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9화 (49/211)
  • 동화하라(1)

    무명은 디그러쉬가 사옥을 세운 국가라면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은 모두 DR-1 직급을 거쳐, 각자의 역할을 끝마친 뒤 사회적 신분을 완전히 말소한다.

    무명에게 있어서 사회적 지위나 명예, 권력, 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디그러쉬가 이 세상에 영원히 존속한다면 그들또한 그러할 테니까.

    각자의 역할을 끝마치고 무명이 된 무명은 다양한 인종, 문화, 종교, 연령을 자랑한다.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처럼.

    때문에 각 지부에서 만날 수 있는 무명은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젊은 청년일수도 있고, 어린 여성일수도 있으며, 눈앞의 노신사처럼 중후한 멋이 있는 노인일수도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 자네와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자네의 대단한 업적이나 공로에 대한 것은 디그러쉬 한국지부를 담당하고 있던 전임 무명으로부터 모두 들었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너무 점잔뺄 필요없네. 디그러쉬가 어떤 기업인가? 대단한 업무 능력과 뛰어난 결단력만 보고 인재를 뽑는 절대적인 평등 기업이 아닌가. 자네가 이 노인네의 자리를 가질 자격을 갖춘다면 무명은 언제든지 나를 걷어내고 자네를 앉힐 걸세."

    "그것은......"

    "허허, 아니라곤 못 하는구만. 그래야 디그러쉬가 인정한 인재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분위기 환기는 이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테이블 위에 자신의 찻잔을 내려놓은 노신사는 편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대어 앉으며 자신의 손을 깍지 꼈다. 깍지낀 손은 하복부에 살짝 얹은 듯한 자세였고, 두 다리는 어깨보다 조금 더 넓게 벌린 상태였다.

    명백하게 '갑'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충만한 여유를 느끼며 상대를 은연중에 압박하는 전형적인 대화 자세다. 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은' 이유가 있는 자세거나.

    박한화는 자신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허리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이것은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상대방의 말을 자세히 경청하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양손은 무릎에 두지 않고 깍지 껴서 살짝 좁게 벌린 무릎의 중앙에 둔다. 이따금 손가락을 꼼질거리거나 식은땀을 흘리면 상대방에게 자신이 완전히 을의 입장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대화 자세였다.

    "질질 끌 필요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에게 아들이 한 명 있는 것으로 아네. 이름은 박한성, 군을 전역한지 얼마 안 됐으며, 지저 도시 입주전에는 복학을 준비하고 있던 젊은 청년이었지. 내 말이 맞는가?"

    "정확하십니다."

    "그럼 이번에는 좀 더 깊게 묻겠네. 자네는 아버지되는 사람으로서 아들인 박한성 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그 녀석이 멋대로 집을 나가 독립하기 전까지의 정보는 전부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또한 대학 생활도 사람을 심어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워낙 모난 탓에 제 교육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라, 일단 대학생활 동안 지켜보다가 건수를 잡으면 디그러쉬에 강제로라도 입사시키려 했던 녀석입니다. 성격이나 예의범절이 형편없는 건 둘째치고 본연의 능력과 결단력만큼은 출중했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결단력만 보는 디그러쉬에 가장 적합한 인재였다, 라는 건가?"

    "예. 다만 사납기가 야생마 못지 않아서 고삐를 채워두려던 참인데, 최근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호오. 어떤 기회인가?"

    "녀석이 제 도움으로 지저 도시에 입주한다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제게 반발하며 범죄자 집단과 어울리고 있다는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치안조직에 까발리면 최소 목이 달아나거나 지저 도시에서 쫓겨날 만큼 중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밀수'에 관한 것이라면 나도 이미 알고있네. 내 정보원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박한화는 자신과 증거를 가져다준 정보원만 알고 있던 사실을 눈앞의 노신사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고작 자신따위가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라면 무명이 알아내지 못 했을리가 없으니까.

    "꽤 맹랑한 젊은이더군. 지저 도시에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지저 도시의 고질적인 문제를 꿰뚫어보고, 범죄자 집단과 결탁해서 커다란 이권을 챙길 수 있는 밀수에 뛰어들었네.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단력도 굉장해. 부전자전이라더니 틀린 말이 하나 없어. 설령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어도 그 친구는 100% 자네의 친자식이었을 게야."

    "거듭 영광입니다.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그 망아지 같은 녀석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그 친구가 디그러쉬에 꼭 필요한 인재인 것은 맞지만, 목줄을 채우는 건 그리 현명하지 못한 생각인 것 같군."

