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딥 인사이드 아웃-45화 (45/211)
  • 신은 죽었다(2)

    '역시 기온은 3회째 작전을 할 때와 비슷하군.'

    지난 2주간의 기온 변화를 측정해봤을 때 지상에 불어닥친 한파는 어느정도 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또한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예를 들어 북극이나 남극은 더럽게 추울 것이고, 반면 적도와 가까울수록 좀 더 따뜻할 것이다.

    지구가 아직 태양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지구의 하늘을 뒤덮은 암흑물질이 햇빛을 100% 차단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딱 맞아떨어져야만 세울 수 있는 가설이다.

    대체 하늘을 뒤덮은 건 뭐지? 나도 일단 편의상 암흑물질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말로 뭔지 모르겠다. 도무지 감도 안 잡힌다.

    '사태 당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이른 새벽, 좀 더 빨랐다면 자정을 기점으로 움직였겠지.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국가에서 태양이 뜨지 않았다는 정보를 그쯤에 공유 받았을 테니까.'

    전조도 없이 하늘을 암흑으로 뒤덮을 줄이야. 여러 강대국들이 자랑하는 수많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정거장, 달 개척 기지에선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GPS가 안 잡히는 걸 보면 위성과 연결이 안 된다는 건데, 지금쯤 우주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죽을 맛이겠어.'

    지구는 갑자기 전조도 없이 암흑에 휩싸였지, 지상과 통신도 안 되지, 지구로 돌아가려면 우주왕복선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정확한 실시간 좌표를 찍지 못하면 복귀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알아서 잘 먹고 살리라 믿는다. 우주에서도 일단 가축을 기르고 곡식을 재배하는 자급자족 시스템이 돌아간다고 들었으니까.

    "여기서 찢어집시다."

    상계대교를 넘어온 우리는 노원고등학교 앞에서 찢어지기로 했다.

    김명호는 운반조와 대기조, 그리고 정찰조까지 모두 이끌고 노원구 북부에 밀집된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랑데뷰 포인트는 노원고등학교와 노원역 사이에 위치한 용화여고로 정해뒀다.

    물자를 찾기 위해 한시바삐 움직이는 차도식파 조직원들 너머로 또 다른 밀수조직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게 보였다. 군 부대에서 웃돈 주고 사들인 야투경이 이럴 때는 참 쓸만 했다.

    저들은 처음부터 롯데백화점 노원점으로 향하지 않는 우리에게 꽤 당황한듯 했지만, 곧 자신들로 질 수 없다는 듯 인근 아파트단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저 세계의 이권이나 정치질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이 짓거리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때문에 한시바쁜 지상에서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보다, 그럴 시간에 물자를 하나라도 더 빨리 확보하는 게 이득이란 걸 그들도 눈치챈 것이다.

    '이번에는 무턱대고 신호탄이나 쏘는 미친 놈은 없었으면 좋겠네.'

    수많은 밀수조직을 뒤로 한 나는 곧장 노원로를 따라 남하했다. 여기서 노원역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주변에 있는 것도 죄다 아파트 아니면 학교였기 때문에 사주경계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아파트는 입구가 딱딱 정해져 있기 때문에 기습을 당할 염려가 적고, 학교는 운동장이 워낙 넓어서 뭔가 수상쩍은 게 있으면 금세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목이 아플 만큼 올려다봐야 하는 아파트 단지 외곽을 천천히 살폈다.

    실질적인 흑야 사태가 벌어진지 대략 2주. 기온은 영하 25에서 20도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더럽게 추운 것은 팩트.

    난방시설이 없다면 아무리 옷과 이불을 뒤집어 쓴다고 해도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원래 추우면 추울수록 몸에서 열을 내기 위해 칼로리를 더 빨리 소모하니까.

    난방이 안 되면 뭔가를 꾸준히 먹어야 하고, 반대로 난방이 된다고 해도 뭔가를 먹긴 먹어야 한다.

    현재 지상의 상황을 보면 일반인으로 구성된 생존자들이 갑작스럽게 닥친 혹한기에 잘 대처했을리가 없다.

    '아파트 단지와 가까운 곳에 역들이 있어서 대다수의 생존자들이 역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역이라고 해서 정말로 안전한 걸까?'

    벌집처럼 빽빽한 아파트 창문에는 불빛 한점도 보이지 않고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도 없다.

    죽었거나 피신했거나 둘중 하나일텐데, 그런 것치곤 주변이 너무나도 조용했다.

