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59화 (59/211)
  • 지하에서(3)

    하루가 지났다.

    지상에서 3일이나 머무른 탓에 극도로 지쳐 있었던 나는 따뜻한 물로 씻고, 맛있는 밥을 먹으며,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왔을 때, 나는 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겠다고 나선 아버지와 식탁에서 마주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아침 식탁에 앉아있는 걸 보니 조금 의아하긴 했다.

    평소처럼 밥은 대충 챙겨먹고 남들보다 항상 먼저 출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늘 아침은 꽤 여유로운 태도로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딱히 그 모습이나 태도가 역겹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아버지는 이 집의 가장이고, 이 집이 유지될 수 있는 기둥이었으니까. 집에서 편하게 쉬고, 맛있는 밥을 느긋하게 즐길 자격이 있지.

    오히려 얹혀사는 입장인 내가 굴러들어온 돌처럼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인 거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고.

    하지만 오늘부터는 아니다.

    "이거 받으시죠."

    나는 매끄러운 식탁 너머로 USB를 툭 밀었다. 주르륵 미끄러져 아버지의 앞에 도달한 USB는 정확히 그 앞에서 멈췄다.

    누군가 이런 내 행동을 봤더라면 밥상머리 교육이 형편없다느니, 예의따윈 밥 말아먹었다느니 온갖 욕설을 내뱉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수그리는 단계였지만, 저 USB를 넘긴 시점에서 나는 아버지와 동등한 관계가 되었으니까.

    이제와서 우리가 유교정신에 기반한 예의범절이나 따지는 화목한 부자지간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묵묵히 USB를 받아 챙기셨다.

    내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지저 도시에 들어오게 된 순간부터, 목숨값을 갚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직일 거란 사실쯤은 당연히 알고 계셨을 테니까. 그렇게 가르치셨고, 그렇게 배웠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내 채무 이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래도 염치는 있구나.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제멋대로 집을 뛰쳐나갔을 때보다는 나아졌으니."

    "빚이란 건 원래 늦게 갚을수록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잖아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그렇게 불어난 이자를 이용해서 채무자를 노골적으로 등쳐먹으려는 족속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고요. 어른이 되기 전까지의 저를 키워주신 은혜는 차차 효도로 돌려드릴게요."

    내 당돌한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USB를 품에 갈무리했다.

    나는 정확히 내 목숨값에 상응하는 정보를 USB에 담았고, 아버지는 USB에 그만한 정보가 담겨있으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스꽝스럽게도 이런 쪽으로는 거래가 확실하다는 걸 서로 인지하고 있는 거다. 정말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입장이 어울리지 않는 관계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떡할 테냐? 지금처럼 되바라진 것들과 어울려다니고, 몹쓸 짓을 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할 셈이냐?"

    "능력있는 아버지 덕분에 HR 직급으로 내려와보니 시야가 탁 트이더라고요. 지저 도시의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차지하는 HR 직급들 사이에서 일해보니 제 진로에 대한 방향성이나 향후 지저 도시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았어요."

    "지저 도시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고 강력한 집단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장소다. 일개 개인따위가 미래를 예측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하물며 가장 밑바닥의 개인이어서야...주식의 흐름에 휩쓸리는 개미만도 못 하다."

    "너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어요. 제가 너무 낮은 곳에 있으면서 높은 곳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요. 정 궁금하시면 한 번 내려오셔도 괜찮아요. 제가 가이드 역할 정도는 해드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서라. 제 몸 하나 간수못하는 녀석의 가이드를 받아서야 시야가 편협해질 뿐이다. 그 좁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네가 보고 있는 것의 일부를 전체라고 생각한다면 머지않아 큰코 다칠 거다."

    좁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일부만 보고 전체라고 생각한다라...확실히 가장 높은 위치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찌개를 한숟갈 떠먹으며 말했다.

    "일부가 뭉치면 그게 전체가 된다는 것도 아셔야죠."

    "그렇게 뭉칠 수 있다면 처음부터 일부가 되지도 않았겠지."

    "누구보다 결과론을 좋아하시잖아요? 결과가 나오면 그때 다시 말하죠."

    나는 이미 북부 지구의 결합을 이끌어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도, 무력을 가진 군인도, 재력을 가진 기업인도 아닌, 그저 어두컴컴한 지하 밑바닥에서 유일하게 불씨를 피워올릴 수 있는 한 명의 밀수범으로서.

    서부 지구와 중앙 지구는 정부의 철저한 관리하에 놓여있으니 접근하기 힘들지만, 정치인들에게 줄을 대기 시작하면 조금씩 희망이 보일 것이다. 상류층과 그들을 지키는 군 부대가 자리잡고 있는 남부 지구도 차근차근 접근하면서 북부 지구처럼 밀수의 달콤한 꿀에 중독시키고 있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에는 해낼 것이다.

    거기에 나는 이미 동부지구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디그러쉬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미래그룹에게 떡밥을 뿌려둔 상태다. 저들이 이미 떡밥에 반응했으며 나와 거래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 순간, 동부 지구에도 틈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

    마침내 모든 지구를 장악했을 때, 모든 일부가 하나로 뭉쳐 전체가 되었을 때.

    그때도 아버지는 내게 전체를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이라고 비아냥댈 수 있을까?

