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61화 (61/211)
  • 지하에서(5)

    "뭐가 필요하냐라......"

    이진혁은 마지막 상품인 C세트, 즉 나를 바라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이미 미래그룹에서 실질적으로 살만한 것은 다 샀다. A세트에 담긴 정보, B세트에 담긴 미래 가치. 여기까지 딱 돈 벌어먹고 사는 기업에서 마지노선으로 삼을 수 있는 투자 영역이다.

    하지만 C세트에 해당하는 나 박한성은 어딜 어떻게 보고, 뭘 믿고 투자한단 말인가.

    일단 디그러쉬 박한화의 아들이라는 점, 범죄자 집단인 밀수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법을 몇 개나 어기고 있다는 점 등등.

    기업인의 시선에서 보면 나는 투자 상품이 아니라 그냥 존재할 뿐인 악성 재고, 혹은 떠안으면 무조건 손해보는 바가지 상품이다. 기업인의 시선으로만 본다면 말이다.

    "저는 많은 것을 해드릴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능력이 꽤 뛰어나다고 스스로도 자부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장비와 조건만 갖춰준다면 능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랬다가 실패하면? 이쪽에서 투자한 것에 비해 회수할 수 있는 이익이 생각보다 적다면?"

    "그게 중요합니까?"

    내 반문에 이진혁이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시선 반, 일단 계속해보라는 시선 반이 담겨 있었다. 그가 이성적인 호랑이 새끼라서 참 다행이다.

    "제가 의뢰를 받아서 일을 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겁니다. 기계도 종종 오류를 일으키고 고장이 나기도 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해서 100% 성공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그걸 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하,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만. 그런 건 적당히 보상을 내걸기만 하면 얼마든지 사람을 모을 수 있어. 이건 조금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이 저보다 뛰어나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

    "그들 중에 과연 이진혁 본부장님과 독대하고, 자신이 독창적으로 개척한 시장에서 상품을 팔고, 거래까지 진행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많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는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에 있는 건 저뿐이고, 이진혁 본부장님은 지금 저와 거래를 하고 계십니다. 즉 기업의 입장과 시선에서 봤을 때, 니즈를 충족시켜줄만한 인재가 현재로선 저뿐이라는 얘깁니다."

    해석 : 나 말고 다른 인재 구해서 용병처럼 부려먹을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해라. 대신 지금 거절하면 내 몸값은 더 오르는 거 알지?

    "지금쯤 제가 지나치게 자신감이 비대한 미친 놈이거나,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오만한 병신이라고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반 정도는 맞는 말이니까 딱히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자리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저와 계약을 하시든가, 아니면 나중에 더 비싼 돈을 주고, 불리한 조항까지 추가해서 저와 계약을 하시든가. 선택지는 딱 2개 뿐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나오면 조금 이상한데? 그쪽 입장에선 내가 지금 당장 계약을 거절하고 나중에 몸값을 더 올려받는 게 이득 아닌가? 그럼 좀 더 허황되고 말도 안되는 독소조항까지 추가해가면서 자신의 평가를 일부러 깎는 게 합리적인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 거지?"

    "자기 상품에 스크래치를 내는 미친 판매상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단순명쾌한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이진혁은 피식 웃으며 또 하나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좋아, 그럼 상품에 스크래치를 내지 않았다는 의미니까 조금 전에 말한대로 어지간한 일은 장비와 조건만 갖춰지면 다 해줄 수 있다는 거지? 물론 성패 여부는 장담할 수 없고."

    "혼자 흉가체험을 다녀올 수도 있는 이 담력과 의지 하나면 뭔들 못 하겠습니까?"

    나는 귀신같은 건 믿지 않으니까 흉가체험을 하라고 하면 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귀신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고작 흉가체험 하는 것 정도야.

    "그렇게까지 말하니 구미가 좀 당기긴 하네. 마침 미래그룹에서 자잘한 일을 몇 개 부탁할만한 현장 인력이 필요하긴 했는데."

    "저 혼자서 할 수 없는 규모의 일이라면 아예 공고문을 써서 북부 지구에 뿌리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럼 저와 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해당 공고문을 읽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용병들에게 공개 의뢰를 흩뿌리는 것처럼? 괜찮네."

    "어차피 저를 포함한 북부 지구의 사람들은 대부분 삶에 찌든 서민들입니다. 특히 불법인 밀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내일이 없고 오늘만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업이 조금 더 투자한다면...시장이 좀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아하."

    이진혁은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 반쯤 핀 담배를 손에 꼬나쥐고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같은 기업도 한 발 걸치라는 거네?"

