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52화 (52/211)
  • 동화하라(4)

    최준석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김명호가 자신에게 건넸던 장비를 챙겨 플랫폼의 어둠 속으로 슬쩍 몸을 뺐다. 그의 손에는 꾸깃꾸깃한 종이 쪽지가 하나 있었다.

    -제가 위로 올라가고 머지않아 위에서 큰 소란이 벌어지면 노원역에서 위협이 될만한 무리들이 대부분 빠져나갈 겁니다. 그 틈에 중대장을 제압하고 노원역을 무력점거하세요. 제 배낭에 필요한 물건이 있을 겁니다.

    "허...이런 미친 놈을 봤나."

    고작해야 1일차. 시간으로 치면 만난 지 24시간도 안 된 놈이다.

    그래도 좀 싹싹해보이는 구석이 있어서 저 기괴한 검은 무리에게 물들지 않도록 나름 신경써주려 했건만, 결국 검은 무리에게 낙점되어 끌려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대뜸 헤어지는 게 아쉽다며 악수를 건네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알릴 줄이야.

    최준석이 이 노원역에 동화되어 순응한 인간이라면 이미 내부고발로 김명호를 팔아넘기고 소소한 이득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준석은 달랐다. 노원역에서 머무른지 10일이나 됐지만 여전히 저 검은 무리와는 상종하고 싶지 않으며, 그들을 두둔하는 사람들과도 친분을 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적인 인간이었기에.

    이성적인 인간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타당한 근거를 명분으로 의심하며,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 의혹을 경계하는 법이다.

    최준석은 쪽지에 쓰인대로 우선 김명호의 배낭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개인이 짊어지고 다니기엔 조금 크고 펑퍼짐해보이는 배낭 속에는 대량의 탄약과 식수, 식량, 그리고 군용 야투경이 들어 있었다.

    어디서 난 것들이지? 지하 3층에서 훔쳐온 건가?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도 최준석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이 구석진 공간은 최준석이 종종 농땡이를 피울 때 사용하는 비밀 공간이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들킨 적 없고, 실제로 그것을 증명하듯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총이 같은 모델이라 탄창이 호환되니까...다 합치면 210발이네.'

    경계 근무조는 흑심을 품을 것을 우려해 30발들이 탄창을 딱 하나만 지급받는다. 고작 30발로 반란이라도 일으키려 했다간 되레 벌집이 될테니 알아서 처신 잘 하라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배낭을 넘겨받은 것으로 무려 30발들이 탄창 6개나 확보한 상황이다. 이쯤되면 김명호가 미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노원역을 노리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탄약과 함께 딸려나오는 식수, 식량, 그리고 군용 야투경.

    우선 식수는 특정 브랜드의 보온병에 1L씩, 총 2개가 담겨 있었다. 이 브랜드의 보온병을 사용하는 사람은 노원역 내에서 본 적 없다. 애초에 누구도 보온병을 사용하지 않는다.

    '보온병을 들고다녀야 할 만큼 바깥에서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예외적으로 버스에서 근무하는 초병들도 버스 내부에서 가스 버너와 코펠을 이용해 음식이나 물을 데워 먹는다. 즉 김명호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바깥을 돌아다녔던 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기야 처음 볼 때부터 두툼한 옷차림에 외골격 파츠까지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본인은 엑소스켈레톤 정비소에서 대충 주워온 것이라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예 작정하고 바깥으로 나온 사람의 복장이었다.

    철저하게 무장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신을 감추고, 딱봐도 수상쩍은 무리들이 득시글 거리는 노원역에 굳이 침투한 이유.

    최준석은 직감적으로 김명호에게 '전초기지'와 '동료'가 있음을 눈치챘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넘어갔지만, 김명호의 옷차림은 바깥에서 개고생을 한 것치곤 너무나도 깨끗했으며, 잘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도 아니었다. 그리고 혼자 헤매다 노원역으로 기어들어온 것 치곤 너무나도 안정적으로 보이는 정신상태.

    '노원역에 몸을 의탁하려고 방문한 게 아니라, 노원역 내부를 살피기 위해서 접근한 거였군.'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지자 최준석은 군용 야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쪽지에 적힌대로 큰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것을 검은 무리의 위험 신호로 받아들인 열렬한 신도들이 우르르 몰려나갈 것이다. 무기를 꼬나쥐고.

