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8화 (48/211)
  • 신은 죽었다(5)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두개골을 열고 뇌 속을 파고드는 듯 하다.

    교활한 뱀처럼,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집요하게 파고드는 드릴처럼, 그가가가가가가가! 울려퍼지던 땅굴 속의 그 거대한 드릴! 누구도 할 수 없었고, 누구도 하기 싫어했던 그 일!

    병사 계급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부대가 반드시 해야 했던......!

    -박뱀. 왜 우리 부대는 전부 병사 계급만 있는 겁니까?

    -왜? 부사관이나 장교 계급 달고 특수부대 대우라도 받고 싶냐?

    -그래도 명색이 비밀작전사령부 소속 아닙니까. 특전사 놈들이랑 매일 비교 당합니다. 정기검진 나오는 의무관 놈들도 우릴 얕잡아 보잖습니까.

    -비교당해도 돼. 애초에 우린 특수부대가 아니거든. 우린 그냥 언제나 브라보야. 알파(특전사)보다 앞서나가는 브라보. 하지만 절대로 넘버원이 될 수 없는 영원한 세컨드지.

    "어, 저는...오늘 처음 들어온 김명호입니다."

    "김명호 형제님이셨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들어온지 얼마나 됐나요?"

    "그 친구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대충 1시간 전쯤에 들어온 겁니다."

    나 대신 설명한 최준석은 시야를 내리깔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나간 후에 곧바로 들어왔다는 거네요?"

    "시간대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 친구가 근방을 떠돌다 추위를 피해 역으로 들어왔는데 우리와 마주친 겁니다. 그래서 대장님께 데려갔고, 여기서 일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외부인이 여기서 지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는 건 '준비된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대장님께선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훌륭해요. 이게 얼마만의 '준비된 사람'인가요. 서둘러 세례 의식을 준비해야겠어요. 아, 하지만 세례 의식에 쓸 '기름'은 오늘 다 써버렸으니 보충이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겠군요. 형제님의 내일 일정표를 조정해두죠."

    그렇게 멋대로 중얼중얼거리던 여자는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흩뿌리며 다시 가야할 길을 갔다.

    그녀의 뒤를 지네처럼 따르고 있던 자들도 내 옆을 지나가며 검은 면사포 너머로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면사포 너머임에도 나는 시선에 담긴 각양각색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맛본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냄새를 맡았다고 해야 하나? 어느쪽이든 느낀 것은 똑같았다.

    '강한 시기와 질투, 경계, 그리고 희미한 환희.'

    강한 시기와 질투, 경계는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무리가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면 새로운 유입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시골에 사는 노친네들이 귀농을 위해 내려온 외지인을 반기지 않고 텃세를 부리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하지만 희미한 환희를 느꼈을 때 나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경멸'이나 '증오'가 아니라 '환희'인 거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계까지 하면서도 내가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모종의 기쁨을 느낀단 말인가?

    '제정신이 아니군.'

    검은 무리가 모두 지하 2층으로 내려가자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아직도 공기중에 남아있는 진득한 오물의 잔향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거친 호흡을 하면서 뇌에 산소를 공급했다.

    하필 그 상황에서 산소가 부족했던 탓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야, 괜찮냐?"

    "후우, 후우...좀 쉬면 괜찮을 겁니다."

    "처음인데 그정도면 굉장히 잘 버틴 거다. 보통 저 양반들이랑 마주하고 멀쩡한 새끼는 없었거든."

    "그 자리에서 구토라도 했답니까?"

    "구토는 양반이지. 그대로 게거품 물고 기절하거나 머리가 헤까닥 돌아서 미치는 놈도 있었어. 나도 처음엔 먹었던 거 다 토했었지. 그러더니 저 년이 뭐라고 한 줄 아냐?"

    "뭐라고 했는데요?"

    "난 준비가 안 됐대. 미친 년."

    킬킬 웃어댄 최준석은 품속에서 껌 한통을 꺼내 내게 던졌다. 향이 강한 자일리톨 더블 껌이었다. 하나로 2개 씹는 기분! 치아 건강도 2배! 이 지랄로 광고하던 게 기억난다.

    "그거 좀 씹다가 물 마셔라. 그럼 입이랑 코가 시원해져서 금세 괜찮아져."

    "꿀팁 감사합니다."

    나는 처음 마주했던 그의 첫인상과 지금의 모습에 대한 갭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주는 껌을 받아 씹었다.

    "준석 씨도 저처럼 외부인 출신이었습니까?"

    "...어떻게 알았냐?"

    "불만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건 이 그룹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이해하길 거부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반응이잖아요. 그것도 자꾸 주의까지 받을 만큼 노골적으로. 그리고 아까 힌트도 주셨고요."

    "어떤 힌트?"

    "저 사람들과 직접 마주했을 때 토하고 준비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으셨다면서요. 그럼 처음부터 저 사람들이 있었을 게 분명한 이 노원역 출신이 아니었다는 거죠."

    "이야, 신뺑이치곤 생각보다 눈치가 좋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용케 혼자 돌아다녔던 건가?"

    "저만큼 눈칫밥 많이 먹어본 사람도 없을 겁니다. 흐흐."

    무려 15년 가까이 눈칫밥을 먹었다. 내가 세상을 인식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게 된 그 나이대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이번 작전에서 그 양반에게 갚아줄 빚을 확보해야 한다.'

