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6화 (46/211)
  • 신은 죽었다(3)

    노원역 지하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활발한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하 1층은 무기를 든 다수의 초병들이 지상과 연결된 입구를 지키거나, 바리게이트를 쌓아서 철통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래서 비교적 생활감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 2층부터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나를 반겼다.

    바쁘게 물자를 옮기고 있는 아저씨들, 대형솥이나 냄비에 뭘 팔팔 끓이고 있는 아주머니들,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서 떠들거나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 그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군복차림의 군인들.

    "사람들이...굉장히 많네요?"

    "형씨도 이걸 기대하고 온 거 아냐? 사람이 많은 곳은 무조건 안전하니까. 운 좋으면 어떤 미친 새끼들처럼 날로먹으며 지낼 수도 있고."

    "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으라면 들으라지 병신 새끼들. 그리고 내가 틀린 말 했냐? 우린 뭐가 빠져라고 뺑이치면서 경계 근무 서고, 물자 옮기고, 가끔 일 터지면 나가서 수습까지 하는데 제대로 쉬질 못 하잖아. 근데 그 새끼들은...으읍!"

    말라깽이가 지난날 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주체를 못하고 빵 터뜨리려던 것을 일행이 입에 손을 가져다대며 간신히 막았다.

    사실 일행이 막지 않았어도 말라깽이는 어느 순간 말을 멈췄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이 유독 따가웠으니까.

    '내부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나?'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갑작스럽게 닥치면 뭉쳐야 할 사람들끼리 서로 반목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하지만 생활감이 넘치는 따스한 지하철역에서 내가 느낀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생존자들끼리 쌓이고 쌓인 불만을 표출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나는 찰나에 스쳐지나간 시선들 속에서 '혐오'를 느꼈다.

    믿겨지는가?

    다함께 으쌰으쌰해서 어찌어찌 잘 돌아가고 있는 생존자 그룹 내에서, 힘들게 일하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가 담긴 시선을 보낸다니?

    '말라깽이가 처음부터 떠돌이 생존자를 그리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지. 그건 나와 같은 떠돌이 생존자를 제법 만나봤다는 거다.'

    노원역이 안전하고 따뜻하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떨거지 생존자들. 잦은 경계 근무를 서는 탓에 그들과 쉴새없이 부딪치고 또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말라깽이.

    그가 어째서 나를 경계하고 믿을 수 없다는 말따위를 했는지 약간이지만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장이라는 사람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날 들여보내 줬으니, 이곳은 위계질서가 철저한 곳이다.'

    위계질서가 철저하지 않다면 자신의 대우에 불만을 품은 말라깽이가 가만히 있었을리가 없지. 또한 이곳의 생활권 역시 지금처럼 안정적이지도 않았을 거다.

    위계질서가 확립된 그룹은 불만이 얼마나 쌓여있든, 그 불만이 터지기 전까지는 질서가 확실하게 지켜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위계질서가 잡힌 그룹 내에서,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말라깽이의 발언이나 행동은 좋지 않은 모습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혐오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말라깽이 같은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입장이니까.

    오히려 지나가듯 불만을 툭툭 내뱉고 조금 띠꺼운 태도를 보여도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주는 게 맞다. 대우를 신경써줄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라면 최소한 존중은 해줘야 하니까.

    '그런데 혐오를 감추지도 않았단 말이지.'

    나는 이 특이한 생존자 그룹에 흥미를 느끼면서 얌전히 말라깽이 일행을 따라갔다.

    역 내부는 생존자 그룹이 어떻게든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단열재를 바닥에 깔아둔 상태였으며, 아마도 백화점에서 구해온 것으로 추정되는 칸막이 가구를 이용해 구역을 나눠둔 상태였다.

    '매트리스나 침낭이 여러 개 깔려있는 공간은 공용 침실이겠군.'

    내 앞을 걷고 있는 말라깽이 일행처럼 잠만 자고 바로 교대 근무나 노동에 투입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일 것이다. 대우가 이리도 박하니 불만을 품을 법 하다.

    배터리를 사용하는 캠핑램프나 손전등 따위가 벽이나 천장에 주렁주렁 달려 있어 내부는 꽤 밝았다.

    공용 침실 너머에는 책상과 의자가 배치된 작은 교실이 있었는데, 마침 젊은 여교사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도 대한민국 부모들은 자식교육을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애들은 교육자에게 맡기는 게 낫긴 해.'

    어쭙잖은 부모의 가르침으로 순수한 아이를 물들이는 건 꼭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산 증인이지 않은가.

    그밖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생활권을 지나쳐 지하 3층으로 내려오니, 이번에 마주하게 된 것은 선로 하나에 열차를 정차시켜둔 채 작전기지처럼 쓰고 있는 군 부대였다.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군인들의 수는 어림잡아 2~30. 위층에 있는 군인들까지 포함하면 얼추 생존자 그룹 하나를 책임질 규모는 된다.

    '어쩌면 백화점에 더 있을 수도 있지. 그렇게나 중요한 거점을 민간인들만 지키고 있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그런 장소에 어딜 봐도 수상해보이는 검은 무리가 자유롭게 드나든다는 점이 걸렸지만, 일단은 정보 수집이 먼저였다.

    "대장님. 대장님이 말씀하신 준비된 사람을 한 명 데려왔습니다."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나를 그렇게 소개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준비된 사람과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던데, 이 생존자 그룹이 외부인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 같았다.

    열차 객실 안에 배치된 사무용 책상과 침대, 그리고 대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은 그가 이곳에서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해주었다.

    "으음? 아아, 그래. 그건 이미 보고 받았다."

    책상 위에 떡하니 놓여있는 무전기. 아마 위층의 누군가가 무전으로 우리의 움직임을 알려줬을 것이다.