    지저 도시로 피난한 우리도 3일마다 뛰어나와서 12시간씩 지상 작전을 벌이는데, 생존에 훨씬 더 민감해야할 일반인 생존자 그룹이 조용하다는 건 명백하게 이상하다.

    혹시 몰라 상계대교를 건너기 전에 방학역에 들러봤는데, 방학역에 있던 군 부대와 피난민들은 진즉에 떠나고 없었다.

    그건 바꿔말하면 군 부대의 도움으로 역 하나를 점거해도 그곳에서 2주를 채 버티지 못할 만큼 생존이 힘들었다는 얘기다.

    방학역 근처에는 주유소와 홈플러스, 그리고 편의점까지 제법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학역보다 규모가 훨씬 큰 노원역의 상황을 살펴보면 답이 나오겠지.'

    노원역은 연식이 꽤 된 역이지만 서울 북부에서도 알아주는 역세권이라 이용객 수가 상당한 대형 역이다.

    그런 주제에 환승은 서울역만큼이나 거지같아서 무려 7호선과 4호선 사이의 거리가 장난아니다. 지하 3층에 7호선이 있고 지상 3층에 4호선이 있으니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다.

    특히 유사시 안전에 대비한 지하철역의 특성상 층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가 제법 높으니 7호선과 4호선간의 실질적인 거리는 훨씬 더 멀다고 봐야한다.

    노원역 3번 출구 근처에 도착한 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롯데백화점 노원점을 면밀히 살폈다. 예상대로 입구에는 사람이 몇 명인가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들기 좋아하는 기괴한 것들도 아니었고, 얼굴을 확인하는 것 만으로도 눈이 따끔거리는 놈들 역시 아니었다.

    '백화점 주차장에 있던 차량을 죄다 끌어와서 거대한 방벽을 만들었군. 흑야 사태 당일에 북한산 입구 뚫어보겠답시고 인근에 중장비도 꽤 유입됐으니...가능성은 있지.'

    백화점은 건물 자체가 거대하고 튼튼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대형 병원과 크게 다를 것 없다. 지하 주차장과 주요 출입구만 잘 막으면 물 샐 틈 없이 감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백화점 내부에서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걸 보니 저들도 무차별적으로 불빛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도로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차량 너머에 몸을 숨긴 채 좀 더 살펴보니 개인의 힘으로는 뭘 어떻게 해도 방벽을 뚫을 수 없어보였다.

    중장비로 차량을 겹겹이 쌓아두고, 입구에는 대형 버스 하나를 떡하니 가로로 박아뒀다. 초병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총을 든 채 버스 안에서 외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누군가가 접근하면 신원을 확인하고 수동으로 버스 문을 개폐해서 백화점 내부로 들여보내주는 방식인 것 같았다. 누가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꽤 기발한 경계초소였다.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인재도 많이 모인다고 해야 하나?

    '다른 입구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차량으로 방벽을 쌓아두고 버스나 대형 트럭으로 입구를 막았을 거야.'

    노원역은 지하 3층까지 있으니 바로 옆에 위치한 롯데백화점에서 물자만 정기적으로 확보한다면 충분히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터.

    나는 규모가 꽤 큰 군 부대가 이곳을 체계적으로 장악했거나, 아니면 민간인과 경찰이 협력해서 무기를 확보하고 이곳을 장악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둘다 일수도 있고.

    역시 섣불리 롯데백화점에 접근하기보단 노원역에 있을 생존자들과 우선적으로 접근해보는 게 낫겠다 싶어 일어섰다.

    "!"

    바로 그 순간, 노원역 출입구에서 난데없이 일렬로 기차놀이를 하듯 빠져나온 검은 무리의 등장에 나는 다급히 자세를 낮췄다.

    그들은 누군가의 장례식이 열린 것도 아닌데 시커먼 먹물이라도 칠한 것처럼 온통 검은색 정장에 패딩, 그리고 모자에 얼굴을 가리는 검은 천을 엮어서 뒤집어 쓰고 있는 기이한 무리였다.

    선두에 선 자가 불빛 한 점 없는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발걸음을 움직여 뒤따라오는 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머지않아 롯데백화점 입구를 막고 있는 버스 앞에 도달하더니 양팔을 벌려 크게 호를 그렸다.

    "좋은 밤입니다 형제님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상 아침이다.

    곧 버스 안에 있던 초병들이 무어라 쑥덕거리는 것 같더니, 버스 문을 수동으로 개폐해 주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줄로 묶인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움직이는 검은 무리는 흡사 인간지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검은 무리가 모두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자 버스 문은 다시 닫혔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은 다시 정적이라는 물감으로 칠해졌다.

