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50화 (50/211)
  • 동화하라(2)

    (노이즈) (자동음질조정) (자동화질조정)

    나는 손쉽게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스마트글라스 지도를 펼쳐들었다. 국정원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군사 첩보 위성으로 전달받은 정보에 의하면 이곳이 17번째 땅굴 입구다.

    손을 들어 분대원들을 정지시키고 땅굴 입구 주변을 확인했다.

    -기온 체크부터 한다.

    -주변 기온 정상. 동굴 입구에서부터 기온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브리핑 받은 내용대로입니다.

    -박뱀, 우리가 찾던 게 맞습니까?

    -GPS 정보랑 대조해보니 맞는 것 같다. 다들 헤드램프, 엑소스켈레톤 배터리 잔량 확인해.

    시선을 돌려 손목시계처럼 부착된 배터리 잔량표시기를 확인해보니 아직 80%로 넉넉했다. 한 번 완충하면 최대 50시간 정도 기동할 수 있게끔 특수 제작했다더니, 과연 맞는 말이었다.

    잠수함을 통해 함흥 해안 구역에 기습 상륙한 우리는 벌써 10시간 가까이 이동중이었으니까. 되돌아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번 땅굴 수색은 넉넉잡아도 25시간, 얼추 하루 안에 끝내야 한다.

    나는 땅굴 입구 앞에 쪼그려 앉아 군용 랩톱을 두들기고 있는 김■■상병에게 넌지시 물었다. 녀석의 앞에는 금속 봉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위치 송수신기 설치 다 했냐?"

    -예. 이제 막 끝났습니다.

    -좋아, 다들 타이머 맞춘다. 작전 허용 시간은 최대 25시간. 주사도 지금 투여한다.

    내 명령에 다들 주사 바늘이 달리지 않은 스마트주사기를 팔뚝에 갖다댔다. 칙! 칙! 하고 연이어 울려퍼지는 압축분사액 소음에 언제나처럼 다들 입을 다물었다.

    -선두는 내가, 최후미는 ■■이 네가 맡는다.

    -아 또 접니까 박뱀.

    -너 지난 번 땅굴 수색에서 앞서나가다 사고칠 뻔 했잖아. 기억 안나?

    -기억 안 납니다.

    생각해보니 나도 기억 안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원래 짬질은 있는 이유 없는 이유 다 만들어내서라도 하는 거다.

    (자동음질조정) (자동화질조정)

    -내부 기온 영하 27도입니다.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아오, 고글좀 제대로 만들지 병신새끼들......

    -K-방산비리 맛이 어떠십니까 박뱀?

    (자동음질조정) (자동화질조정)

    -착굴 기계 발견했습니다.

    -이새끼들 작정하고 판 것 같습니다.

    -내부 구조가 굉장히 넓은데. 대체 뭐하려고 이만한 규모의 땅굴을 판 거지? 여기서 핵실험이라도 하려고 했던 건가?

    -가이거 계수기는 반응 없습니다.

    -아직 초입이라 그럴 수도 있어. 가이거 계수기 분 단위로 계속 체크해.

    (노이즈) (소음)

    -박 병장님 방금 보셨습니까?

    -아무것도 못 봤는데.

    -저기 '1 숙소' 라고 쓰여있는 복도 말입니다. 아까 누가 서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몸이 허해서 헛것이라도 보냐? 돌아가면 몸에 좋은 냉동이라도 좀 사줄까?

    -저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노이즈)

    -박뱀. 이것좀 보십쇼. 누가 벽에 이상한 점 같은 걸 찍어놨습니다.

    -그딴 거 볼 시간 없어. 우리 지금 얼마나 내려왔냐?

    -361m 입니다.

    -미친 새끼들이 대체 땅밑에 뭘 만들어놓은 거야.

    -박 병장님 여기 진짜 뭔가 있습니다......

    -헛소리 그만하고 계속 움직인다. 이거 다 둘러보려면 25시간도 부족해.

    (노이즈)

    -끝이...안보이...

    -기계랑...야광봉 연결...떨어...체크

    -깊이가...얼마나...

    -...12km.

    -뭐가...올라오고 있......

    "그게 뭔데?"

    "뭐긴 뭐야. 네 사수님이 들고오신 아침밥이지."

    이런 곳에서도 곤히 자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운 사수 최준석이 대뜸 생수 한 병과 통조림 한 캔을 내밀었다.

    "들어온지 고작 하루된 놈이 어제 그런 일을 겪고도 용케 꿀잠을 자네, 조심성이 없는 거냐 아니면 겁이 없는 거냐?"

    "흐으으으으함. 제가 원래 적응력이 좀 남다릅니다."

    "여기서 그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인마."

    "저같은 놈 죽여서 뭐가 남겟습니까. 웃차!"

    나는 잠에서 깨면 바로 활력을 되찾는 아침형 인간이라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조림은 데리야끼 소스가 일품인 고기 통조림이었는데, 공용 식당에서 나눠주는 꿀꿀이죽 같은 것보단 훨씬 더 괜찮아보였다.

    "그래서 아침 먹으면 바로 근무 들어가는 겁니까?"

    "오전은 어제처럼 나랑 경계 근무 서고, 오후에는 너만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배치표에서 빼더라. 말 안 해도 대충 짐작은 가지?"

    "제가 준비된 사람이니 어쨌다느니 하던 거요?"

    "그래. 추측컨대 너도 그 양반들처럼 검은 옷 입고 기차놀이 해야할 수도 있어. 아니, 그렇게 될 거다."

    플랫폼 공용 벤치에 앉아 통조림을 대충 까먹던 나는 최준석의 말에서 정보를 하나 잡아냈다.

