 거 다 이해합니다. 해서 저희 밀수조직은 남부 지구 주둔군에게 물자를 판매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판매하지 않는다? 그럼 왜......?"

    "남부 지구 통행세 및 엘리베이터 이용세로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럼 전산상의 거래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

    내가 선심쓰듯 '그냥 주겠다'고 말하자 김호철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은 그냥 남부 지구 주둔군이 리스크를 안고가는 만큼 수당을 조금 더 받아야 겠다는 식으로 거래하려고 했었는데, 내가 그쪽 입장에서만 더 좋은 방안을 덜컥 제시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우리야 좋지만...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서부 지구와 동부 지구, 그리고 중앙 지구 엘리베이터는 사실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북부 지구 밀수조직들은 계속 북쪽 엘리베이터만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밀수 효율이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도봉구에서 시작했지만, 해당 지역의 물자가 다 털리면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작전 시간과 위험이 배로 늘어나게 되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우려가 있다.

    그걸 방지하고자 노원역이라는 전초기지를 마련해두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다.

    따라서 밀수조직들이 조금 더 손해를 본다고 해도 서울 중심부로 이어지는 북한산 남쪽 엘리베이터를 확보해야 한다.

    "엘리베이터 사용 기록은 이쪽에서 슬쩍 지워버리면 그만이고, 부대 관리도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밀수조직이 지상에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기록에도 남지 않는 부수입을 얻으시는 거고, 불시에 감찰이 나온다고 해도 비교적 잘 속여넘길 수 있을 겁니다."

    혹은 윗분들에게 상납금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아예 감찰 자체를 막아버려도 상관없다. 적어도 이철진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덧붙여서 저희가 내게 될 통행세 및 이용료는 무조건 전체 수익의 2할입니다. 고급 양주 100병을 들여오면 그중 20병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드리겠다는 겁니다. 이정도면 남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저희들을 '모른척' 해주시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남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그, 전체 수익의 2할이라고 해도...만약 우리가 원하는 물건으로 받을 수 없다면 조금......"

    "당연히 원하는 물건을 2할 만큼 가져갈 수 있는 우선권도 드리겠습니다. 의약품만 제외하고. 그건 저희쪽에서 따로 써야 하는 귀중한 물자라서......"

    "2할! 오케이! 2할! 땡큐!"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내 손을 맞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예상대로 이진혁 본부장에 비하면 굉장히 알기쉬운 사람이었다.

    여기서도 얘기가 잘 풀렸으니 이번에야말로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웃고있던 나는 갑자기 시야가 검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억! 뭐야?! 왜 갑자기 전등이 나가고 지랄이야!"

    시야가 검게 물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김호철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더듬더듬 무전기를 찾았다.

    곧 책상에서 무전기를 찾은 그가 부하들을 갈구는 동안, 나는 조심스럽게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내가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건물의 문을 열고 닫았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안과 마찬가지로 바깥 역시 칠흑같은 암흑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전?"

    또 한 번 지저 도시에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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