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60화 (60/211)
  • 지하에서(4)-여기서부터 유료-

    "호오......"

    나의 간략한 상품 소개에 이진혁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거래, 협상, 대화를 할때 상대방을 앞에 두고도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샘솟는 자신감의 무의식적 표출이다.

    나는 이만큼 대단한 사람이고, 내가 이 자리를 주도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통 자리의 격식을 따지지 않게 되면 저런 태도를 취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이진혁의 태도가 꼭 나쁘게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

    상대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얕잡아보고 있다면 중요한 패를 숨기는 것도, 진실 속에 가짜를 섞어넣는 것도,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더 많은 이득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강자가 강자의 지위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약자 또한 약자의 지위를 이용하면 된다는 얘기다.

    "구미가 당기실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미래테크는 미래그룹의 실질적인 몸통이나 다름없어요. 원하는 정보나 상품이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죠. 그건 사람(인재)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가능했다면 벌써 그렇게 하셨을 것 아닙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상품들은 오직 저만 취급하고, 저만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뛰어들 수 없는 저만의 독점 시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신감이 좀 과한 것 같은데. 우리도 그쪽에 대해선 이래저래 알아봤어요. 출신도 출신이고, 수완도 좋고, 주변 평가도 에이스 취급. 그런데 원래 시장이라는 게 돈과 이권이 모이면 개미들도 꼬인다는 거...다 알잖아요?"

    이진혁이 검지와 엄지 손가락을 살살 문지르며 은근한 어조로 압박해왔다.

    하지만 이미 당해본 전략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진혁이 진심으로 나를 압박하고자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나 하려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이진혁은 정말로 궁금한 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라는 판매상을 제껴버리면 미래그룹이 향후 나와 비슷한, 혹은 나보다 더 뛰어난 판매상과 거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돈과 이권이 모이면 개미들이 많이 꼬이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래그룹과 거래하는 대상이 고작 '개미'인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내가 그대로 되돌려주자 이진혁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계속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제가 이진혁 본부장님과 독대를 한 시점에서 저는 이미 개미가 아닙니다. 미래그룹의 주춤돌이자 기둥이며, 미래그룹에 속한 모든 이들의 어버이 되시는 이진석 회장님의 장손씩이나 되시는 분이 고작 개미따위와 독대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단순한 변덕이라면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변덕을 부릴 때도 있잖아요? 평소에는 스테이크만 썰던 사람도 갑자기 떡볶이가 땡기는 것처럼."

    "단순한 변덕이라면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변덕이란 일종의 즉흥적인 무의식적 유흥입니다. 이진혁 본부장님씩이나 되시는 분들의 변덕을 무의미한 일에 허비하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제가 이진혁 본부장님이라면 얼마 안 되는 변덕의 기회를 그렇게 쉽게 날려버리지 않을 겁니다."

    "흐,흐흐흐......!"

    짝짝짝!

    이진혁은 갑자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다가 결국 비틀린 입가에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바로 어제 봤던 개그 프로의 웃긴 장면이 떠오른 사람처럼.

    차마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호탕하게 웃어젖힐 수 없었기 때문인지 박수를 치는 그의 손에는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 이거 걸물이시네 진짜. 그 디그러쉬의 철인 아들 답다고 해야 하나?"

    "아버지보단 아들이 낫죠. 유전적으로 더 완벽한 존재 아닙니까?"

    "흐흐...! 아, 진짜. 바깥에서 나랑 만났으면 친구 먹고 하루종일 놀았을 텐데 너무 아쉽네. 여긴 아직 놀 거리가 별로 없어서 놀고 싶어도 일만 해야 한다는 게 참......"

    그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던 자신의 속내를 살짝 털어놓는다 싶더니, 갑자기 품속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있는 집 자식답게 시가라도 태울 줄 알았더니만, 의외로 평범한 국산 담배를 피는 애국자였다. 아마 국산 담배를 피는 것으로 자신은 성실 납세자라고 생각하는 타입 아닐까?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그는 후욱 하고 내뱉더니, 꼬고 있던 다리를 도로 풀고 소파에 편한 자세로 기대어 앉았다.

    이제 세일즈맨의 본격적인 상품 소개를 들을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하나당 5분씩 해서 15분 드리죠. 개인이 미래그룹과 거래해서 뒤탈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걸 이 자리에서 증명해보세요."

