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7화 (47/211)
  • 신은 죽었다(4)

    "제가 말해드린 것만 잘 숙지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생각보다 외울 게 많네요."

    내가 살짝 난처하다는 얼굴로 웃자 김 병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내게 알려준 건 이 노원역 내에서 주의해야할 점이나 절대로 어겨선 안 되는 규칙들이었다.

    주의해야하는 쪽은 사실 크게 신경쓸 필요 없었다. 그룹내에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배려하기만 하면 문제없었으니까. 검은 무리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점이 조금 특이했다.

    그런데 절대로 어겨선 안 되는 규칙들이 상당히...이상하면서도 많았다.

    우선 모든 규칙의 대전제는 민간인들이 군의 지휘와 통제에 따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군의 지휘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노골적으로 반항하거나 끈질기게 거부하면 '숙청' 대상이 된다고 한다.

    숙청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모든 무기를 빼앗기고 1일치의 식량과 식수만 받고 그룹에서 쫓겨난다. 사안에 따라서는 즉결처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규칙으로는 반드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할 것, 물자 빼돌리기 금지, 특별한 이유없이 5인 이상 집합 금지.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생존자 그룹에 전파 금지, 허가없이 백화점 입장 금지, 정해진 시간에 수면하고 식사하기 등등.

    자질구레한 규칙들이 굉장히 많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빡빡한 규칙들 투성이였다. 특히 내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5인 이상 집합 금지' 규칙이었다.

    아마도 근무 인원들은 기본적으로 2인 1조로 움직이는 구조일 것이다. 백화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버스의 초병도 두 명, 지하철역 계단을 지키고 있던 초병도 두 명, 생존자 그룹과 멀찍이 떨어져 내부를 감시하고 있던 군인도 두 명씩 있었으니 틀림없다.

    그 자들이 근무 교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과 뭉치게 된다면 4인 2조가 된다. 이 경우 5인을 넘지 않기 때문에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바꿔말하면 근무 교대를 제외한,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5인 이상 모일 이유도, 모일 여유도 없다는 얘기가 된다.

    기껏해야 공용 침실이나 공용 식당, 그리고 선생이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치고 있는 임시 학교 정도가 사람이 모일만한 공간이다.

    '하지만 빡빡한 스케줄에 굴려지고 있는 사람들이 공용 침실에서 잡담을 나누거나 작당모의를 하진 않겠지. 피곤하기도 할 뿐더러, 공용 침실은 뻥 뚫려있는 구조니까.'

    학교엔 애들만 있으니 논외로 치고, 남는 건 공용 식당 뿐인데 거기도 작당모의를 하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다.

    일을 하는 아저씨나 아줌마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었으니까. 말라깽이 준석이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을 때 보내던 그 눈빛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랫것들만 공평하게 일하고, 최악의 대우를 받으면서 5인 이상 집합이 금지된 빡빡한 생존자 그룹이라......'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체제에 자연스럽게 어떤 국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국가.

    -박뱀. 이 새끼들은 어떻게 합니까?

    -전부 소각해. 이 새끼들 밖으로 나가면 안 돼.

    -기, 기다려주시오! 내래 아무 문제도...아아아아아아악!!

    "그럼 저는 이제 근무하러 가면 되는 건가요 김뱀?"

    "그게 언젯적 호칭입니까. 그리고 제가 군인이라고 해서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알려드린 것만 잘 지키시면 됩니다. 근무 일정은 조정을 하긴 해야 하는데...최준석 씨와 같이 들어가면 될 겁니다."

    "최준석 씨라면......?"

    "지금 저기 나오는 분 말입니다."

    나는 김 병장의 시선을 따라 실망하는 게 주요 업무인 중대장의 객실에서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말라깽이 준석, 그가 내 새로운 사수가 될 최준석이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저 사람에게 너무 물들지는 마십쇼. 창식 씨도 준석 씨를 껄끄러워해서 이참에 배치표에서 빼버리고 명호 씨를 대신 넣은 겁니다. 그냥 일만 배운다 하는 느낌으로 같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죠 뭐."

    김 병장과의 대화를 끝낸 나는 소지해도 문제없다는 내 소총을 다시 들고서 최준석에게 다가갔다.

    그는 중대장에게 꽤나 시달린 듯 얼굴이 몹시 붉었다. 누가 건드리면 펑 하고 터질 것 같은 기세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번에 같이 새로 일하게 된 김명호입니다."

    나는 같은 조직원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는 악수를 받아들이는 대신 인상을 쓰며 김 병장에게 소리쳤다.

    "또 나더러 신뺑이 맡으라고? 장난치냐?!"

    "대장님께서 창식 씨 배치를 바꾸라고 명령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염병......!"

    이들은 특이하게도 중대장을 '대장님'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권위의식에 찌들어 있으며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자들을 모두 아래라고 생각하는, 끽해야 대위 나부랭이 새끼가 남들에게 추켜세워지고 싶은 욕구를 마음껏 표출하고 있는 거다.

    본인이 스스로를 소개할 때는 '본 중대장'이라고 말하지만, 타인이 자신을 부를 때는 항상 대장님이라고 부르게끔 강요한 것이겠지. 참으로 옹졸한 인간이다.

    '이 생존자 그룹은 오래 못 가겠군.'

    누군가가 독하게 마음 먹고 중대장을 암살하거나, 반대로 뜻있는 자들을 모아 한 번에 반란을 일으키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집단이다.