    "제아무리 돈과 권력을 가진 기업이라고 해도 뒷처리를 해줄 사람들이 필요한 건 사실 아닙니까? 실제로 지상에 있을 때도 그런식으로 아랫 사람들을 많이 써먹으셨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청소부, 심부름꾼, 대타, 산업스파이, 기업이 돈줄 쥐고 부려먹던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야. 지저 도시에 내려오면서 그것들 대부분을 잃어버린 것이 뼈아프기도 하고."

    "그러니 저와 계약하시면 됩니다. 원하신다면 뒷처리도 해드리고, 심부름도 해드리고, 대타로 나서서 부담을 대신 짊어질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다른 기업에서 정보를 빼내올 수도 있습니다. 그만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이진혁은 두 번째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끈 뒤 잠시 고민의 시간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그와 독대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이미 '유능한' 쪽에 해당하는 인재다.

    그런 인재와 합리적인 가격을 계약해서 주기적으로 필요한 일을 맡긴다면 최소한 손해보지는 않을 터. 물론 성패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신경쓰이겠지만, 기업이 맡기는 일이라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사람을 구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래, 예를 들어 지상에 나가서 XX지역에 있는 XX공장의 XX시제품을 가져와라, 같은 의뢰를 냈다고 치자.

    하루벌어 사흘먹고 사는 대다수의 밀수조직이 그 의뢰를 선선히 받아들일까? 입이 떡 벌어지는 보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지상의 냉혹함을 겪은 인간들이라면 쉬이 도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충직한 개새끼처럼 꼬리를 흔들면서 파트너가 던질 프리스비와 고깃덩어리를 모두 기다리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저와 계약하신다면 향후 열리게 될 용병 시장에서 우수한 용병을 선점하는 것이고, 계약을 하지 않으시면 쓸데없이 몸값은 더 비싸지고 콧대만 높은 용병을 보게 되실 겁니다."

    "용병 시장이 열릴 거라는 얘기는...다른 기업들도 밀수조직에게 이미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거겠지."

    그렇고말고.

    밀수조직들이 백날천날 밀수로만 벌어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까 밀수도 하는 김에 기업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용병으로 거듭나는 거다. 지금 내가 막 그 태동기의 신호탄을 쏘려고 준비중이다.

    "좋아. 계약하지."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이진혁 본부장은 마법재벌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제 모든 상품이 팔렸기 때문에 정산의 시간이 다가왔다.

    "각 상품에 대한 가격은 이미 준비되어 있겠지. 제시해봐."

    "모든 상품을 구매해주셨으니 에누리좀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가방 속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이진혁에게 내밀었다. 그건 내가 따로 계획해둔 대략적인 구상도와 견적서였다.

    "돈은 필요없습니다. 대신 미래테크에서 개발한 신형 엑소스켈레톤 파츠와 무인 화물 운송 차량을 우선적으로 저희 차도식파에 납품해주십시오. 납품 수량은 거기에 적혀있는 대로입니다."

    "지상에서 더 많은 것을 가져오기 위한 투자라...본래는 돈 주고도 구매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런 쪽으로 사용한다면 미래그룹 입장에서도 나쁠 것 없지."

    미래그룹이 지상에 있을 때부터 신형 엑소스켈레톤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것때문에 주가 시장이 시끄러웠던 적도 있으니까.

    "이 무인 화물 운송 차량은 크기가 좀 작은데 정말 괜찮나? 사실 말이 좋아 운송 차량이지, 차량이라고 할 만큼 큰 건 아니거든. 그 뭐냐, 요구르트 아줌마들이 타고다니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정도야. 본래 공장 자재 운반용으로 쓰려고 개발한 물건이라서."

    "오히려 그 편이 좋습니다. 지상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 작전팀과 함께 능동적으로 움직여줄 수 있는 무인 운반 차량이 필요했습니다. 미래그룹에서 개발한 자율주행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을 테니 장애물을 피하거나 사람을 잘 따라오는 것 정도는 혼자서 잘 할 것 아닙니까?"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그런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가성비가 괜찮긴 하겠네."

    이진혁은 신형 엑소스켈레톤 파츠와 마찬가지로 무인 화물 운송 차량 납품 건도 스무스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상품을 3개나 구매한 입장에서 이정도 지출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이 기괴한 설계도인데...이건 무기인가?"

    "방산업 분야까지 개척한 미래그룹, 그 몸통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테크라면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아서 제시하는 겁니다."

    내가 서류 사이에 끼워넣은 어설픈 설계도와 러프 스케치는 확실히 그의 말대로 기괴하긴 했다.