    그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즉시 A세트에 해당하는 USB 2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그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마치 마술사가 동전 마술을 하기 전에 관객들의 시선 처리를 하는 것처럼.

    "A세트는 디그러쉬를 포함해서 그 어떤 기업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지상 데이터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기후환경부터 지형지물, 완전히 뒤바뀐 지상에서 새롭게 등장한 요소들에 대한 정보를 직접 수집해서 영상, 녹음 기록, 보고서 형태로 정리해둔 완전판입니다. 소위 공략집이라고 부를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미래그룹이 그 정보를 구입하는 것으로 얻게되는 이익은? 지금 당장 당신에게서 그 정보를 구입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 더 싼값으로 정보를 구해오게끔 했을 때 짊어지게 되는 손해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도 뭣하지만, 밀수조직들 사이에서 제 입지는 독보적입니다. 빠른 행동력과 망설임없는 결단력, 빈틈없는 계획력, 그리고 우월한 임무 수행 능력까지. 그런 제가 지상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수집한 정보의 정수가 이 USB 2개 분량 만큼 준비되어 있는 겁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만한 품질과 양의 정보를, 빠른 시일내에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돈과 사람을 쓴다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데."

    "하지만 뒤쳐질 겁니다. 이곳에서 판매하지 못한 정보는 경쟁 기업의 손에 먼저 들어가게 될 텐데, 미래그룹 입장에선 뼈 아프진 않을지라도 귀찮다고 느낄 정도는 될 겁니다."

    "아, 요컨대 현대 사회인은 극한의 편의성과 효율을 중시하고 있으니까, 평소처럼 그렇게만 하라는 의미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한 놈은 병신입니다. 급할수록 남들보다 더 앞서나가야 합니다. 여기 남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 준비되어 있는데 굳이 시간과 비용이 더 들어가는 먼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건 맡아두지."

    이진혁이 내 손에 들려있던 USB 2개를 가져가 자신의 품속에 갈무리했다. A세트가 지금 막 팔렸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장 종이로 감싼 유리병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이왕 앞서나갈 거라면 '독보적으로' 앞서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A세트에 비해 B세트는 꽤 까다로운 성질의 상품이지만, 미래를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치고 진실만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고 배웠는데."

    "그건 그 사람들이 연구자금과 연구결과로 얻어낼 수 있는 명예를 모두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연구자금도, 연구결과에 따른 명예도 모두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투자할 가치가 있는 상품만 소개해드리고, 그걸 판매하려는 것 뿐입니다."

    "우리에게 연구자금 융통과 연구를 모두 일임하면서 자기는 상품인지 아닌지도 모를 것을 판매만 하고 입 싹 닫으시겠다?"

    "하하, 그건 아닙니다. 세상 어떤 미친 판매상이 상품가치도 없는 물건을 가져와 팔겠습니까? 이건 A세트에 들어있는 정보중 하나인 지상의 위험 요소로부터 직접 채취한 '혈액'입니다."

    유리병을 감싸고 있던 종이를 벗겨내자 기분나쁜 검은색을 자랑하는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구한 사람은 지금까지 제가 유일하고,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 유일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으로 물든 지상에는 정체불명의 위험 요소가 나돌아다니고 있는데, 그것들은 특이하게도 상처를 내면 혈액을 즉시 수급할 수 없습니다. 혈액이 대기에 노출되는 순간 빠르게 기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생포를 하자니 너무나도 위험하기 때문에 미래그룹에서 웃돈을 얹어줘도 이만큼 완벽한 샘플을 확보해줄 밀수범은 없을 겁니다."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이라 상품으로 내놨군."

    대번에 B세트의 본질을 꿰뚫어본 이진혁이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아마추어처럼 당황하면서 변명을 하진 않았다. 큰돈을 만지는 사람을 상대로 추한 변명이나 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 거래할 자격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제가 연구자금이나 연구결과에 따른 명예를 원치 않는다고 밝혔던 이유입니다. 이걸 조사하고 연구할 인력과 설비를 갖춘 미래그룹에게 팔아먹으면 끝. 팔아먹지 못하면 다른 손님들을 찾아보다가, 마지막엔 그냥 소각해버릴 겁니다. 하지만 혹시 압니까? 불확실한 미래에 반 흥미, 반 확신을 가지고 투자해서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A세트를 먼저 팔았군."