    그렇게 되면 노원역에 남는 것은 최준석처럼 검은 무리에 동화되지 않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인간들, 혹은 중대장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정의로운 군인들만 남게될 터.

    설령 노원역에 위험 분자가 좀 남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최준석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것도 결국 쪽지에 적힌대로 일이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가 관건인데.'

    일이 터지지 않는다면 계획 자체가 수포로 돌아갔거나, 반대로 김명호가 자신을 내부고발하기 위해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있으니 평소처럼 행동하면 된다.

    하지만 정말로 일이 터진다면......

    "야 씨발! 지금 무기들고 있는 사람 다 따라와!!"

    "뭐야? 무슨 일인데?"

    "오늘 대모님께 선택받아서 성역에 들어간 그 새끼! 그 새끼가 총을 숨기고 들어갔었어! 지금 총을 쐈다고!!"

    "미친!"

    "야 빨리 아래에 알려! 다 같이 가야 해!"

    "그래! 대모님이 위험하시다고 씨발!!"

    "......"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일이 터졌다.

    '뭐지? 진짜 뒷감당 생각도 안하고 일을 벌인 건가? 아니면 뒷감당이 되니까 자신만만하게 일을 벌인 건가?!'

    최준석은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곧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걸 알았다.

    검은 무리의 신변에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역 내부에 퍼지자마자 동조자들이 우르르 들고 일어섰다.

    저마다 쌍욕과 고함을 내지르며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고, 노원역 내부 관리따윈 개나 주라는 듯 너나할 것 없이 지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지난 10일간 검은 무리에 동조하는 자들로부터 노골적인 견제나 위협을 당하고 있던 최준석은 그들의 얼굴을 모두 외워두고 있었다. 정말로 참을 수 없게 됐을 때, 탄약 30발을 쏟아부어서라도 길동무로 삼아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부지리의 기회를 줘서 고맙다.'

    야투경을 이마에 걸친 최준석은 소총 탄창을 모두 꺼내서 점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이윽고 모든 소란의 원흉들이 지상으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최준석은 즉시 지하 2층으로 뛰어들어갔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광원을 모두 지워없애는 것.

    타탕! 탕! 타타타!

    헤드램프, 알전구, LED 조명등 같은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박살낸 그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야투경을 착용했다.

    "꺄아아아악! 대체 뭐야?!"

    "뭐, 뭔데! 왜 갑자기 여기서 총질인데?!"

    "어떤 미친 새끼야!!"

    겁에 질려 어둠 속에서 웅크린 사람들을 찬찬히 훑은 최준석은 기억해둔 얼굴 몇 명을 발견하고 즉시 총을 쏴갈겼다.

    지난 10일동안 저 역겨운 종자들이 검은 무리에게 빌붙으며 어떤 짓을 했는지, 경계조인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좆같은 내부고발자 새끼들!!'

    힘없고 나약한 자들을 이유없는 비난으로 몰아세워 불쌍한 희생양으로 만들고, 그들을 내부고발해서 검은 무리에게 갖다바친 개같은 놈들!

    쥐새끼 같은 내부고발자들을 하나씩 처리하며 빠르게 움직인 최준석은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들고 움직이는 군인 무리를 발견했다.

    '군인들은 대부분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이라 소위 말하는 '꼰대'에게 통제받는 것을 짜증내기도 했을 뿐더러, 전역도 못 하고 계속 군 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더없는 스트레스였다.

    검은 무리와 그 신도들이 악에 해당한다면 군인들은 중립이었다. 누구도 지지하지 않지만, 이 개같은 상황이 이어질수록 스트레스만 받는 불쌍한 무리들.

    해서, 최준석은 군인들과 맞붙는 대신 회유를 택했다.

    "야 군바리들! 나 최준석이다!!"

    "최준석 씨?!"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총은 대체 누가 쏜......!"