    평소에는 사람이 들고다닐 수 있을 정도의 서류 가방이, 스위치를 눌러서 지면에 던져놓으면 즉시 케이스가 펼쳐지면서 SMG(기관단총) 터렛이 튀어나오는 물건이니까.

    이또한 미래그룹의 기술력이라면 살아있는 인간과 나이트워커를 명확하게 분리해서 식별하는 AI 기술, 그리고 서류 가방 안에 자동 조립되는 총기를 우겨넣는 기술 모두 실현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기능을 구현하기 어렵다면 별도의 아군식별용 패치를 부착하게 해서 터렛 AI의 적으로 인식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다.

    케이스가 펼쳐지자마자 자동으로 조립되어 순간적인 화력을 쏟아낼 수 있는 터렛을 만드는 건...그건 공돌이들이 걱정할 문제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휴대용 샤워기를 만들어 보죠. 샤워기만 들고 다니면 언제 어디서든 샤워할 수 있습니다! 이름하여 와이파이 샤워기!

    -와! 그건 어떻게 만들죠?

    -그건 이제 네가 생각해야지.

    -?

    보통이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겠지만, 나는 미래그룹의 기술력을 믿기 때문에 과감하게 맡겼다.

    만약 나이트워커 자동 감지 및 요격 터렛 개발에 성공한다면 경비업체를 두고 있는 미래그룹 입장에선 고객 안전 시장이 더욱 확대되는 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개발부터 양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도 없지만, 일단 맡겨보는 거다. 내가 상품 대금을 받는 대신 이렇게 일을 맡기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이건 일단 개발부서 쪽에 넘기기로 하고, 마지막으로는...북부 지구 개발 투자?"

    "최근에 정부가 북부 지구에 이래저래 신경을 쓰고 있어서 말입니다. 미래그룹씩이나 되는 대기업이 나선다면 서민들의 코묻은 돈의 흐름 정도는 감출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현재 미래그룹은 동부 지구 발전에 힘쓰고 있지만 자본이 워낙 거대한 탓에 북부 지구에 살짝 손쓰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북부 지구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얽히면서 사소한 돈의 흐름 정도는 가려줄 수 있을 만큼 큰 우산이 될 것이다. 기업이 나선다면 낙수효과로 자연스럽게 시장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미래그룹 입장에서 크게 의미는 없는 행동이지만, 북부 지구 주민들과 기업이 가까워질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지저 도시에서 압도적인 인구 비율을 자랑하는 서민층과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대기업이 가까워진다?

    그 잠재적 시장성을 누가 감히 예단할 수 있겠나?

    "마지막 건은 회장님께 허가를 받아야 하니 지금 이 자리에서 확답은 줄 수 없겠어. 만약 마지막 건이 안 된다고 하면 적당한 가격을 메겨서 잔금을 지불하지. 어때?"

    "그거면 충분합니다."

    사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건이 핵심이긴 했다. 무려 정경유착도 아니고 민경유착이니까.

    압도적인 서민층과 대기업이 가까워지면 실로 이상적인 구도가 형성된다.

    기업 입장에선 수많은 친기업 성향의 노동력과 소비력을 모두 얻는 것이고, 서민층 입장에선 월급 따박따박 주고 각종 혜택도 제공하는 평생 직장이 생긴다.

    불협화음이 나오지 않는 이상적인 자본주의의 끝판왕 구도가 만들어지는 건데, 그 본질을 꿰뚫어 본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겠지.

    때문에 저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북부 지구 주민들이 얼마나 강력한 단합력을 보이는 상황인지, 친북부지구 성향의 기업이나 정치인에게 얼마나 퍼줄 각오가 되어 있는지.

    미래 시장성을 먼저 눈치채고 뛰어드는 놈부터 최고의 노동력과 고객층을 모두 확보하는 제로섬 게임이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쪽이야말로."

    마침내 길고 길었던 거래가 끝이 나자 우리는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했다.

    이렇게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큰 불협화음 없이 서로가 만족하는 상황을 이끌어냈다는 건 굉장히 고무적인 결과다.

    미래그룹은 미래그룹대로, 나는 나대로 얻은 것이 많은 거래였다.

    이진혁의 말마따나 정말로 지상에서 만났더라면 친구 먹고 술을 퍼마시면서 실컷 노는 관계로 발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인류가 지상에서의 삶을 포기한 시점에서, 우리 또한 언제까지고 철이 들지 않은 청소년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을 뿐.

    마음만은 10대였던 우리가 기분 좋게 악수를 끝마치고, 이내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그는 차기 미래그룹의 수장으로, 나는 밀수범이자 용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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