    "그런데 준석이 너. 본 중대장을 자꾸 실망시킬 거야? 사내새끼가 돼가지고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하루종일 자질구레한 일로 쫑알대면 그게 참새지 사람이냐?"

    "......"

    술병을 쥔 손으로 말라깽이를 가리키면서 타박을 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따금 흘러나오는 딸꾹질은 그의 밑바닥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지휘관은 평소 행실이 어땠는지 쉽게 알 수 있지.'

    아마 제 좋을대로 병사와 부사관들을 부려먹고, 지금처럼 남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시간에도 태연하게 술이나 퍼마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안전하고 편한 장소니까.

    그런 장소에서 우두머리로 등극했으니 당연히 코가 붉어지고 딸꾹질을 해댈 만큼 술을 퍼마셔도 이상할 게 없지. 준석이라고 불린 말라깽이가 불만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근무자들 사이에 쁘락치까지 심어뒀다라.'

    준석이 지하 2층에서 불만을 내뱉은 걸 누군가가 듣고 무전기로 몰래 중대장에게 보고했다는 뜻이다.

    이런 때에 술이나 퍼마시는 무능한 지휘관치곤 내부 통제가 어떤 건지 잘 아는 영악한 사내였다.

    "흐읍! 끅! 그래서 여기 오신 분이 준비된 사람이다?"

    "예. 혼자서 무장하고 찾아왔길래 일단 무장 해제하고 들여보냈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혼자 무장하고 돌아다니는 사람 정도면 충분히 준비된 사람 아닙니까? 마침 대장님이 찾던 인재가 아닐까 싶어서 데려왔습니다."

    입을 꾹 다문 준석 대신 그의 동료가 나에 대해 열변을 토로했다. 덧붙여서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들의 경고에 따라 들고 있던 소총은 탄창을 빼서 배낭에 넣어둔 상태다.

    "흐음...그렇단 말이지. 뭐 괜찮아보이긴 하네. 체격도 나쁘지 않고 인상도 마음에 들어.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타입이야. 하하!"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우리도 따라 웃었다.

    나는 안정적인 삶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작정 굽히고 들어오는 호구처럼 보여야 했다.

    불필요한 질문도 하지 말고, 반대로 너무 과하게 매달리지도 말아야 한다. 그냥 비굴한 표정과 경직된 태도를 보이면서 적당히 병풍처럼 서있기만 하면 저쪽에서 나를 멋대로 평가해줄 것이다.

    '아, 이놈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없이 실컷 부려먹어도 되겠구나'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거다.

    "그럼 호구조사부터 해볼까? 어느 집안의 뉘집 자식인고? 직업이랑 나이는?"

    "어, 그게...경기도 남양주에서 온 김명호입니다. 직업은 아직 없고 군필에 나이는 스물여섯입니다."

    "신분증 한 번 볼까?"

    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궁색한 변명 대신 당황한 손놀림으로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그러다 지갑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안색을 어둡게 했다.

    "아아, 없으면 그냥 됐어. 전세계가 그 난리를 겪었는데 사람이 고작 지갑 하나 간수 못 했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책상에 술병을 턱 내려놓은 그는 이미 나에 대한 평가를 끝낸 듯 했다.

    지상을 혼자 돌아다닐 정도의 배짱과 준비성은 있지만, 여기까지 도달한 것은 순전히 운에 불과한 얼빠진 놈. 덧붙여서 대놓고 무시해도 자신이 무시를 당하는지 알아채지도 못하는 등신.

    아마 그의 머리속에선 나에 대한 최종 평가에 '부려먹기 좋은 호구 A' 라는 자필 사인까지 친히 첨부했을 것이다.

    "야 김병장아! 여기 이 친구 팔이 좀 깝깝해보이는데 파츠 떼주고 근무지 배치랑 할 일좀 알려줘라! 장비는 따로 보급 안 해줘도 된다!"

    플랫폼 한구석에 가득 쌓여있는 군수물자의 수량을 체크하고 있던 병장 한 명이 곧 내게 다가왔다.

    나는 굳이 저항하지 않고 그가 내 엑소스켈레톤 파츠를 얌전히 벗겨가게 내버려두었다.

    내가 이거면 됐냐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보내자 중대장은 피식 웃으며 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창식이 너는 먼저 가서 좀 쉬고, 준석이 너는 남아라. 본 중대장이랑 상담좀 해야겠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

    창식이라 불린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먼저 객실을 빠져나가고, 나또한 김병장에게 이끌려갔다.

    객실을 빠져나오기 전, 나는 똥씹은 표정으로 삐딱하게 서있는 준석과 매서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중대장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꽤 그럴싸한 그림이 그려지는데?'

    "꾸물대지말고 얼른 따라오십쇼. 오늘부터 여기서 생활하려면 행동이 굼뜬 것부터 고쳐야 할 겁니다."

    김병장의 재촉에 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 플랫폼 구석으로 향했다. 칸막이가 따로 쳐있는 이곳은 일반적인 물자를 쌓아둔 창고였다. 군대로 치면 조금 으슥한 보일러실 같은 느낌이었다.

    "할 일을 알려드리기에 앞서 주의사항부터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오늘부터 여기서 생활하시다보면 검은 옷을 입고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겁니다. 그 사람들에게 절대로 무례한 행동을 하지말고, 먼저 질문을 하거나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 안 됩니다. 설령 그쪽에서 먼저 접촉을 시도한다고 해도 거부하거나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반응을 보여서도 안 됩니다. 이유는 묻지말고 그냥 그래야 한다는 것만 숙지하시면 됩니다."

    쫓겨나기 싫으시다면 하고 덧붙이는 그의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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