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확장(2)
노원역에서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것, 그리고 잠시 불안정한 상태였던 노원역을 다시 정상화하는 작업을 도우면서 밀수조직의 5회째 지상 작전을 기다렸다.
수십만 명이 지저 도시로 숨어든지 정확히 16일째 되는 날이었다.
김명호 일행과 랑데뷰 포인트에서 만나기 전, 최준석에게는 내 진짜 이름이 박한성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이끄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가능하면 차도식파를 직접 노원역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차도식파와 내가 먼저 말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생략하기로 했다.
최준석은 노원역 지하 3층에 비치해둔 군용 무전기 중 하나를 기꺼이 양도해주었다. 그때 서로의 원활한 연락을 위해 별도의 채널을 정해둔 것은 덤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기존의 내 장비를 모두 돌려받고, 군용 무전기까지 챙겨서 노원역을 벗어나자 한시름 덜었다.
노원역의 주축은 이제 늙은 꼰대들이 아니라 젊은 청년들로 바뀌었다. 덕분에 아직 순진한 면이 남아있는 그들은 나를 의심하기보다 노원역 정화를 도와준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지상작전에서의 내 성과는 단순히 전초기지를 얻은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생존자 그룹에게 '박한성' 이라는 사람을 각인시켜준 것은 물론이요, 내가 지상 복구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좋은 인식(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생존자 그룹의 규모가 커지고, 입소문이 탈수록 지상에서 내 이름을 알게 되는 사람도 많아지겠지.
그러다보면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품을 것이다.
-최소한 '그 사람'이라면 이런 위험천만한 시대에도 믿고 거래할 수 있지 않을까?
'입소문이란 건 무섭지.'
아파트단지 근처에서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이 입소문을 조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입소문이란 건 원래 팩트 필터를 거치지 않고 전파되는 법이라, 일단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당장 지저도시에서의 박한성만 놓고봐도 그렇다.
부유층이 거주하고있는 남부 지구에서의 박한성은 성실하고 예의바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서민층이 거주하고 있는 북부 지구에서의 박한성은 능력있는 밀수범이며, 동시에 차도식파를 단숨에 밀수조직 1위로 끌어올려준 에이스 취급을 받는다.
만약 내가 공포와 폭력으로 노원역을 무력점거했다면 나에 대한 입소문은 '지상의 생존자들을 핍박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자'로 알려졌겠지. 그래서 목숨까지 걸어가며 노원역 생존자 그룹을 도와준 거다.
왜냐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목숨, 평판, 재산, 명예, 온갖 칩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꽤 가치있는 자산이다. 그러니 얻어야 한다.
가치있는 것일수록 내가 가져야만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다들 이미 모여있군."
지정된 랑데뷰 포인트로 향하자, 그곳에는 불을 끈채 대기중인 차도식파 조직원들이 있었다. 야투경으로 내가 오는 것을 확인했는지 다들 우르르 달려나왔다.
"역시 무사하셨습니까. 다행입니다!"
"고작 3일 못 봤는데 뭘요."
가장 먼저 달려온 김명호와 악수를 한 번 하고, 나를 걱정해주는 다른 조직원들에게도 괜찮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얘기를 듣자하니 그들은 4회째 작전 당일, 내가 끝내 랑데뷰 포인트로 오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고 철수했다고 한다. 물론 그와중에 주변 아파트단지와 약국을 털면서 물자도 확보했기에 손해 본 것은 없었다.
나는 차도식파 조직원들에게 지난 3일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며, 우리 조직이 가장 먼저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전초기지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짧은 시간만에 생존자 그룹과 접촉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다니......"
"좀 빡세게 일하긴 했죠. 대신 차도식파 조직원들은 모두 군인으로 소개했으니 다같이 말을 맞춰야 해요. 노원역에 방문할 때는 밀수조직이 아니라 군 부대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얘기죠."
"저희 애들 전부 군필입니다. 미리 말만 맞춰두면 군인 행세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겁니다."