    "제가 감히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뭘, 그리 대단한 이유도 아닐세. 자네도, 심지어 나조차도 모르는 그 친구의 군 시절 기록이 자칫 심각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

    "최전방 수색대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비밀작전사령부에 대해 알고 있나?"

    "!"

    노신사는 목이 타는지 옆에서 보좌하고 있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물 한 잔을 건네받았다.

    "내가 조사해보니 그 친구가 비밀작전사령부 소속이더군. 특수작전사령부와는 완전히 독립된 군 지휘부이며, 놀랍게도 모든 부대원은 병사 계급으로만 채워져 있지. 현장 지휘조차 부사관이나 장교가 아니라 병사가 맡았다는 얘길세. 더 재미있는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나? 비밀작전사령부는 오직 군의 최고통수권자가 내린 명령만 받았다는 사실일세."

    "대통령 말입니까?"

    "말이 좋아 '사령부'지, 그곳에 소속된 모든 병사들은 중장갑수색대, 중장갑타격대로 활동하며 대통령이 비밀리에 인가한 작전만 참여했다는 얘길세. 계급이 모두 병사로 고정되어 있으니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특수부대 취급을 받지 않으며, 군 관계자들도 그저 최전방 지역에 주둔하는 중장갑수색대나 중장갑타격대 정도로만 알고 있더군. 국정원처럼 모든 정보가 대외로 드러나지 않아."

    "그렇게나 대단한 곳입니까?"

    "그나마 군에서 비슷한 부류인 특전사 출신들을 긁어모아 '취조'해보니 그들도 비전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더군. 공통적인 정보가 하나 있었다면, 특전사가 동원될만한 상황에는 반드시 비전사가 먼저 투입되었다는 정보일세. 항상 특수부대보다 먼저 파견되어, 특수부대가 원활한 작전 수행을 할 수 있게끔 발판을 만들어두는 부대. 그게 비전사 소속 중장갑수색대와 중장갑타격대였던 게지."

    박한화는 특유의 냉철함과 이성적인 사고로 혼란스러움을 잠시 접어두었다.

    자신의 아들이 최전방 부대의 어느 수색대 소속으로 적당히 군 생활을 하다 다시 사회로 복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러한 내막이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 했다.

    군에 사람을 심는 것은 역시 어려웠기 때문에, 박한성이 군에 있는 동안은 잠시 관심을 접어두고 지저 도시 프로젝트에나 집중하자고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하필 그때가 지저 도시 프로젝트 7부 능선을 막 넘기려던 시기였기 때문에 매우 바빴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 있었다.

    "그...지금 이 지저 도시에는 아직 임기가 끝나지 않은 대통령이 입주해있습니다. 비전사에 대해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대통령을 압박해서 비전사에 대해 알아내려는 시도는 이미 막혔네."

    "......"

    "디그러쉬의 도움으로 지저 도시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전대와 전전대 대통령이지, 자신은 그저 그 프로젝트를 계승한 대통령에 불과하다며 디그러쉬와의 관계를 부정하더군. 재미있지 않나?"

    박한화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같은 대외적인 디그러쉬의 중역이라면 모를까, 무려 무명이 직접 나섰음에도 일국의 대통령에게서 원하는 답을 듣지 못 했다는 것은 꽤 큰 문제였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겠네. 비전사에 대해 알고 있을 전대, 전전대 대통령은 과연 이 지저 도시에 입주했을 것 같나?"

    "입주하지 못 했을 겁니다."

    "그 말대로일세. 그들은 입주하지 못 했지. 분명 지저 도시 입주 대상에 이름이 올라와있는 걸 내가 확인했는데."

    "우연이라고 보십니까?"

    "원래 지저 도시 격벽 폐쇄는 당일 정오(12시)로 예정되어 있었네. 하지만 대통령은 그것을 묵살하고 서둘러 모든 군 부대와 군용 차량을 안으로 들이고 격벽을 조기에 폐쇄해버렸지. 덕분에 비밀작전사령부에 대한 물질적인 자료, 혹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을 제외하고 단 한 명도 들어오지 못 했음을 확인했네. 그와중에 자네 아들이 2명째 후보로 등장했다네. 그럼 이제 내가 묻지. 이게 우연일 것 같나?"

    "......"

    박한화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대통령은 분명 노리고 비전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감추기 위해 관련자의 입주 저지, 관련 정보가 담긴 물질적 자료나 전자 데이터를 일절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박한화의 생각대로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박한성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면 그것은 기가막힌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박한화도 정말 몰랐으니까.