    "이전에도 그렇게 된 사람을 이미 보셨나 봅니다?"

    "나도 여기에 들어온 지 10일밖에 안 됐지만 저 양반들은 내가 오기 전부터 이미 사이좋게 기차놀이를 하고 있었어. 몰래 얘기 들어보니 사태 당일부터 노원역에서 죽치고 있었다던데?"

    "노원역 규모가 워낙 커서 피신온 사람이 제법 많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생각만큼 많아 보이지 않는데요."

    "당연하지. 저 양반들이랑 어울리기 싫어서 제 발로 걸어나가거나 쫓겨난 사람들이 몇 명인데."

    제 발로 걸어나간 사람들은 저 수상쩍은 검은 무리에게서 불길한 무언가를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건 반대로 말하자면 노원역과 롯데백화점이라는 요충지를 버리면서까지 저것들이랑 같이 어울리기 싫었다는 얘긴데.'

    갑작스럽게 지상에 불어닥친 혹한과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야 했을 만큼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 내가 그 불편함을 직접 겪게 될지도 모르지.'

    그건 어떤 종류의 불편함일까? 정신적? 육체적? 혹은 영혼이라는 이름의 추상적인 정체성?

    어느쪽이든 조금도 기대되지 않지만, 지상에는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

    지상의 생존자들또한 우리와 같은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고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가? 3일에 한 번씩만 지상을 나오는 우리와 달리 매일 지상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혹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위협에 대처하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가?

    그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될 곳은 깊은 심연인지 아득한 천상인지.

    궁금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정보의 우위에 서기 위해서라면 다소의 리스크를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웠으니까.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 이를 악물고 그런 리스크를 감내하면 언제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일하기 전에 잠깐 화장실부터 다녀오겠습니다."

    화장실로 들어온 나는 문을 닫고 무장을 재차 점검했다.

    두툼한 카고 바지 아래에는 정강이에 가죽벨트로 고정시켜둔 군용 대검이 각각 한 자루씩, 총 두 자루가 있었다.

    허리춤에는 작은 파우치로 위장한 홀스터에 권총을 끼워뒀고, 패딩 안주머니에는 언제라도 뽑아서 던질 수 있는 야광봉과 연막신호탄이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누가 내 몸을 건드린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혹시라도 누가 내 몸을 건드렸다면 조금전처럼 바로 반응해서 일어났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점검을 끝마치고 화장실을 나가기 직전, 나는 문득 거울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존나 양심없게 잘 생겼네."

    딱봐도 여자 여럿 울리고 다닐 것 같은 얼굴이다. 한 번 보면 절대로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나르시즘에 빠져있던 나는 곧 화장실을 나와 최준석과 합류했다.

    어제처럼 별 다를 것 없는 경계 근무를 시작하려던 그때, 어제 봤던 검은 무리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이쪽의 준비가 끝났으니 김명호님 께서는 조속히 무기를 반납하고 롯데백화점으로 합류해달라는 전언입니다."

    "...언제는 오후라더니?"

    내가 나서기도 전에 최준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지만, 키가 작은 검은 무리의 일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제 3자가 보기엔 마치 왕따를 시키듯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내가 느끼는 것은 조금 달랐는데, 그는 최준석의 대답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최준석의 말따위는 들리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보통 최준석 같은 사람이 짜증을 내며 과하게 반응하면 상대적으로 '갑' 위치에 있는 검은 무리의 일원이 주의를 주거나 정색이라도 할 법 한데, 그런 기색을 눈곱만큼도 읽어낼 수 없었다.

    반투명한 검은 면사포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저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였다.

    "...좋습니다. 준비가 됐다면 바로 가야겠죠."

    나는 그가 직접 보는 앞에서 배낭을 벗고, 소총과 탄창까지 모두 꺼내서 최준석에게 넘겨주었다. 최준석과는 짧은 만남만에 헤어지는 것 같아 괜히 아쉬워서 악수도 했다.

    악수를 건네받은 최준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허리를 숙여 그가 보는 앞에서 내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모든 무장을 해제하자 검은 무리의 일원이 나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설마 이 엄동설한에 옷까지 싹 벗겨내서 검은 옷으로 갈아입히는 건 아닌가 싶어 살짝 걱정했지만, 막상 옷까지 벗길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어제 봤던 것처럼 눈앞의 안내자를 따라 롯데백화점 입구 앞으로 향했다. 바깥으로 나오니 맹렬한 추위와 바람 때문에 지독한 악취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만약 노원역에서 조금만 더 오래 머물렀다면 십중팔구 쥐꼬리만한 아침 식사까지 토했으리라.

    장벽처럼 세워놓은 버스 앞에 다가선 안내자는 양팔로 크게 호를 그리며 낯익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밤입니다 형제님들."

    "그 친구가 오늘 세례 후보자입니까? 저희는 처음 보는 친구인 것 같습니다만."

    "어제 우리와 합류한 형제님이십니다. 또한 형제님의 세례성사는 대모님께서 직접 결정하신 만큼 서둘러야 합니다. 이제 문을 열어주시지요."

    "...알겠습니다."

    버스 안에서 바깥을 지켜보고 있던 초병들은 작게 열어둔 창문 틈새로 얘기하더니, 곧 수동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버스 안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을 읽으려 했지만, 정작 그들은 철저하게 창밖만 주시하며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뭔가 있군.'

    버스를 지키는 초병들이라면 이곳을 자주 오가는 검은 무리, 그리고 나처럼 후보로 지정된 사람들을 많이 봐왔을 터. 그들은 노원역 내부에서만 머무르는 사람들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은 이쪽에만 집중하자.'

    나는 마침내 노원역의 모든 비밀을 담고 있을 롯데백화점 노원점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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