    솔직히 만난 지 만 하루밖에 안 된 그 놈의 말을 100% 신용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처음부터 수상한 외지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김명호가 이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알려주고, 자신을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게 했다고 한들 최준석은 여기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김명호라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자신이 검은 무리를 상대로 먼저 총기난사를 벌였을 테니까.

    노원역에서의 삶은 끝내 놈들에게 순응하여 동화되느냐, 혹은 동화되길 거부하고 미치느냐의 선택지밖에 없는 지옥 그 자체였다.

    "지금 다른 생존자 그룹이 그 검은 놈들이랑 광신자 새끼들을 습격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제안 하나 하겠다! 이제 우리도 이 좆같은 짓거리 그만두고 사람답게 살자!!"

    사람답게 살자.

    그 한 마디가 어찌나 하고 싶었던지.

    어린아이가 놈들에게 끌려갈 때도, 죄없는 부부가 놈들에게 끌려갈 때도, 검은 무리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마귀에 홀린 놈들이라며 면전에서 악담을 받을 때도 결코 내뱉을 수 없었던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루라도 더 연명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한 명을 버리고, 다시 하루를 버티고, 다시 한 명을 버리고.

    그런 생활이 계속 될 때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시시콜콜한 불평불만을 내뱉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최준석은 사람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일지언정 억압받는 동물이 아니다. 무조건 나쁜 놈들에게 굴복하란 법이 있는가? 놈들에게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없는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김명호가 일을 벌였고, 최준석이 체스판의 말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람을 규합해서 놈들을 완전히 배제해야 해!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아니면 너희들은 평생 소령 진급도 못한 병신이랑 그 미치광이들 뒷구멍이나 닦아주며 살거냐?!"

    이쯤되면 군인들도 짐작했을 것이다.

    노원역 내부에서 총을 쏜 건 최준석 뿐이고, 정말로 최준석 외에 무기를 든 광신도들이 죄다 지상으로 뛰쳐나갔음을.

    "뭐하는 거야 이 굼벵이 새끼들아! 지금 난리가 터졌는데 여기서 왜 어물쩡거리고 있어!!"

    그때 이 모든 사태의 원흉, 노원역에서 검은 무리의 행패를 용납하고 알량한 권력에 취해있던 중대장이 지하 3층에서 뛰어올라왔다.

    "그리고 최준석! 너 이 호로새끼! 내가 너 처음부터 알아봤어 이 좆만한 새끼야! 이젠 하다하다 반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서 애들 선동까지 하고 있냐? 이 추잡한 새끼! 너희들도 가만 있지 말고 얼른 가서 저 새끼 잡아와!!"

    최준석은 침묵을 유지했다. 군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중대장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내 말 안들려 이 병신 새끼들아! 당장 저 새끼부터 잡아오라고! 명령이 명령같지 않아?!"

    "거 자꾸 새끼새끼 거리지 맙시다."

    "뭐, 뭐?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새끼새끼 거리지 말라고 씨발 새끼야."

    어둠 속 기둥 뒤에서 슬쩍 고개를 내민 최준석은 군인들의 총구가 중대장에게 향한 것을 확인했다.

    "전역 못하고 뺑이치는 것도 좆같은데 부려먹기는 존나게 부려먹고, 뭔 이상한 사이비 종교 새끼들까지 들여와서 행패 부리는 것도 내버려두고, 솔직히 네가 군인이냐 씨발놈아?"

    "맞아. 병사는 사람도 아니냐? 쳐먹는 건 제일 많이 쳐먹고,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돼지같은 새끼가 뒤질라고."

    "그리고 알아보긴 뭘 알아봐 좆같은 새끼야. 우린 네가 그 역겨운 새끼들이랑 어울릴 때부터 알아봤는데."

    "아, 아니 나는......!"

    "내가 맨날 네 뒤통수 깔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거 몰랐지? 이 씨발 놈아!"

    빠악!

    급기야 누군가가 개머리판으로 중대장의 뒤통수를 까버린 것을 기점으로 무차별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역시 파릇파릇한 20대 초반 군인들은 이 강압적이면서도 불쾌한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사격에 의해 중대장의 머리통이 터지고, 군인들이 환호성을 내지를 때, 김명호가 기획하고 최준석이 실행으로 옮긴 노원역 쿠데타가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