    '...역시 팀원들을 섣불리 데려오지 않길 잘 했어.'

    차도식파와 저들이 마주쳤다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100% 무력충돌을 일으켰을 것이다. 척봐도 뒤가 구려보이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롯데백화점을 마냥 포기하는 것도 아깝고, 무엇보다 2주간 지상에서 용케 생존하고 있는 생존자 집단과의 정보 교류도 필수불가결 했다.

    검은 무리가 좀처럼 돌아올 기색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노원역으로 진입했다.

    노원역 1층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듯, 어둠과 냉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상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인기척이 아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자세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사람들의 말소리나 발소리, 그리고 지하층에서 미약하게 새어나오는 생활적인 불빛과 냄새.

    생활적인 불빛과 냄새는 문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너무 소란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너무 수상해보이지 않게 당당한 걸음걸이로 이동했다.

    지금의 나는 홀로 외롭게 지상을 떠돌다 노원역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방문한, 사람의 온기와 정이 고픈 떠돌이 생존자처럼 보여야 한다.

    '엑소스켈레톤 파츠가 좀 걸리긴 하지만, 기껏해야 파츠니까 적당히 가게 털어서 훔쳐왔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지.'

    내 양팔에 착용된 엑소스켈레톤 파츠는 일반인이 가질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생존 능력이 탁월한 떠돌이 생존자 컨셉에는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소품이었다.

    지금 나는 철저하게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격렬하게 표출하는 것처럼 각잡힌 방한복과 커다란 배낭, 그리고 무장까지 갖춘 상태가 아닌가?

    우선 군용 야투경은 벗어서 배낭에 처박아두고, 아직 지상에서의 조심성이 조금 부족해보이는 놈처럼 보이게끔 손전등까지 꺼내들었다.

    총기는 삐딱하게 들고, 어두운 내부를 불안하게 살피는 것처럼 요란하게 손전등을 흔들면서 움직였다.

    이정도면 외부인이라 경계당할지언정, 어딘가 어설픈 떠돌이 생존자처럼 보이긴 할 거다.

    '이도저도 안 되면 적당한 틈을 봐서 빠져나오면 그만이고.'

    마침내 지하 1층 계단을 지키고 있던 무리와 접촉하기 전, 나는 안도하는 얼굴로 한숨을 쉬며 먼저 말을 꺼냈다. 물론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손전등 불빛을 비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기요."

    "어우 씨발! 깜짝이야!"

    "뭐야 당신? 언제 여기로 들어온 거야?"

    계단 중간에 자판기를 넘어뜨려서 초라한 방벽을 만들어둔 그들은 깜짝 놀라 내게 총구를 겨눴다. 괜히 세게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재빨리 양팔을 들어올렸다.

    "잠깐만요! 전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여기저기 떠돌다가 여기까지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런 것치곤 무장이 좀 과해보이는데? 양팔에 차고 있는 그거, 엑소스켈레톤 파츠 아냐?"

    왼쪽에 서있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말라깽이 사내가 째진 눈으로 내 엑소스켈레톤 파츠를 흘겨보며 물었다.

    "이건 저도 어렵게 구한 겁니다. 여기서 거리가 좀 있는 엑소스켈레톤 정비소에서 분해된 파츠가 있길래 착용한 거라고요!"

    "행색을 보아하니 아주 작정하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여기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들어온 거야?"

    "여기 노원역 아닙니까? 이 근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역이라는 얘기를 다른 생존자 집단에게서 들었거든요. 그래서 여기라면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서......"

    "안 그래도 입이 많아서 이쪽도 곤란한데 그쪽까지 받아달라? 그건 안......"

    "잠깐. 대장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만 거부하라고 했지 '준비된 사람'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오른쪽에 서있던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말라깽이의 말을 끊었다.

    "좀 얼빠진 것 같긴 해도 저정도로 무장하고 혼자 지상을 돌아다닐 배짱도 있는 사람이면 충분히 준비된 사람 아냐?"

    "야,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수상하잖아. 저렇게 작정하고 혼자 돌아다니는 놈을 대체 뭘 믿고......"

    "그래도 대장 말은 따라야지. 어차피 판단은 대장이 하는 거잖아. 난 나중에 갈굼당하기 싫다고."

    "쓰으으읍......"

    말라깽이는 곤란한 듯 쓴소리를 내다가 결국 총구를 내렸다.

    "일단 들어오쇼. 여기 무장한 사람들 많으니까 괜히 허튼 짓 할 생각은 꿈도 꾸지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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