    변수가 있다면 그 기괴한 검은 무리들인데, 군인들의 태도나 생존자들의 반응을 보면 이 그룹에선 여러가지 의미로 신임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쯧...신뺑이니까 나이 안 따지고 말 편하게 한다. 군대는 이미 다녀왔다니까 사수 부사수 개념은 알지? 우리 일이라는 게 사실 별 거 없어. 그냥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경계 근무 서고, 가끔 일손 필요하면 가서 돕는 식이야. 주의사항이나 규칙은 저 놈한테 이미 들었을테니까 생략한다. 알아서 외워."

    "예. 그래서 지금부터 뭘하면 되는 겁니까?"

    "뭘 하긴. 쉬지도 못하고 또 존나 일이나 하러 가야지."

    바닥에 침을 찍 뱉은 그는 '나 불만있소' 하는 얼굴로 나보다 앞서 걸어 올라갔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중대장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룹 내에서 잠정적인 회색분자로 낙인 찍힌 사람이라고 기록해뒀다.

    최준석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그는 규칙을 어길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미 수차례 경고를 받을 만큼 내부 평가가 좋지 않은 사람인 거다.

    다시 지하 2층으로 돌아온 우리는 공용 식당에서 딱봐도 맛대가리 없어보이는 칼로리 바 2개와 생수 한 병씩을 받아왔다.

    식사 시간을 지킬 수 없는 근무자들은 근무를 서면서 먹을 수 있도록 이렇게 간편식을 받아간다고 한다.

    나는 최준석과 함께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와 경계 근무를 서기 시작했다.

    '랑데뷰 포인트에서 조직원들과 만나기로한 시간은 이미 지났군. 이제와서 돌아가기에도 늦었고.'

    모든 밀수조직은 정해진 시간에 복귀하지 않은 조직원을 행방불명 처리하고, 잠정적 사망자로 간주한다.

    누군가 신호탄을 쏴서 작전을 망쳤던 그 날도 수십 명의 밀수범들이 복귀하지 못 했는데, 차도식의 말에 의하면 그들 모두 조직 내에서 사망 처리 되었다고 한다.

    다만 나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나는 차도식파 내에서도 단독행동을 즐겨하고, 조직원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차도식과 김명호에게 나를 사망처리 하고 싶다면 내가 일주일 동안 깜깜무소식일 때 사망처리 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즉 내겐 일주일이나 여유 시간이 있는 셈이다.

    '김명호는 내가 노원역과 백화점의 상태를 보러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아마도 이유가 있어서 랑데뷰 포인트에 오지 못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돌아가겠지.'

    오늘 차도식파가 복귀하면 앞으로 두 번 더 작전을 나오게 될 텐데(3일마다 1회), 두 번째 작전에서도 내 소식을 듣지 못 하고 복귀하면 깔끔하게 나를 사망처리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한가한 경계 근무를 서본 적이 있던가?

    "쓰읍. 야, 눈 깔아라. 그 새끼들 온다."

    "누굴 말하는 겁니까?"

    "깜둥이들."

    갑자기 뻐킹 레이시스트가 된 내 사수를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다시금 인상을 쓰며 내 뒤통수를 잡아 아래로 내렸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나는 최준석과 똑같이 바리게이트 옆으로 물러서서 길을 터주었다.

    그러자 위에서부터 묘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야리꾸리한 비린내와 고약한 썩은내가 조금씩 다가오는가 싶더니, 기어코 내 코에 침범하여 인정사정없이 후각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는 하마터면 '뭔 냄새가 씨발' 이라고 말할 뻔 했다. 김 병장이 미리 진지빨고 알려주었던 '무례한 행동을 보여선 안 된다' 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무례한 행동 유발자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가 처음 지상에서 봤던 것처럼 선두가 이끌고, 후열이 기차놀이를 하듯 일렬로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특히 냄새가 심했는데, 속으로 참을 인 자를 300번 정도 새기지 않았으면 진즉에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저건 데오도란트조차 해결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다. 저 냄새와 굳이 비교를 하자면 청소를 하지 않은 정화조나......

    '아니면 시취(屍臭) 정도겠지.'

    맡아본 적 있는 냄새라 더 열받는다. 음식도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하듯, 냄새도 아는 냄새가 더 짜증나는 법이니까.

    그렇게 선두가 우리를 지나쳐 지하 2층으로 내려가려던 순간, 갑자기 선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뒤를 따르던 자들도 선두의 움직임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거나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선두는 개의치 않고 다시 몇 걸음 올라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게 접근했다.

    그냥 스쳐지나갈 때만 해도 냄새가 장난아니었는데, 내게 다가오자마자 코가 뽑혀나갈 듯한 강렬한 체취를 흩뿌렸다.

    이게 혹시 말로만 듣던 신종 고문법인가 싶어 입으로만 숨을 쉬고 있던 찰나, 내 귓가에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밖에서 들을 때는 좀 더 남성적인 목소리였는데.

    "처음 뵙는 형제님이시네요."

    금방이라도 코를 비틀어서 죽여버릴 것 같은 지독한 냄새와 달리, 내 귓가를 간질거리는 목소리는 흡사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의 목소리처럼 맑고 청아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목소리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절경이라 불리우는 거대한 산맥의 폭포수 같은 목소리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느쪽이든 듣고만 있어도 머리가 텅 비고 맑아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총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고 있었기 대문에 위에서 지켜보는 자들에겐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세이프티를 해제해야 할까? 총구를 겨눠야 할까? 방아쇠를 당겨야 할까?

    "형제님?"

    -박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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