전직 조폭이라 군필 비율이 적을거라 생각했는데 상당히 의외였다. 내가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자 김명호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게...도식이 형님이 지상에 있을 때 조직원을 받는 조건중 하나를 군필로 정해서 그렇습니다. 조직내에서 상명하복을 철저하게 지키고, 책임감있는 사람을 뽑으려면 군필인 게 낫다고 해서 말입니다."
"조폭치고 상당히 인텔리한 조폭이었네요."
"그래서 차도식파는 지상에 있을 때도 조직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기반은 탄탄한 조직이었습니다."
"예, 지금 보니 그런 것 같네요."
진짜 쌩양아치 놈들은 아직 민증도 안 나온 놈들을 시켜 범죄를 저지르게 해서 앞길을 막는데, 차도식파는 비록 근본이 썩어빠진 양아치였다고 해도 지킬 건 지키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무사히 차도식파와 합류한 나는 복귀하는 길에 주변 아파트단지를 털었다.
이 근방에 아파트단지가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이미 노원역 인근을 차도식파 나와바리로 인식한 다른 조직들이 이쪽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멀쩡한 물자가 제법 많았다.
김명호가 대기조와 운반조를 모두 끌고 왔기 때문에 오늘은 물자 회수가 끝나면 6시간만에 바로 복귀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 역시 동감이었다.
"복귀하기 전에 잠깐 쉬죠. 차도식파 전원에게 공유해야할 정보가 좀 있습니다."
노원구에서 도봉구로 돌아온 우리는 이미 밀수조직들에 의해 싹 털린 홈플러스 지하 주차장에 모여 앉았다.
밀수조직이 최소 3번 이상 방문한 건물은 안전을 위해 내부 점검을 싹 하기 때문에 건물에 숨어있는 괴물이나 생존자의 유무는 철저하게 파악해둔다.
괴물이 있으면 다같이 불빛을 비춰 때려잡는다. 당연하지만 괴물이 확인된 건물은 암묵적으로 생존자의 유무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밀수조직은 야외에서 불을 피울 수 없었기 때문에(격벽 제외) 잠시 휴식하고자 할때는 반드시 특정 건물의 지하층을 이용하곤 했다.
우선 장작으로 쓸만한 것들을 모아 적당히 기름을 붓고 불을 지폈다. 즉석 모닥불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냉기만이 감돌고 있던 지하주차장에 서서히 온기가 퍼지자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정보 공유 시간이라고 한 만큼, 제가 지난 3일간 정리한 정보와 차도식파가 지저 도시에서 보낸 3일간의 정보를 좀 정리하고 싶네요. 이런 시대에는 정보가 중요하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계시죠?"
내가 은근한 말투로 말하자 여기저기서 동조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난 3일간 지저 도시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대표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차도식파 내부의 일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동시에 업계 1위 차도식파의 2인자되는 사람이 알려주는 지저 도시 3일분 정보.
나는 모닥을 중앙에 두고 빙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김명호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했다.
"우선 4회째 지상 작전이 끝난 시점에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저희들은 도식이 형님께 한성 씨의 미복귀 사실을 알렸고, 다음 지상 작전에 한 번 더 랑데뷰 포인트에서 기다려 보겠다고 했습니다. 도식이 형님도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우선은 기다려보는 게 맞다는 쪽으로 동의하셨습니다. 수확한 물품중 의약품은 모두 차도식 병원으로 돌렸으며, 식료품이나 생필품, 사치품은 가치와 수량에 따라 시장에 풀거나, 일부는 저희가 보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다른 조직은 대부분 돈이 급해서 그런지 수확품 대부분을 시장에 푸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쯤되면 슬슬 꼬리가 잡혔을 것 같은데요."
"아, 정확하십니다. 저희가 개인적으로 거래하던 소수의 VIP와 군대측의 첩보에 따르면 정부에서 북부 지구의 활발한 현금 거래 정황을 포착했다고 합니다. 지난 날 까지는 지저 도시를 정비하고 대비책을 구상하느라 워낙 경황이 없어서 북부 지구를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결국 북부 지구의 활발한 시장이 저들의 귀에도 들어간 듯 했습니다."