    "잘 먹었습니다.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저도 먹고 살려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하잖아요?"

    식사를 끝마친 나는 표정이 굳어있던 어머니에게 포옹을 해드린 뒤 그릇을 정리하고 먼저 일어섰다. 부엌을 나가면서 여동생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도 나는 더이상 '일부'가 아니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래그룹 산하 미래테크의 차세대 장비 개발부서 1팀장 이용호가 회사 입구에서부터 나를 반겨주었다.

    지난 번까지만 해도 나와 대등한 입장이었던 그는, 이제 내게 연신 굽신거리며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미래그룹의 유능한 인재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째서 나같은 밀수범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느냐고?

    '내가 가져온 정보가 잘 먹힌 모양이군.'

    당연하지만 저들도 사람을 풀어 내가 정확히 뭘 하는 사람인지 다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몸값을 낮추기 위해 나처럼 지상을 수차례 오간 사람들로부터 지상의 정보를 사들이려 시도했겠지.

    결과는 영 좋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제가 드렸던 자료가 거짓인지 참인지는 확인해보셨나요?"

    "전문가들을 동원해 확인해본 결과 모두 조작된 흔적이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해서, 저희 본부장님께서 직접 만나뵙고자 미팅을 제안하신 겁니다."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미래그룹의 실질적인 직계나 다름없으며 동부 지구에서 연구소와 공장, 사옥까지 모두 보유하고 있는 미래테크의 본부장급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먼저' 미팅을 제안했다.

    이제 내 몸값은 대기업의 시선에서 바라봐도 중간관리직급에서 임원급까지 올라갔다는 의미다.

    '고비를 넘다보면 언젠가는 그룹 총수와 대면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그룹 총수와 독대할 수 있는 위치. 그 자리는 어지간한 정치인도 쉽게 올라갈 수 없는 자리다.

    우선은 본부장과의 미팅을 위해 이용호 팀장의 안내를 받아 사옥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꽤 높이 올라가자, 곧 본부장의 개인 집무실로 배정된 플로어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이 탐지기를 갖다대거나 손으로 직접 몸을 훑으면서 몸수색을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내 가방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실례지만 이건 뭡니까?"

    종이로 잘 감싼 묵직한 유리병을 꺼내보이는 경비원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 본부장님이 받으면 대박을 터뜨리고, 안 받으면 모가지 날아가는 상품이요."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다소 과격한 표현에 경비원들의 인상이 굳어졌지만, 그렇다고해서 본부장에게 내보일 상품을 저들이 멋대로 압수하거나 개봉할 수도 없었다.

    본부장의 손님인 내가 상품이라고 주장하는데 저들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좋습니다. 대신 본부장님의 안전을 위해 경비원 두 명이 상시 동행하게 될 겁니다."

    "상관없어요."

    내가 덤덤하게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곧 몸수색을 끝낸 경비원들이 나와 함께 본부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자신의 업무용 책상 앞에서 스마트 글라스를 펼쳐놓고 CCTV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진형 본부장은, 내가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휴, 강심장도 이런 강심장이 없으셔. 미래테크 지저 도시 본부장 이진혁입니다."

    "북부 지구에서 정보 및 물자 수집을 담당하고 있는 박한성입니다."

    아버지에게 빚을 갚은 나는 더이상 스스로를 박한화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훤칠한 키, 조금 슬렌더한 체격,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인상의 미남은 현 미래그룹 총수의 손자였다.

    우스갯소리로 툭하면 본부장이나 실장 자리를 맡게 되는 재벌 3세가 내 앞에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좋은 의도가 담겨있든 그렇지 않든, 첫 단추는 잘 꿰고싶어하는 것 같아서 나도 웃으며 악수를 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재벌 3세. 나와 마찬가지로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집안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아왔을 것이고,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은 불타는 야망을 차가운 가슴 속에 감춰두고 있는 인물이겠지.

    가볍게 통성명을 끝낸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양 접객용 테이블을 마주보고 각자의 소파에 앉았다.

    두 명의 경비원은 총을 든채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허튼 짓을 하면 즉시 대응하겠다는 시선이 강렬해서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VIP를 지키는 사람들씩이나 되면 타 기업이나 정치인에게 포섭되지 않을 만큼 충성심이 강한 자들일테니, 이진혁 역시 그들을 굳이 바깥으로 내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에 대한 은연중의 무력시위일수도 있고.

    어느쪽이든 상관없었기에 나는 미리 준비해둔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USB 2개, 종이로 잘 감싼 유리병 하나, 그리고 HR 직급이 새겨져 있는 내 신분증.

    "서로 불필요한 말이나 하면서 아까운 시간 잡아먹는 건 아쉬울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박한화의 아들 박한성이 아니다. 하물며 범죄조직 차도식파의 에이스 박한성도 아니고, 중장갑수색대 출신 박한성도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저 한 명의 세일즈맨(Salesman)일 뿐이다.

    "제가 손님께 소개해드릴 상품은 총 3개입니다. 정보만 담긴 A 세트, 정보와 함께 중요한 비밀이 담겨있는 B세트, 정보와 중요한 비밀, 그리고 나라는 인재의 조력까지 얻을 수 있는 C세트."

    약팔이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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