    애초에 연락도 끊고 지내던 자식놈이 군 생활을 어디서 했고, 뭘 했는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때 자신은 한창 임기 초의 대통령과 독대해서 지저 도시 프로젝트에 대해 실컷 떠들면서 국가의 투자만 더 끌어오고, 온갖 실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전사고 지랄이고 그런 걸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알지도 못 했고.

    해서, 박한화는 강수를 꺼내기로 했다. 이미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무명을 만나버렸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황이다. 여기서 미끄러질 수는 없었다.

    "제 아들이 비전사 소속 중장갑수색대 출신이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아, 그 얘기가 왜 안 나오나 싶었네. 박한성 군이 범죄자 집단과 엘리베이터 앞에서 특전사 출신과 자그마한 시비가 붙었던 적이 있었네. 그때 스스로를 중장갑수색대라고 소개했으며, 암묵적으로 중장갑수색대만 사용할 수 있는 부대 구호를 말했다더군. 당시 그와 시비가 붙었던 특전사 출신을 직접 호출해서 확인한 내용일세.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들었던 얘기라 꽤 신빙성 있는 얘기였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물론 이것만으로 그 친구가 중장갑수색대 출신이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지. 모든 병사들이 엑소스켈레톤을 착용하고 누구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밑받침해줄 근거가 부족하니까. 여기서 자네가 놓친 추가 정보가 나오더군. 그것도 지저 도시에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놓친 정보일세."

    자신이 지저 도시에서 놓친 정보가 있다는 사실에 박한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지상에서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의 지저 도시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자신이 놓친 정보라니?

    디그러쉬에서 오직 실력과 결단력만으로 중역에 올라선 박한화는 꽤 오랜만에 맛보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지 못 했다.

    무명이 아랫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니 틀린 말을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범죄자 집단과 합류하기 전에 디그러쉬 사에서 하청을 내린 일일노역을 했던 기록이 있더군. 현장을 관리하던 감독관과 작업반장의 증언, 그리고 감시드론의 녹화 영상을 교차검증해보니 그는 매우 능숙하게 엑소스켈레톤을 사용하더군. 또한 국가기관의 자격증과 면허증 데이터베이스를 조회해보니 지상에 있을 때 이미 엑소스켈레톤 면허증을 획득한 상태더군. 그것도 군에 있을때."

    "!"

    굉장한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확실한 정황증거. 오히려 그 증거들을 가지고도 박한성이 중장갑수색대 출신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하면 병신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박한화는 곧 불벼락처럼 떨어질 무명의 처분을 기다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 대한 정보 하나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서 계획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자신의 실수였다.

    "고개를 들게."

    그의 부드러운 어조가 콜라의 탄산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진중하고 엄숙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싶어 죄인의 심정으로 고개를 든 박한화는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무명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친구를 디그러쉬에 묶어두고, 디그러쉬만을 위해 그 능력과 결단력을 사용하지 못 하게 된 것은 굉장히 아쉽게 됐네. 하지만 그것은 변수가 확인되지 않은 지금만 해당되는 얘기일뿐, 변수 확인이 끝난 뒤에 재계산을 거치면 얼마든지 해결될 문제일세."

    "그 말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비전사에 대해, 그리고 자네의 아들인 박한성 군이 중장갑수색대 출신으로 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내게. 그것으로 자네의 실수는 만회되겠지. 자네에 대한 우리의 평가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맡겨만 주십시오!"

    피의 충성을 강요받은 야쿠자처럼 고개를 깊이 숙인 박한화는 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자신은 아직 미끄러질 때가 아니었다.

    "필요하면 디그러쉬의 어떤 자원을 갖다 써도 상관치 않겠네. 모두 내 권한으로 허가하지. 하지만 자네의 아들에게 괜히 섣불리 접근하거나 태도를 바꿔서 이쪽의 의도를 의심케하는 불상사만큼은 없어야 하네."

    "주의하겠습니다."

    "이만 가보게.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자네의 아들을 주시하고 있는 건 나나 자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유념하고."

    절도있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박한화는 다시 한 번 90도 인사를 한 뒤 물러났다.

    그가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것을 확인한 노신사는 테이블 위에 접어둔 랩톱의 화면을 다시 열었다.

    본래 박한화와 얘기하면서 '그것'을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정말로 박한성의 군 생활을 모르는 눈치였기에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다시 재생된 영상 속에는 김한솔 상병의 헤드캠으로 촬영된 지상 작전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김한솔 상병과 이상학 병장을 직접 인솔하며 익숙하게 어둠 속을 헤쳐나가는 박한성의 모습도.

    영상속의 그는 희미하게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야광봉을 꺼내 저 멀리 힘껏 던지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반복하곤 했다.

    "자네가 뭘 알고 있는지 궁금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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