"그렇겠죠. 오히려 2주 정도나 걸려서 눈치챘으니 지저 도시가 특수한 상황이라는 걸 감안해도 조금 느리긴 했네요."
현 지저 도시 정부는 온갖 악재가 겹쳐서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콕 집어 말하면 시민들끼리 뭔가를 거래하고, 알아서 거주지를 만들고, 자신들만의 삶을 개척하고 있는 마당에 정부가 그걸 2주동안이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바빴다.
지저 도시 전역에 공급해야할 식량이나 생필품 문제, 지저 도시로 이주한 시민들의 온전한 생활권 확보 문제, 아직 미완성 상태인 지저 도시를 완공하기 위한 개척 및 개발 문제, 지상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지저 세계에는 뭐가 존재하는지도 파악해야 하는 문제, 수많은 시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치곤 터무니없이 부족한 군 인력 문제, 어디에, 얼마나 떨어져 있을지 알 수 없는 다른 지저 도시 확인 및 교류 문제.
그 외에도 당장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총동원해도 모자랄만큼 정부는 문제의 산더미에 짓눌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았다면 아마 정부는 끝내 식물정부로 전락해, 지저 도시를 혼돈의 무법지대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정부가 마침내 북부 지구의 수상한 자금 흐름과 활발한 시장 경제를 눈치챘다.
아직 북부 지구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진 못 했겠지. 북부 지구 거주민들은 모두 한패니까.
엘리베이터 관리는 전적으로 군 부대가 맡고 있는데다, 밀수조직은 이른 새벽, 늦은 저녁에만 움직인다. 외부인이 쉽사리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조만간 조사를 위해 북부 지구에 감사를 파견할 것 같다는 게 군 측의 입장입니다. 일반 외부인이야 북부 지구 거주민들이 담합하면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지만,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감사는 막기 힘들 겁니다."
"밀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 들키지 않는다면 상관없는데...문제는 3일마다 밀수를 해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야 북부 지구가 굴러간다는 점이죠. 그 감사는 최소한 일주일 이상은 머무르지 않겠어요?"
"그래서 밀수조직들 내에서도 쉬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감사가 물러갈 때까지 밀수를 잠시 쉬는 건 둘째치고, 정부의 시선을 피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건 어려우니 말입니다."
"포인트 거래를 하면 전산 기록이 남죠. 정부에서 해당 전산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은행에게 정보를 요구할 경우 우리가 막을 방법도 없고."
나는 턱을 문지르며 지금 이 상황이 밀수조직들에게 꽤 뼈아픈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다.
우선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나마 임시방편이라고 할만한 게 하나 있는데 굉장히 복잡하고 위험하다.
그 임시방편이라는 건 쉽게 말해서 포인트 세탁이다. 물건 대금(포인트)을 여러 사람을 통해 잘게 쪼개서 운용한다면 규모가 큰 자금의 흐름을 잠시나마 감출 수 있다. 다만 결국에는 돈이 흘러들어가는 곳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금세 들통날 것이다. 오히려 이게 들통나면 확정적으로 '뭔가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지금 쓰면 안 되는 방법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우리가 가진 알량한 무력과 권력으로는 지저 도시를 다스리는 정부에 대항할 방법이 없는데. 이제와서 북부 지구가 통째로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한들, 십중팔구 제압되어 다함께 노예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왜냐하면 북부 지구는 주둔군 비율이 가장 적기 때문이다.
VIP와 주요 산업단지, 그리고 곡창지대를 지켜야 하는 서, 동, 남부 지구에 주둔군 비율이 높은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테니까.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예 은행을 포함해서 전산 서버를 관리하는 기업을 통째로 매수라도 할까? 성공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정부를 속여먹을 수 있겠지만 성공 확률은 극도로 낮다.
우선 정부의 지침 아래 지저 도시 거주민들의 포인트를 관리하는 은행, 그리고 그들에게 전산 서버 및 관리 프로그램을 대주고 있는 기업들 모두 매수가 통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는 법 때문에, 후자는 기업이 가진 거대한 덩치 때문에.
아쉽게도 우린 여전히 작은 존재들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