    지상의 환경 정보나 정체불명의 괴생물체에 대한 정보는 주요 기업들 대상으로 판매할 상품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나를 지저 도시에 입주시켜준 아버지라는 작자에게는 조금 더 특별한 정보를 공짜로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진 빚을 갚고 거리낌없이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라도 보이는 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중으로 지저도시에 복귀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한 나는 최준석과 함께 경계 근무를 서고, 따로 배정받은 침실에서 잠들 준비를 했다.

    왜 공용 침실이 아니라 따로 침실을 배정받았는지 물어보니 내가 '준비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침낭이나 매트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공용 침실에 비하면 훨씬 더 편하고 깨끗해 보이는, 플랫폼 구석의 좁은 칸막이 안에서 침낭을 깔고 누웠다.

    '여기에서 뺏긴 장비는 외골격 파츠 뿐이야. 야투경과 탄약, 그리고 연막신호탄과 야광봉은, 내몫의 비상 식량과 식수는 아직 배낭 속에 그대로 있다.'

    총과 탄약을 넣어다니기 위해 배낭을 그냥 지고 다니겠다고 둘러댔더니 김 병장은 쿨하게 그러라고 말했었다.

    보초 중에 가끔 인근 지역을 수색하는 임무를 맡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도 개인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며 자기 몫을 적당히 챙긴다고 한다. 규칙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허용해준다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침낭 속에서 자는 것도 오랜만이네.'

    군에 있을 때도 훈련과 작전이 아니면 침낭을 따로 쓴 적은 없다.

    '...작전?'

    아, 그래. 나는 중장갑수색대 소속이었으니 실전을 빙자한 차단 및 수색 작전을 자주 나가곤 했지.

    고용량 압축배터리를 등에 짊어지고 엑소스켈레톤슈트를 착용해 산과 강을 민첩하게 뛰어다니면서 한 마리의 짐승처럼 움직였었다.

    위장을 위해 수풀과 염색된 천을 엮어만든 길리슈트를 착용하기도 했고, 발각되면 입막음하고, 땅굴을 발견하면 상층부에 보고하고,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을 때면 언제나 이렇게 말했었지.

    "소등(Lights off)."

    *  *  *

    디그러쉬에서 어지간하면 건드릴 일 없는 DR-2 직급의 인간이 더 높은 직급의 사람에게 '호출' 받는다는 것은 딱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 죽음, 혹은 물리적 죽음.

    전자를 선택할 수 있거나,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일 경우 DR-1의 직급을 승계받고 암묵적인 사회적 죽음에 동의한다. DR-1 직급이 되면 디그러쉬를 총괄하는 CEO로 거듭날 수 있으며 동시에 '무명'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수많은 DR-2 직급을 가진 인간들 중에서도 무명의 선택을 받은 이들만 누릴 수 있는 디그러쉬 고유의 영광이자 명예직이다.

    이후 사회적인 삶을 모두 끝마치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DR-0 직급을 부여받고 무명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는 사회적 죽음으로 이어진다.

    후자를 강요받는 입장이거나, 후자가 되기 전에 심의가 필요할 경우 상황에 따라 직급 유지, 혹은 물리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박한화는 자신이 아직 사회적 죽음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외국계 기업 디그러쉬에서 타 기업 출신 한국인이 DR-2 직급으로 올라온 것은 실로 대단하나, 여전히 무명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박한화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조금 더 세밀하게 파고들면 정확한 수치와 통계로 박한화라는 인간을 분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자신이 하필 이 시기에 무명에게 호출받는다?

    보통 직접 회사를 찾아와서 내부 사정을 살피고 조용히 사라지는 무명이 굳이 디그러쉬의 일원을 직접 호출했다.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박한화는 디그러쉬 한국 지부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누구보다 압도적인 성과를 내는 인물이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무명이 될 자격은 부족하다.

    "박한화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부의 VIP나 고위관료, 그룹총수 같은 천외천의 존재들이 거주하고 있는 중앙 지구의 타워펠리스. VIP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설치되어 있으며, 항상 청와대 경호팀과 특수부대가 상주하고 있는 절대적인 성역이었다.

    사태가 벌어진 첫날에 자신의 못난 아들이 중앙 엘리베이터를 통해 무명과 함께 들어왔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놀랐던지.

    "무명께서는 35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한화를 타워펠리스 안으로 안내해준 정장 차림의 절세미녀는 로봇처럼 절제된 동작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띠링 하고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박한화는 가볍게 넥타이를 메만지며 입장했다. 그를 안내해준 절세미녀는 바깥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여보이며 배웅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인사를 한 번 더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에 따라 오늘 박한화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35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한화는 길게 이어진 대리석 복도를 힘차게 걸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CCTV 너머에 수많은 존재들이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분석하고 있을 터.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젊디젊은 50대에 불과했으니까.

    마치 옛 시대의 왕을 알현하는 느낌으로 거대한 문 앞에 다가서자, 곧 안쪽에서 무장경호원 두 명이 나와 박한화의 몸을 수색했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박한화를 안으로 안내했다. 타워펠리스 35층에서 내려다보는 지저 도시의 절경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마침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어서 오시게."

    투명한 방탄 유리로 만들어진 테라스에 앉아 우아하고 멋들어지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노신사.

    언제나 회색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있으며, 흑단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사람 좋은 인상으로 디그러쉬 내부를 철저하게 살피는 무명중의 한 명.

    사태가 벌어진 당일에 불초한 자신의 아들과 함께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던 그 무명이었다.

    "일단 앉지."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으로 미소지은 무명이 그에게 착석을 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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