    그의 호응에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이트워커의 혈액 샘플은 나이트워커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지 못하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감이 안 잡히는 요상한 물건이다.

    하지만 이진혁이 A세트를 구매하는 것으로 나이트워커에 대한 정보를 획득했으니, 자연스럽게 나이트워커의 혈액 샘플인 B세트에도 흥미를 가질수밖에 없다.

    -대체 나이트워커가 뭐길래?!

    이런 느낌이다.

    "이건 꽝일수도 있고 당첨일수도 있지만, 최소한 독보적인 길이라는 것은 보장합니다. 이 혈액 샘플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유일합니다."

    유일하다는 표현과 독보적이라는 표현은 꽤 케미가 잘 맞는다.

    나만 가질 수 있고, 나만 씹뜯맛즐이 가능하다는 품질 보증서가 붙은 물건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법이다. 그게 아니면 왜 인류가 지상에 있을 때 오더메이드 명품이나 외제차에 환장했겠는가?

    "미래그룹은 다양성과 전문성을 모두 갖춘 국내 최고의 대기업입니다. 중공업, 화학, 생명공학, 보험, 무역, 반도체, 방산업까지.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것도 없는 게 바로 미래그룹 아닙니까? 그리고 여기에 마침 투자를 못 할 이유도 없고, 안 할 이유도 없는 상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신기술과 신제품을 만들기 위해 가볍게는 억대부터 크게는 조 단위의 돈까지 쓰는 기업이, 한 번쯤은 이 자그마한 투자 상품을 건드려보는 것도 재밌지 않겠습니까?"

    "......"

    어느새 꽁초가 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이진혁은 검은 액체가 든 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있군. 이 상품을 비싸게 파는 게 목적은 아니야. 그렇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팔면 좋고 아니면 그만인 상품입니다."

    "...우리가 연구해주고, 연구결과에 따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로드맵을 짜고,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시장에 풀리기를 원하고 있겠지."

    역시 호랑이 아래에서 개새끼는 태어나지 않는다더니.

    이진혁은 내가 교묘하게 섞은 진실과 거짓속에서 이 상품의 본질과 내 의도를 동시에 눈치챘다.

    "원하는 건...그래, 바이오테크와 밀리테크겠네. 이것에 대한 혹시 모를 감염을 막아줄 수 있는 백신이나 치료제의 개발, 그리고 이것의 원형에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무기나 장비를 원하는 거지?"

    "이걸 어떻게 연구하고, 그 연구결과를 어떻게 써먹을지는 전적으로 미래그룹의 소관입니다. 이게 제 손을 떠나면 그때부터 저는 미래그룹이 언젠가 세상에 내놓게 될 새로운 기술과 상품을 구입하려는 일개 구매자에 불과합니다."

    판매자이면서 동시에 구매자가 되기 위한 전략.

    이것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미래그룹은 싫어도 나이트워커의 혈액 샘플을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궁금해서 미칠 테니까. 연구자들또한 이 귀중한 샘플을 원해서 안달이 나겠지.

    경영자 입장에서 연구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모를리가 없을 테니 이진혁은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덤터기 쓴 기분이지만 이것도 우리쪽에서 맡지."

    내게서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이진혁은 경비원을 시켜 특수 보관용 케이스를 가져오게끔 했다.

    기업의 중진들이 기밀 자료나 중요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기 위해 종종 쓰이곤 하는 특수한 007 가방 비스무리한 것이 나왔다.

    거기에 유리병을 옮겨담은 이진혁은 지문과 홍채 인식으로만 열리게끔 이중 잠금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날카로운 인상의 비서 한 명이 들어와 가방을 넘겨받았다.

    "일단 연구소로 보내둬. 연구소장에게는 내가 따로 연락해둘 거야."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비서가 가방을 들고 나가자 이미 반 이상 털린 고객과, 마지막으로 자기 PR만 남은 판매상 한 명이 다시 서로를 마주했다.

    나는 C세트인 나 자신을 판매하기 위해 과감한 한 수를 던졌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나와 계약해서 마법재벌이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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